[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무정' 이광수 (2021.02.04)

푸레택 2021. 2. 4. 17:29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 이광수의 『무정』에 실려있는 장편소설 '무정'을 다시 읽었다. 이광수의 '무정' 은 근대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1910년대 개화한 조선의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소재로 하여 신교육과 자유연애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의지나 계몽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무정》 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 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순결한 청년이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확확 달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도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弔喪)하는 '무정(無情)'을 마치자.

◆ 전체 줄거리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쬐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 장로의 딸 선형이가 명년에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 교사로 초빙하여 오늘 오후 세 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다.

이야기의 서두는 경성 영어 학교 교사 이형식이 장안의 부호 김 장로의 고명딸인 선형의 영어 개인 지도를 부탁 받고 첫번 방문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형식은 동경 유학을 마친 당대 일류 지식인이나 일찍이 고아가 되어 역경을 겪은 데다 내성적 성격이라 여성 교제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뛰어난 미모인 선형에게 반한다. 그리고 그 날 밤 하숙집에 돌아와서 형식은 뜻밖의 손님인 박영채를 만나게 된다. 영채는 이형식이 어릴 때 고아일 적에 형식을 데려다 기르고 자식처럼 대하여 준 은사 박 진사의 딸인데 장차 형식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정혼했었다.

그러나 박 진사의 개화 운동이 세상 사람들의 개화 문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실패하고 집안이 망하자 형식은 영채와 이별하게 되었는데, 7년 만에 해후하여 그 뒤 영채가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도우려 기생이 되고 형식을 사모하며 수절해 왔다는 전말을 듣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형식은 눈물을 흘리는 한편, 그녀가 기생이라는 혐오감과 미인이라는 유혹의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에 형식은 선형에 대한 연정과 은사의 딸이자 지난 날 아내로 암시되었던 영채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게 된다. 또, 기생인 영채를 구해 낼 돈 천 원이 없음을 한탄하는 사이에 영채는 지금까지 형식을 위해 지켜 오던 정조를 배 학감(명식),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인 김현수 일당에게 유린당하고 만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하러 평양행 기차에 오른다.

그녀의 유서를 쥐고 눈물을 뿌리며 영채를 만나려 뒤따라 평양에 간 이형식은 소득 없이 돌아와서 오히려 학생들에게 기생을 따라갔다는 오해만 사고 이에 분격하여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는 김현수가 거짓 소문을 낸 까닭이었다. 이런 형식에게 뜻밖에 김 장로댁 선형과의 결혼 신청이 들어오고 형식은 이를 받아들여 약혼식을 치른 후에 함께 미국에 유학을 할 준비를 하게 된다.

한편, 자살 길에 오른 영채는 차 안에서 소위 신여성인 병욱을 만나 그녀의 황주 집에 한 달 동안 머무는 동안 봉건적 사고 방식에서 근대적 합리주의로 정신적인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병욱의 호의로 함께 동경 유학 길에 오르던 중, 기차 안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는 형식과 선형을 만나게 된다. 이리하여 형식은 새삼 애정과 의리 간에 갈등에 빠지게 되고 선형과 영채 사이에는 삼각 관계의 불협화음이 생긴다. 기차는 삼랑진 수재 현장에 이르러 연착하게 되고 여기에서 네 젊은이는 고통을 당하는 수재민을 위해 자선 음악회 등 함께 봉사 활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 간의 개인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그 대신 토론을 통해 허물어진 민족의 장래를 담당할 역군으로서 사명을 다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 인물들의 근황이 소개되고 작가의 계몽 의식이 서술된다.

◆ 감상 및 해설

'무정'은 춘원 이광수의 첫 장편 소설로 한국 근대 문학사상 최초의 장편 소설이란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 1917년 1월∼6월까지 '매일 신보'에 연재된 작품이다. 근대 의식과 계몽 의식을 고취(무정은 공리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러한 공리성과 목적성 앞에 모든 개인의 고민과 갈등은 의미를 잃고 만다.)하면서 자아의 각성을 촉구하고, 근대적 인물의 창조, 심리 묘사, 구어체 사용 등으로 소설 문학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자아의 각성을 바탕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민족의 각성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신소설에 비해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구체화했고, 섬세한 심리 묘사로까지 발전하였다. 전환기의 새로운 애정관, 민족주의적 열정과 계몽성, 신구 가치관의 대립과 갈등 등을 반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여성 - 영채, 신여성 - 선형과 두 여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형식 등 세 남녀의 애정 관계가 민족애로 승화되는 줄거리가 중심을 이룬다. 즉, 작자는 봉건적 도덕관과 신문명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당시 개화기 한국인들의 갈등을 팽팽한 윤리관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나'라는 개인보다는 '민족'이라는 커다란 이상(理想)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민족 계몽이라는 주제 의식을 부각시킨다. 특히, 인물의 근대적 성격, 합리적 사건 전개, 현재 진행형과 과거형의 적절한 사용, 평이하고 자연스런 문장 등은 문학사적인 커다란 성과이다. 또한 특정한 공간 및 시간을 설정하여 사실주의적인 묘사에 한층 심화된 모숩을 보이며 공간을 묘사하는 방법도 대단히 구체성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현대 문학의 첫 출발점으로 삼는 데 이의가 없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시대적 진취성(계몽주의적)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구도덕적인 여인의 정절과 기교도적 순결성이 미묘하게 잘 얽혀 있고, 인물들의 관계는 사제관계의 축(이런 구조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살리려는 안창호의 준비론 사상과 일치하나, 무정의 대부분이 민족의 장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사사로운 사랑의 문제로 인한 갈등인 점은 준비론의 낭만적 적용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으로 맺어지고 있다.

◆ 작품의 줄거리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 경성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이형식은 미국에 유학하려는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개인 지도한다. 그러던 중 형식은 선형에게 차츰 연정을 품게 된다. 그 무렵, 형식의 어린 시절 동무이자 옛 은사 박 진사의 딸인 영채가 하숙집에 찾아온다. 영채는 애국지사로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있었다. 비록 몸은 기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고 형식을 사모하며 절개를 지켜왔다. 형식은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 때 영채에게 혹심을 품고 있던 경성 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는 배 학감으로 하여금 그녀를 청량사로 유인하게하여 겁탈한다. 형식이 영채를 구하려 청량사로 가지만 이미 때가 늦은 다음 이었다. 다음날 형식은 영채가 있는 기생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영채는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평양으로 떠난 뒤였다.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동경 유학생인 신여성 김병욱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하는 길이었는데, 영채의 신세에 대하여 듣고는 영채를 깨우치기 시작한다.

한편, 형식은 영채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면서 그녀를 찾아 평양으로 갔지만, 영채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 오니 김현수는 거짓 소문을 내어 형식을 경성 학교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김 장로는 난관에 빠진 형식을 자기의 딸 선형과 결혼시켜 둘이 함께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런데 신혼 여행 겸 유학길인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형식과 선형은 영채와 병욱을 만나게 된다. 영채는 병욱의 도움으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고, 이제 일본으로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기차는 삼랑진 수해 현장에 이르러 출발이 지연된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수재민 의연금 모금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민중 계몽과 민족의 미래를 담당할 주체임을 역설한다.

[소설읽기]

■ 무정(無情) / 이광수

1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순결한 청년이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확확 달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남자로 생겨나서 이러함이 못생겼다면 못생겼다고도 하려니와, 여자를 보면 아무러한 핑계를 얻어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말 한마디라도 하여 보려 하는 잘난 사람들보다는 나으리라.

형식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우선 처음 만나서 어떻게 인사를 할까. 남자 남자 간에 하는 모양으로, ‘처음 보입니다. 저는 이형식이올시다’ 이렇게 할까. 그러나 잠시라도 나는 가르치는 자요, 저는 배우는 자라, 그러면 미상불 무슨 차별이 있지나 아니할까. 저편에서 먼저 내게 인사를 하거든 그제야 나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할까. 그것은 그러려니와 교수하는 방법은 어떻게나 할는지. 어제 김장로에게 그 청탁을 들은 뒤로 지금껏 생각하건마는 무슨 묘방이 아니 생긴다. 가운데 책상을 하나 놓고, 거기 마주앉아서 가르칠까. 그러면 입김과 입김이 서로 마주치렷다. 혹 저편 히사시가미(양갈래로 딴 머릿단)가 내 이마에 스칠 때도 있으렷다. 책상 아래에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얼굴이 붉어지며 혼자 빙긋 웃었다.

아니 아니? 그러다가 만일 마음으로라도 죄를 범하게 되면 어찌하게. 옳다? 될 수 있는 대로 책상에서 멀리 떠나 앉겠다. 만일 저편 무릎이 내게 닿거든 깜짝 놀라며 내 무릎을 치우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면 여자에게 대하여 실례라, 점심 후에는 아직 담배는 아니 먹었건마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입김을 후 내어 불어 본다. 그 입김이 손바닥에 반사되어 코로 들어가면 냄새의 유무를 시험할 수 있음이라. 형식은, 아뿔싸! 내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내 마음이 이렇게 약하던가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에 힘을 주어 이러한 약한 생각을 떼어 버리려 하나, 가슴속에는 이상하게 불길이 확확 일어난다. 이때에,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쾌활하기로 동류간에 유명한 신우선(申友善)이가 대팻밥 모자를 갖춰 쓰고 활개를 치며 내려온다. 형식은 자기 마음속을 꿰뚫어보지나 아니한가 하여 두 뺨이 한번 더 후끈하는 것을 겨우 참고 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면서, “오래 막혔구려” 하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오래 막혔구려는 무슨 막혔구려야. 일전 허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형식은 얼마큼 마음에 수치한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리며,
“아직 그런 말에 익숙지를 못해서……” 하고 말끝을 못 맺는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급지 않거든 점심이나 하세그려.”
“점심은 먹었는 걸.”
“그러면 맥주나 한잔 먹지.”
“내가 술을 먹는가.”
“그만 두게. 사나이가 맥주 한 잔도 못 먹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자 잡말 말고 가세.” 하고 손을 끌고 안동파출소 앞 청국 요릿집으로 들어간다.

“아닐세. 다른 날 같으면 사양도 아니하겠네마는” 하고 다른 날이란 말이 이상하게나 아니 들렸는가 하여 가슴이 뛰면서,
“오늘은 좀 일이 있어.”
“일? 무슨 일? 무슨 술 못 먹을 일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러한 경우에 다만 ‘급히 좀 볼일이 있어’ 하면 그만이려니와 워낙 정직하고 나약한 형식이라, 조곰이라도 거짓말을 못하여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세시부터 개인교수가 있어.”
“영어?”
“응.”
“어떤 사람인데 개인교수를 받어?”

형식은 말이 막혔다. 우선은 남의 폐간을 꿰뚫어볼 듯한 두 눈으로 형식의 얼굴을 유심하게 들여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숙인다.
“응, 어떤 사람인데 말을 못 하고 얼굴이 붉어지나, 응?”
형식은 민망하여 손으로 목을 쓸어 만지고 하염없이 웃으며,
“여자야.”
“요― 오메데토오(아― 축하하네). 이이나즈케(약혼한 사람)가 있나 보네그려. 음 나루호도(그러려니). 그러구도 내게는 아무 말도 없단 말이야. 에, 여보게” 하고 손을 후려친다.

형식은 하도 심란하여 구두로 땅을 파면서,
“아니야. 저, 자네는 모르겠네. 김장로라고 있느니…….”
“옳지, 김장로의 딸일세그려? 응. 저, 옳지, 작년이지.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명년 미국 간다는 그 처녀로구먼. 베리 굿.”
“자네 어떻게 아는가?”
“그것 모르겠나. 이야시쿠모(적어도) 신문기자가. 그런데 언제 엥게지먼트를 하였는가.”
“아니오. 준비를 한다고 날더러 매일 한 시간씩 와달라기에 오늘 처음 가는 길일세.”
“아따, 나를 속이면 어쩔 터인가.”
“엑.”
“히히,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대. 자네 힘에 웬걸 되겠나마는 잘 얼러 보게. 그러면 또 보세” 하고 대팻밥 벙거지를 벗어 활활 부채를 하며 교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형식은 이때껏 그의 너무 방탕함을 허물하더니 오늘은 도리어 그 파탈하고 쾌활함이 부러운 듯하다.

2

미인이라는 말도 듣기 싫지 아니하거니와 이이나즈케(약혼), 엥게지먼트라는 말이 이상하게 기쁘게 들린다. 그러나 ‘자네 힘에 웬걸 되겠는가’ 하였다. 과연 형식은 아무 힘도 없다. 황금시대에 황금의 힘도 없고, 지식시대에 남이 우러러볼 만한 지식의 힘도 없고, 예수 믿는 지는 오래나 워낙 교회에 뜻이 없으며 교회 내의 신용조차 그리 크지 못하다. 아무 지식도 없고, 아무 덕행도 없는 아이들이 목사나 장로의 집에 자주 다니며 알른알른하는 덕에 집사도 되고, 사찰도 되어 교회 내에서 젠체하는 꼴을 볼 때마다 형식은 구역이 나게 생각하였다. 실로 형식에게는 시체 하이칼라 처자의 애정을 끌 만한 아무 힘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자연히 낙심스럽기도 하고, 비감스럽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에 김광현(金光鉉)이라 문패 붙은 집 대문에 다다랐다. 비록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는 예수의 사도연마는 그도 개명하면 땅도 사고, 수십 인 하인도 부리는 것이라. 김장로는 서울 예수교회 중에도 양반이요 재산가로 두셋째에 꼽히는 사람이라. 집도 꽤 크고 줄행랑조차 십여 간이 늘어 있다. 형식은 지위와 재산의 압박을 받는 듯한, 일변 무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면서 소리를 가다듬어, “이리 오너라” 하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무리 하여도 뚝 자리가 잡히지 못하고, 시골 사람이 처음 서울 와서 부르는 소리와 같이 어리고 떨리는 맛이 있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하는 어멈의 말을 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중문을 지나 안대청에 오르다. 전 같으면 외객이 중문 안에를 들어설 리가 없건마는 그만하여도 옛날 습관을 많이 고친 것이라. 대청에는 반양식으로 유리 문도 하여 달고 가운데는 무늬 있는 책상보 덮은 테이블과 네다섯 개 홍모전 교의가 있고, 북편 벽에 길이나 되는 책상에 신구서적이 쌓였다. 김장로가 웃으면서 툇마루에 나와 형식이가 구두끈 끄르기를 기다려 손을 잡아 인도한다. 형식은 다시 온공하게 국궁례를 드린 후에 권하는 대로 교의에 앉았다. 김장로는 이제 사십오륙 세 되는 깨끗한 중로라. 일찍 국장도 지내고 감사도 지낸 양반으로서 십여 년 전부터 예수교회에 들어가 작년에 장로가 되었다. 김장로가 형식에게 부채를 권하며,

“매우 덥구려. 자 부채를 부치시오.”
“녜, 금년 두고 처음인가 봅니다.”

하고 부채를 들어 두어 번 부치고 책상 위에 놓았다. 장로가 책상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울리니 건넌방으로서, “녜” 하고 열너덧 살 된 예쁜 계집아이가 소반에 유리 대접과 은으로 만든 서양 숟가락을 놓아 내어다가 형식의 앞에 놓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복숭아 화채에 한줌이나 될 얼음을 띄웠다. 손이 오기를 기다리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모양이라.

“자, 더운데 이것이나 마시오.”

하고 장로가 친히 숟가락을 들어 형식을 준다. 형식은 사양할 필요도 없다 하여 연해 십여 술을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으로 치어들고 죽 들이켜고 싶건마는 혹 남 보기에 체면 없어 보일까 저어하여 더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술을 놓았다. 그만하여도 얼마큼 속이 뚫리고 땀이 걷고 정신이 쇄락하여진다. 장로는,

“일전에도 말씀하였거니와 내 딸을 위하여 좀 수고를 하셔야 하겠소. 분주하신 줄도 알지마는 달리 청할 사람이 없소그려. 영어를 아는 사람이야 많겠지오마는 그렇게…… 어…… 말하자면…… 노형 같은 이가 드무시니까.”

하고 잠시 말을 끊고 ‘너는 신용할 놈이지’ 하는 듯이 형식을 본다. 형식은 남이 젊은 딸을 제게 맡기도록 제 인격을 신용하여 주는 것이 한껏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아까 입에 손을 대고 냄새나는 것을 시험하던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그러나 기실 장로는 여러 사람의 말도 듣고 친히 보기도 하여 형식의 인격을 아주 신용하므로 이번 계약을 맺은 것이라. 여간 잘 알아보지 아니하고야 미국까지 보내려는 귀한 딸을 젊은 교사에게 다만 매일 한 시간씩이라도 맡길 리가 없는 것이라. 장로는 다시 말을 이어,

“하니까 노형께서 맡아서 일년 동안에 무엇을 좀 알도록 가르쳐 주시오.”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그것이 민망하올시다.”

“천만에. 영어뿐 아니라 노형의 학식은 내가 다 들어 아는 바요.”

하고 다시 초인종을 울리니, 아까 나왔던 계집아이가 나온다.

“얘, 이것(화채 그릇) 들여가고 마님께 아씨 데리고 이리 나옵시사고 여쭈어라.”

“녜” 하고 소반을 들고 들어가더니, 저편 방에서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장차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무슨 큰일을 기다리는 듯이 속이 자못 덜렁덜렁하며 가슴이 뛰고 두 뺨이 후끈후끈한다. 형식은 장로의 눈에 아니 띄우리만큼 가만가만히 옷깃을 바르고, 몸을 바르고, 눈과 얼굴에 아무쪼록 젊지 아니한 위엄을 보이려 한다.

이윽고 건넌방 발이 들리며 나이 사십이 될락말락한 부인이 연옥색 모시 적삼, 모시 치마에 그와 같이 차린 여학생을 뒤세우고 테이블 곁으로 온다. 형식은 반쯤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서 공손하게 읍하였다. 부인과 여학생도 읍하고, 장로의 가리키는 교의에 걸터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3
장로가 형식을 가리키며,

“이 어른이 내가 매양 말하던 이형식 씨요. 젊으시지마는 학식이 도저하고 또 문필도 유명한 어른이오. 이번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쳐 줍소사 하고 내가 청하였더니, 분주하심도 헤아리지 아니시고 이처럼 허락을 하여 주셨소. 이제부터 매일 오실 터이니까 내가 출입하고 없더라도 부인께서 잘 접대를 하셔야 하겠소” 하고 다시 형식을 향하여,

“이가 내 아내요, 저애가 내 딸이오. 이름은 선형인데 작년에 정신학교라고 졸업은 하였지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요.”

형식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과 선형이도 답례를 한다. 부인은 형식을 보며,

“제 자식을 위하여 수고를 하신다니 감사하올시다. 젊으신 이가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참 은혜 많이 받으셨삽니다.”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하고 형식은 잠깐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는 듯 선형을 보았다. 선형은 한 걸음쯤 그 모친의 뒤에 피하여 한편 귀와 몸의 반편이 그 모친에게 가리웠다. 고개를 숙였으며 눈은 보이지 아니하나 난 대로 내어 버린 검은 눈썹이 하얗게 널찍한 이마에 뚜렷이 춘산을 그리고 기름도 아니 바른 까만 머리는 언제 빗었는가 흐트러진 두어 오리가 불그레 복숭아꽃 같은 두 뺨을 가리어 바람이 부는 대로 하느적하느적 꼭 다문 입술을 때리고, 깃 좁은 가는 모시 적삼으로 혈색 좋은 고운 살이 몽롱하게 비추이며, 무릎 위에 걸어 놓은 두 손은 옥으로 깎은 듯 불빛에 대면 투명할 듯하다.

그 부인은 원래 평양 명기 부용이라는 인물 좋고 글 잘하고 가무에 빼어나 평양 춘향이라는 별명 듣던 사람이러니, 이십여 년 전 김장로의 부친이 평양에 감사로 있을 때에 당시 이십여 세 풍류 남아이던 책방 도령 이도령이라, 김도령의 눈에 들어 십여 년 전 김장로의 소실로 있다가 본부인이 별세하자 정실로 승차하였다. 양반의 가문에 기생 정실이 망령이어니와, 김장로가 예수를 믿은 후로 첩 둠을 후회하나 자녀까지 낳고 십여 년 동거하던 자를 버림도 도리에 그르다 하여 매우 양심에 괴롭게 지내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정실이 별세하므로 재취하라는 일가와 붕우의 권유함도 물리치고 단연히 이 부인을 정실로 삼았음이라. 부인은 사십이 넘어서 눈꼬리에 가는 주름이 약간 보이건마는, 옛날 장부의 간장을 녹이던 아리땁고 얌전한 모양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선형의 눈썹과 입 얼레는 그 모친과 추호 불차니, 이 눈썹과 입만 가지고도 족히 미인 노릇을 할 수가 있으리라.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형식이가 남의 처녀를 대할 때마다 생각하는 버릇이니, 형식은 처녀를 대할 때에 누이라고밖에 더 생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가슴속에 이상한 불길이 일어남이니, 이는 청년 남녀가 가까이 접할 때에 마치 음전과 양전이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서로 감응하여 불꽃을 일리는 것과 같이 면치 못할 일이며, 하늘이 만물을 내실 때에 정한 일이라,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덕과 수양의 힘으로 제어할 뿐이니라. 형식이 말없이 앉았는 양을 보고 장로가 선형더러,

“얘, 지금 곧 공부를 시작하지. 아차, 순애는 어디 갔느냐. 그애도 같이 배워라. 나도 틈 있는 대로는 배울란다.”

“녜” 하고 선형이가 일어나 저편 방으로 가더니 책과 연필을 가지고 나온다. 그 뒤로 선형과 동년배 되는 처녀가 그 역시 책과 연필을 들고 나와 공순하게 읍한다. 장로가, “이애가 순애인데 내 딸의 친구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불쌍한 아이요” 하는 말을 듣고 형식은 자기와 자기의 누이의 신세를 생각하고 다시금 순애의 얼굴을 보았다. 의복 머리를 선형과 꼭 같이 하였으니 두 사람의 정의를 가히 알려니와, 다만 속이지 못할 것은 어려서부터 세상 풍파에 부대낀 빛이 얼굴에 박혔음이라. 그 빛은 형식이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볼 때에 있는 것이요, 불쌍한 자기 누이를 볼 때에 있는 것이라. 형식은 순애를 보매 지금껏 가슴에 설렁거리던 것이 다 스러지고 새롭게 무거운 듯한 감정이 생겨 부지불각에 동정의 한숨이 나오며 또 한번 순애를 보았다. 순애도 형식을 본다.

장로와 부인은 저편 방으로 들어가고 형식과 두 처녀가 마주앉았다. 형식은 힘써 침착하게,

“이전에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고, 이에 처음 두 처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다. 형식도 어이없이 앉았다가 다시,

“이전에 좀 배우셨는가요.”

그제야 선형이가 고개를 들어 그 추수같이 맑은 눈으로 형식을 보며,

“아주 처음이올시다. 이 순애는 좀 알지마는.”

“아니올시다. 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도……? 그것은 물론 아실 터이지오마는.”

여자의 마음이라 모른다기는 참 부끄러운 것이라 선형은 가지나 붉은 뺨이 더 붉어지며,

“이전에는 외웠더니 다 잊었습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부터 시작하리까요?”

“녜” 하고 둘이 함께 대답한다.

“그러면, 그 공책과 연필을 주십시오. 제가 에이, 비, 시, 디를 써 드릴 것이니.”

선형이가 두 손으로 공책에다 연필을 받쳐 형식을 준다. 형식은 공책을 펴놓고 연필 끝을 조사한 뒤에 똑똑하게 a, b, c, d를 쓰고, 그 밑에다가 언문으로 ‘에이’ ‘비’ ‘시’ 하고 발음을 달아 두 손으로 선형에게 주고 다시 순애의 공책을 당기어 그대로 하였다.

“그러면 오늘은 글자만 외기로 하고 내일부터 글을 배우시지요. 자 한번 읽읍시다. 에이.” 그래도 두 학생은 가만히 있다.

“저 읽는 대로 따라 읽읍시오. 자, 에이, 크게 읽으셔요. 에이.”

형식은 기가 막혀 우두커니 앉았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꼭 물고, 순애도 웃음을 참으면서 선형의 낯을 쳐다본다. 형식은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이때에 장로가 나오면서,

“읽으려무나, 못생긴 것. 선생님 시키시는 대로 읽지 않고.”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책을 본다. 형식은 하릴없이 또 한번,

“에이.”
“에이.”
“비.”
“비.”
“시.”
“시.”

이 모양으로 ‘와이’ ‘제트’까지 삼사 차를 같이 읽은 후에 내일까지 음과 글씨를 다 외우기로 하고 서로 경례하고 학과를 폐하였다.

4
형식은 김장로 집에서 나와서 바로 교동 자기 객주로 돌아왔다.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일년 넘어 다니던 습관으로 집에 왔다. 말하자면 형식이가 온 것이 아니요, 형식의 발이 형식을 끌고 온 모양이라.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차리다가 치마로 손을 씻으면서,

“이선생 웬일이시오” 하고 이상하게 웃는다. 형식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왜요.”

“아니, 그처럼 놀라실 것은 없지마는…….”

“왜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우뚝 서서 노파를 본다. 노파는 그 시치미떼고 놀라는 양이 우스워서 혼자 깔깔 웃더니,

“아까 석점쯤 해서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선생을 찾아오셨는데 머리는 여학생 모양으로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기생 같습디다. 선생님도 그런 친구를 사귀는지.”

“어떤 아가씨? 기생?” 하고 형식은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구두끈을 끄르고 마루에 올라서면서,

“서울 안에는 나를 찾아올 여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아마 잘못 알고 왔던 게로구려.”

“에그, 아주 모르는 체하시지. 평양서 오신 이형식 씨라고, 똑똑히 그러던데.”

형식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앉았더니,

“암만해도 모르는 일이외다. 그래 무슨 말은 없어요……?”

“이따가 저녁에 또 온다고 하고 매우 섭섭해서 갑데다.”

“그래 나를 아노라고 그래요.”

“에그, 모르는 이를 왜 찾을꼬. 자 들어가셔서 저녁이나 잡수시고 기다리십시오. 밥맛이 달으시겠습니다.”

형식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한다. 과연 형식을 찾을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장차 김선형이나 윤순애가 형식을 찾아오게 될는지는 모르거니와 지금 어느 여자가 형식을 찾으리요. 하물며 기생인 듯한 여자가. 형식은 밥상을 앞에 놓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어 좀 지나면 온다 하였으니 그때가 되면 알리라 하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신문을 볼 즈음에 대문 밖에 찾는 사람이 있다. 노파가, “이것 보시오” 하고 눈을 꿈적하고 나간다. “이선생 돌아오셨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아까 노파의 말과 같이 모시 치마 저고리에 머리도 여학생 모양으로 쪽쪘다. 형식도 말이 없고 여자도 말이 없고 노파도 어인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 여자가 잠깐 형식을 보더니, 노파더러,

“이선생께서 계셔요?”

“저 어른이 이선생이시외다” 하고 노파도 매우 수상해한다.

“녜, 내가 이형식이오. 누구시오니까.”

여자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흠칫하고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폭 숙인다. 해가 벌써 넘어가고 집집 광명등이 반작반작 눈을 뜬다. 형식은 무슨 까닭이 있음을 알고, 얼른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켜고 마루에 담요를 내어 깐 뒤에,

“아무려나 이리 올라오십시오. 아까도 오셨더라는데 마침 집에 없어서 실례하였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저 같은 계집이 찾아와 선생님의 명예에 상관이 아니 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우선 올라오십시오. 무슨 일이신지…….”

여자는 은근하게 예하고 올라온다. 데리고 온 계집아이도 올라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노파는 건넌방에서 불도 아니 켜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 광경을 본다.

형식은 불빛에 파래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이윽히 보더니, 무슨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감는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얼굴이 혹 뵈온 듯도 합니다마는.”

“박응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에? 박응진?” 하고 형식은 눈이 둥글하고 말이 막힌다. 여자도 그만 책상 위에 쓰러져 운다. 형식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형식은 비창한 목소리로,

“아아, 영채 씨로구려. 영채 씨로구려. 고맙소이다. 나같이 은혜 모르는 놈을 찾아 주시기 고맙소이다. 아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고 여자의 흑흑 느끼는 소리뿐이로다. 따라온 계집아이도 주인의 손에 매어달려 운다.

5
벌써 십유여 년 전이로다.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남으로 십여 리 되는 동네에 박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십여 년을 학자로 지내어 인근 읍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일가가 수십여 호 되고, 양반이요 재산가로 고래로 안주 일읍에 유세력자러니, 신미년 난 역적의 혐의로 일문이 혹독한 참살을 당하고, 어찌어찌하여 이 박진사의 집만 살아 남았다 하더니 거금 십오륙 년 전에 청국 지방으로 유람을 갔다가 상해서 출판된 신서적을 수십 종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서양의 사정과 일본의 형편을 짐작하고 조선도 이대로 가지 못할 줄을 알고 새로운 문명운동을 시작하려 하였다. 우선 자기 사랑에 젊은 사람을 모아 들이고 상해서 사온 책을 읽히며 틈틈이 새로운 사상을 강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귀에는 철도나 윤선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아니하여 박진사를 가리켜 미친 사람이라 하고, 사랑에 모였던 선배들도 하나씩 하나씩 헤어지고 말았다. 이에 박진사는 공부하려도 학자 없어 못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하나 둘 데려다가 공부시키기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 삼사 년 후에는 그의 교육을 받은 학생이 이삼십 명이나 되게 되었고, 그 동안 그 이삼십 명의 의식과 지필묵은 온통 자담하였다. 그러할 즈음에 평안도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각처에 학교가 울흥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박진사는 즉시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 아들 둘도 그렇게 시켰다. 머리 깎고 검은 옷 입는 것이 그때치고는 대대적 대용단이라. 이는 사천여 년 내려오던 굳은 습관을 다 깨트려 버리고, 온전히 새것을 취하여 나아간다는 표라. 인해 집 곁에 학교를 짓고 서울에 가서 교사를 연빙하며 학교 소용 제구를 구하여 왔다. 일변 동네 사람을 권유하며, 일변 아이들과 청년들을 달래어 학교에 와 배우도록 하였다. 일년이 지나매 이삼십 명 학생이 모이고, 교사도 두 사람을 더 연빙하였다. 학생은 삼십 이하, 칠팔 세 이상이었다. 이렇게 학교 경비를 전담하는 외에도 여전히 십여 명 청년을 길렀다. 이 이형식도 그 십여 명 중의 하나이라. 그때 형식은 부모를 여의고 의지가지없이 돌아다니다가 박진사가 공부시킨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라. 마침 형식은 사람도 영리하고 마음이 곧고 재주가 있고, 또 형식의 부친은 이전 박진사와 동년지우이므로 특별히 박진사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 박진사의 아들 형제는 다 형식보다 사오 세 위로되 학력은 형식에게 밀리고 더구나 산술과 일어는 형식에게 배우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여러 동창들은 형식이가 장차 박선생의 사위가 되리라 하여 농담삼아, 시기삼아 조롱하였다. 대개 우리 소견에 박선생이라 하면 전국에 제일가는 선생인 줄 알았음이라. 그때 박진사의 딸 영채의 나이 열 살이니 지금 꼭 열아홉 살일 것이라. 박진사는 남이 웃는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영채를 학교에 보내며 학교에서 돌아온 뒤에는 소학, 열녀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열두 살 되던 여름에는 시전도 가르쳤다. 박진사의 위인이 점잖고 인자하고 근엄하고도 쾌활하여 어린 사람들도 무서운 선생으로 아는 동시에 정다운 친구로 알았었다. 그는 세상을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집을 바치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라도 바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네 사람들은 그의 성력을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이러한 지 육칠 년에 원래 그리 많지 못하던 재산도 다 없어지고 조석까지 말유하게 되니, 학교를 경영할 방책이 만무하다. 이에 진사는 읍내 모모 재산가를 몸소 방문도 하고 사람도 보내어 자기 경영하는 학교를 맡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오직 세상을 위하여 자기의 온 재산과 온 성력을 다 들인 학교를 남에게 내어맡기려 하건마는 어느 누가 ‘내가 맡으마’ 하고 나서는 이는 없고 도리어 ‘제가 먹을 것이 없어 저런다’ 하고 비웃었다. 육십이 다 못 된 박진사는 거의 백발이 되었다. 먹을 것이 없으매 사랑에 모여 있던 학생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제일 나 많은 홍모와 제일 나 어린 이형식만 남았다. 형식은 그때 열여섯 살이었다.

그해 가을에 거기서 십여 리 되는 어느 부잣집에 강도가 들어 주인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고 현금 오백여 원을 늑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강도는 박진사 집 사랑에 있는 홍모라, 자기의 은인인 박진사의 곤고함을 보다 못하여, 처음에는 좀 위협이나 하고 돈을 떼어 올 차로 갔더니 하도 주인이 무례하고 또 헌병대에 고소하겠노라 하기로 죽이고 왔노라 하고 돈 오백 원을 내어놓는다. 박진사는 깜짝 놀라며,

“이 사람아,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 하늘이 먹고 입을 것을 주나니…… 아아,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하고 돈을 도로 가지고 가서 즉시 사죄를 하고 오라 하였더니, 중도에서 포박을 당하고 강도, 살인, 교사 급 공범 혐의로 박진사의 삼부자는 그날 아침으로 포박을 당하였다. 박진사의 집에 남은 것은 두 며느리와 영채와 형식뿐, 영채의 모친은 영채를 낳고 두 달이 못 하여 별세하였었다.

그 후에 박진사의 사랑에 있던 학생도 몇 사람 붙들리고 형식도 증거인으로 불려 갔었으나 이틀 만에 놓였다.

두어 달 후에 홍모와 박진사는 징역 종신, 박진사의 아들 형제는 징역 십오 년, 기타는 혹 칠 년 혹 오 년의 징역의 선고를 받고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인해 하릴없이 두 며느리는 각각 친정으로 가고, 영채는 외가로 가고, 형식은 다시 의지를 잃고 적막한 천지에 부평같이 표류하였다. 그후 형식은 두어 번 평양 감옥으로 편지를 하였으나 편지도 아니 돌아오고 회답도 없었다. 작년 하기에 안주를 갔더니 박진사의 집에는 낯모를 사람들이 장기를 두며 웃더라. 이제 칠 년 만에 서로 만난 것이라.

6
형식은 번개같이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그 앞에 엎더져 우는 영채를 보았다. 그때―--- 십 년 전에 상긋상긋 웃으면서 어깨에도 매어달리고 손도 잡아 끌며 오빠 오빠 하던 계집아이가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 그 동안 칠팔 년에 어떠한 풍상을 겪었나.

형식은 남자로되 지난 칠팔 년을 고생과 눈물로 지냈거든 하물며 연약한 어린 여자로 오죽 아프고 쓰렸으랴. 형식은 그 동안 지낸 일을 알고 싶어, 우는 영채의 어깨를 흔들며,

“울지 말으시오. 자, 말씀이나 들읍시다. 녜, 일어앉으세요.”

울지 말라 하는 형식이도 아니 울 수가 없거든 영채의 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자, 일어나시오.”

“녜, 자연히 눈물이 납니다그려.”

“……”

“선생을 뵈오니 돌아가신 부친님과 오라버님들을 함께 뵈온 것 같습니다” 하고 또 울며 쓰러진다. ‘돌아가신!’ 박진사 삼부자는 마침내 죽었는가. 집을 없이하고, 재산을 없이하고, 마침내 몸을 없이하였는가. 불쌍한 나를 구원하여 주던 복 있는 집 딸이 복 있던 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또 불쌍한 사람이 되었는가. 세상일을 어찌 믿으랴. 젊은 사람의 생명도 믿을 수 없거든 하물며 물거품 같은 돈과 지위랴. 박진사가 죽었다 하면 옥중에서 죽었을지니, 같은 옥중에 있으면서 아들들이나 만나 보았는가. 누가 임종에 물 한 술을 떠넣었으며, 누가 눈이나 감겼으리요. 외롭게 죽은 몸이 섬거적에 묶이어 까마귀 밥이 되단 말가. 그가 죽으매 슬퍼할 이 뉘뇨. 막막하게 북망으로 돌아갈 때에 누가 눈물을 흘렸으리요. 그가 위하여 눈물 흘리던 세상은 다시 그를 생각함이 없고, 도리어 그의 혈육을 핍박하고 회롱하도다. 하늘이 뜻이 있다 하면 무정함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뜻이 없다 하면 인생을 못 믿으리로다.

“돌아가시다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녜, 옥에 가신 지 이태 만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버님 돌아가신 지 보름 만에 오라버니 두 분도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말은 알 수 없으나 옥에서는 병에 죽었다 하고 어떤 간수의 말에는, 첨에 아버님께서 굶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맏오라버니께서 또 굶어 돌아가시고, 맏오라버니 돌아가신 날 작은오라버니는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고 합데다” 하고 말끝에 울음이 복받쳐 나온다. 형식도 불식부지간에 소리를 내어 운다.

주인 노파는 처음에는 이형식을 후리려고 나오는 추한 계집으로만 여겼더니 차차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본래 양가 여자인 듯하고, 또 신세가 가이없은지라, 자기 방에 혼자 울다가 거리에 나아가 빙수와 배를 사가지고 들어와 영채를 흔든다.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하며 분주히 부엌에 가서 녹슨 식칼을 가져다가 배를 깎으면서,

“여봅시오, 선생께서 좀 위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더 울으시니…….”

“가슴이 터져 오는 것을 아니 울면 어찌하오. 이가 내 사오 년간 양육받은 은인의 따님이오그려. 그런데 그 은인은 애매한 죄로 옥에서 죽고, 그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좇아 죽고, 천지간에 은인의 혈육이라고는 이분네 하나뿐이오그려. 칠팔 년 동안이나 생사를 모르다가 이렇게 만나니 왜 슬프지를 아니하겠소.”

“슬프나 울면 어찌하나요” 하고 배를 깎아 들고 영채를 한 팔로 안아 일으키면서,

“초년 고락은 낙의 본입니다. 너무 설워 말으시고 이 배나 하나 자시오.”

영채도 친절한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씻고 배를 받는다. 형식은 다시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보니 과연 그때의 모양이 있다. 더욱 그 큼직한 눈이 박진사를 생각게 한다. 영채도 형식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이전보다 좀 길어진 듯하고 코 아래 수염도 났으나 전체 모양은 전과 같다 하였다. 마주보는 두 사람의 흉중에는 십여 년 전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휙휙 생각이 난다. 즐겁게 지내던 일, 박진사가 포박되어 갈 적에 온 집안이 통곡하던 일, 식구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흩어지고 수십 대 내려오던 박진사 집이 아주 망하게 되던 일, 떠나던 날 형식이가 영채를 보고, “이제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다. 네게 오빠란 말도 다시는 못 듣겠다” 할 적에 영채가, “가지 마오. 나와 같이 갑시다” 하고 가슴에 와 안기며 울던 생각이 어제런 듯 역력하게 얼른얼른 보인다. 형식은 영채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하여 묻기를 시작한다.

7
노파와 형식이 하도 간절히 권하므로 영채도 눈물을 거두고 일어 앉아 빙수를 마시고 배를 먹는다. 눈물에 붉게 된 눈과 두 뺨이 더 애처롭고 아리땁게 보인다. 형식은 얼른 선형을 생각하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그 부모의 귀여워함은 피차에 다름이 없건마는 현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고. 하나는 부모 갖고, 집 있고, 재산 있어 편안하게 학교에도 다니고, 명년에는 미국까지 간다 하는데, 하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집도 없고, 어디 의지할 곳이 없이 밤낮을 눈물로 보내는고. 만일 선형으로 하여금 이 영채의 신세를 보게 하면 단정코 자기와는 딴 나라 사람으로 알렷다. 즉, 자기는 결단코 영채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이요, 영채는 결단코 자기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으로 알렷다. 또는 자기는 특별히 하늘의 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이요, 영채는 특별히 하늘의 앙화와 형벌을 받는 사람으로 알렷다. 그러하므로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시하고 천대하여 가난한 자는 능히 자기네와 마주서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고, 길가에 굶었다는(굶어 떠는) 거지들을 볼 때에 소위 제 것으로 사는 자들이 개나 도야지와 같이 천대하고 기롱하여 침을 뱉고 발길로 차는 것이라. 그러나 부자 조상 아니 둔 거지가 어디 있으며, 거지 조상 아니 둔 부자가 어디 있으리요. 저 부귀한 자를 보매 자기네는 천지개벽 이래로 부귀하여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부귀할 듯하나, 그네의 조상이 일찍 거지로 다른 부자의 대문에서 그 집 개로 더불어 식은 밥을 다툰 적이 있었고, 또 얼마 못 하여 그네의 자손도 장차 그리 될 날이 있을 것이라. 칠팔 년 전 박진사를 보고야 뉘라서 그의 딸이 칠팔 년 후에 이러한 신세가 될 줄을 짐작하였으랴.

다 같은 사람으로 부하면 얼마나 더 부하며, 귀하다면 얼마나 더 귀하랴. 조고마한 돌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놈들, 나는 너희보다 높은 사람이로다’ 함과 같으니, 제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랴. 또 지금 제가 올라선 돌은 어제 다른 사람이 올라섰던 돌이요, 내일 또 다른 사람이 올라설 돌이다. 거지에게 식은밥 한술을 줌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는 뜻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지금 어떤 거지를 박대하고 기롱함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이렇게 하여 달라 함이 아닐까. 모르네라, 얼마 후에 영채가 어떻게 부귀한 몸이 되고, 선형이가 어떻게 빈천한 몸이 될는지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형식은 입을 열어,

“서로 떠난 후에 지내던 말을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선생께서 가신 뒤에 이삼 일이나 더 있다가 저는 외가로 갔습니다” 하고 말을 시작한다.

외가에는, 외조부모는 벌써 죽고 외숙은 그보다 먼저 죽고, 외숙모와 내종형 두 사람과 내종형 자녀들만 있었다. 이미 자기 모친이 없고, 또 가장 다정한 외조부모도 없으니, 외가에를 간들 누가 살뜰하게 하여 주리요. 더구나 내 집이 잘살고야 친척이 친척이라, 내 집에 재산이 있고 세력이 있을 때에는 멀디멀디한 친척까지도 다정한 듯이 찾아오고, 이편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가더라도 큰손님같이 대접하거니와, 내 집이 가난하고 세력이 없어지면 오던 친척도 차차 발이 멀어지고, 내가 저편에 찾아가더라도 ‘또 무엇을 달래러 왔나’ 하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라.

(중략)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도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弔喪)하는 '무정(無情)'을 마치자.'

《매일신보》, 1917.01.01~06.14

◆ 이광수(李光洙) 작가 (1892년~1950년)

대표작:《무정》, 《재생(再生)》,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이순신》

[해설]
1940년대 초엽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덕수궁에서 도쿄 유학생들의 미술 전람회가 열린다. 마침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에 있던 20대 초반의 문학 청년 김춘수(金春洙)는 그 전람회장에 갔다가 뜻밖에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를 만난다. 춘원은 여러 학생에게 둘러싸여 나직한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키가 큰 춘원에 대한 첫 인상은 까만 테 안경을 낀 점잖고 준수한 신사의 그것이었다. 얼굴 생김새는 동글납작하고, 폐를 앓고 있던 터라 안색이 파리한 편이었다.

그날 김춘수는 몇몇 학생과 함께 효자동에 있던 이광수의 집까지 따라간다. 아내 허영숙의 산부인과 병원에 붙어 있던 춘원의 집 거실에서 차까지 얻어마시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던 김춘수 일행은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서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 당시에 일제는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행인들에게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 황군(皇軍)의 무운 장구(武運長久)를 비는 묵도를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거실에 있던 춘원과 차를 내온 춘원의 딸이 정오 사이렌이 울리자 묵도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일제의 창씨 개명 정책에 따라 자진해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꾼, 식민지 조선의 조숙한 천재이자 걸출한 작가인 춘원 이광수는 한국 현대 문학의 선구자이자 원죄의 배태자인 것이다.

이광수는 1892년 2월 27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대소과(大小科)에 실패하고 술에 기대어 여생을 탕진하고 있던 이종원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아명은 보경(寶鏡)인데, 명치학원 중학부 졸업생 명부에는 이 이름으로 올라 있다. 다섯 살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여덟 살 때에는 『사략』『대학』『중용』『맹자』『논어』 『고문진보』 같은 동양 고전을 두루 섭렵할 만큼 신동이던 그는 생계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몸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궐련초를 팔아 학비를 보태며 서당에 다닌다.

열한 살 나던 해에 부모를 여의고 갑작스럽게 고아가 된 이광수는 절망감에 휩싸여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사당에 불을 질러 홍패(紅牌) · 문적(文籍) · 위패(位牌) 등을 태워버린다. 이윽고 외가와 재당숙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1903년 한 접주의 인도로 포덕 천하(布德天下), 광제 창생(廣濟蒼生), 보국 안민지 대도덕(保國安民之大道德)이라는 이념에 감명을 받아 동학에 입도한다. 교도가 된 그는 정주 지방 동학도 박찬명 대령의 집에서 기숙하며 도쿄와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 배포하는 서기 노릇을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한층 심해진 동학에 대한 압박을 피해 서울로 온 이 ‘조숙한 천재’는 일진회와 접하며 개화 사상에 눈을 뜬다. 그는 삭발을 하고 『일어 독학』 전책을 암송하는 식으로 혼자 일본어를 익혀 일진회가 설립한 광무학교의 전신인 소공동학교에서 잠시 일본어 교사로 일한다. 곧 광무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자 이번에는 학생 신분으로 일본어와 산술을 다시 배운다. 교사이자 학생 신분으로 지낸 광무학교 시절의 경험은 이광수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이듬해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는데, 이 시기에 최남선 · 홍명희 등과 교유하며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날 도쿄에 들른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깊이 감동한 이광수는 이 때부터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진다. 1907년 최남선이 서울로 돌아간 뒤, 그는 톨스토이 · 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서양의 문예 사조에 심취한다. 또 홍명희 · 문일평 등과 함께 ‘소년회’를 만들어 회람지 『소년』을 펴내고 여기에 시와 논설을 싣는다. 1909년에는 장편 「노예(奴隸)」를 쓰고, 몇 해 뒤에는 메이지학원의 동창회보 『백금학보』에 일어로 발표한 「사랑인가」가 일본 잡지에 실린다. 이로써 이광수는 재일 유학생 사이에 문사로 알려지게 된다.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다이이치고등 예과에 합격해 입학 준비를 하던 1910년 초, 그는 부모가 죽은 뒤 누이동생을 돌봐주고 어려운 살림에 학비까지 보태주던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조국에 돌아온 이광수는 곧 상경해 신문관의 최남선을 찾는데, 두 사람은 날 새는 줄 모르고 그 동안 쌓인 정치와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그러고서 곧 『소년』에 단편 「어린 희생」과 「헌신자」를, 『대한흥학보』에는 단편 「무정」과 평론 「문학의 가치」를 싣는다.

『소년』 2월호와 5월호에 발표된 「어린 희생」은 1773년에 벌어진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참전한 병사의 전사 통지를 받은 어느 노인 집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인 몰래 군대에 지원한 소년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노인 또한 집에 들른 적병을 독살해 제 나라의 전쟁 수행을 돕는다. 이 작품은 이광수의 창작이 아니라 일종의 번안 소설인데, 그는 이것을 매우 정확하고 짜임새 있는 문장으로 옮겨 타고난 문재를 선보인다. 또 그는 3월과 4월에 걸쳐 『대한흥학보』에 어린 몸으로 시집가서 남편과 시부모에게 구박을 받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살하고 마는, 조혼에 희생당한 구식 여성 문제를 다룬 단편 「무정」을 싣는다.

얼마 뒤 조부상을 치른 이광수는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8월 들어 그는 『소년』에 장사를 해 모은 돈으로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헌신자」를 발표한다. 그러고는 실제로 오산학교에서 야학을 열어 계몽 운동을 벌이던 중, 8월 29일 비운의 ‘한일합병’ 소식을 듣는다.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의 초청으로 교원이 된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 들른 신채호와 만나게 되고, 최남선과는 『조선 역사』 5부작을 계획한다. 1911년에는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계인 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톨스토이의 문학과 사상을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선교 교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4년 만에 교직에서 물러난다.

오산학교를 그만둔 이광수는 1913년에 만주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여행한다. 곧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주필 자리를 맡아달라는 전갈이 와서 미국행을 기다리던 동안, 시베리아 국민회의 기관지 『정교보(政敎報)』의 주필에 먼저 임명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리자 1914년 8월에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서 그는 최남선의 도움으로 잡지 『새별』을 창간하고, 최남선이 창간한 『청춘』에도 글을 싣는다.

1915년 그는 최남선과 인촌 김성수의 독려로 9월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2학기에 편입해 다음해 7월에 졸업한다. 이어서 1917년 3월에 같은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는데, 이광수 이후로 이 학교의 영어 강독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알려질 만큼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 그렇다고 학업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틈틈이 『대한매일신보』에 계몽적 소설이나 논문을 게재하는가 하면, 조선학회의 월례회에서 「우리 민족성 연구」 같은 학술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1916년 12월, 일본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 ‘대한매일신보사’로부터 전보 한 통이 날아든다. 신년 연재 소설을 청탁받은 것이다. 이광수는 이미 써둔 원고 「영채(英彩)」를 다듬어 새 제목을 달아 서울로 보내는데, 이것이 1917년 정월 초하룻날부터 『대한매일신보』를 화려하게 장식한 장편 연재 소설 「무정」이다.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무정」이 같은 해 6월 126회로 끝나자 그는 소설 집필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한다. 7월 『청춘』에 단편 「어린 벗에게」를, 『매일신보』에 장편 「개척자」를 이듬해 3월까지 연재하고, 단편 「윤광호」도 곁들여 발표한다. 1918년 7월 와세다대학 철학과 2학년 학기말 시험에서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진급한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것으로 학업을 접게 된다. 한 여자와 베이징으로 애정 행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미 그는 1910년 고향 정주에서 중매로 결혼을 한 몸이었다. 그러나 애정이 없어 겉돌던 차에 유학 생활로 더욱 아내와 멀어지고 결국 1918년 9월에 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그는 도쿄여의전을 졸업하고 귀국한 허영숙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함께 여행까지 다녀오게 된 것이다.

1919년 독립 선언서 작성에 가담한 그는 이를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에 간다. 중국 상하이에서 이광수는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 ‘3·1 독립 선언’을 『차이나프레스』와 『데일리뉴스』에 보내는 등 우리 나라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선다. 1920년에는 흥사단의 임시 반장이 되어 안창호 · 주요한 등과도 일하는데, 이 때 상하이까지 허영숙이 찾아와 잠시 임시 정부 내에 파문을 일으킨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21년 5월에 정식으로 결혼해 서울 당주동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결혼 뒤 허영숙이 다시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자 이광수는 제 소유의 땅과 저작권을 팔아 병원 공사를 계획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한때 애정이 두터워 2남 2녀의 자녀를 두지만, 해방 뒤인 1946년 5월에 이혼하게 된다.

임시 정부 시절 사료 편찬 위원들과 함께
종학원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경성학교와 경신학교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광수는 1922년 5월 느닷없이 『개벽』에 「민족 개조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우리 나라가 쇠퇴한 까닭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민족의 속성으로 허위와 비사회적 이기심, 무신(無信)과 겁나(怯懦)와 나타(懶惰), 사회성 결여 등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런 민족성을 개조해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론을 펼친다.

민족성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특히 19세기 들어 제국주의 열강이 저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해 약소 민족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침략 세력의 억지 논리와 강변에 맞장구를 친 셈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우리 민족의 바탕이 ‘선’하므로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우리도 우수한 민족의 대열에 낄 수 있다고 한 가닥 희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족성 개조의 방법론 면에서 설득력이 없고, 피침략자인 우리는 결국 열등한 민족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한 마디로 패배적 민족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가 1922년에 제창해 많은 비난을 받은 〈민족 개조론〉이 논문이 발표되자 문단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개벽사’는 호된 곤욕을 치르고, 이광수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울 지경이 된다. 1923년 김성수와 송진우의 도움으로 『동아일보』에 단편 「가실(嘉實)」을 ‘Y생(生)’이라는 필명으로 싣고, 뒤이어 동아일보사의 객원으로 논설을 쓰고 소설도 내지만, 문단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듬해 10월 이광수는 방인근이 만든 『조선문단』의 일을, 1926년에는 『동광』의 일을 돕는다.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34년 『조선일보』 부사장까지 지내는 동안에 그는 「재생」 · 「마의 태자」 · 「단종 애사」 · 「흙」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어느 정도 회복한다. 그러나 1934년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두 번째 아내 허영숙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몹시도 사랑하던 일곱 살배기 아들 봉근이 병으로 죽는 것이다. 게다가 수양동우회를 이끌던 도산 안창호의 장기 투옥은 그의 마음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 그는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금강산이나 자하문 밖 홍지동 산장에서 불교 서적을 읽으며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1935년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안재학 · 이상설 등과 함께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임명되어 「일사 일언(一事一言)」 등을 쓴다. 그러다가 잠시 일본에 가서 가족과 그 곳의 작가들을 만나고 돌아온 뒤 ‘홍지출판사’를 설립한다. 여기에서 『인생의 향기』 · 『문장 독본』 등을 출간하며 기운을 되찾는 듯하더니, 1937년에는 이광수 자신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5년의 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나 이듬해 병 보석으로 풀려난다.

1939년 5월 몸을 추슬러 『세종 대왕』의 집필에 들어갈 무렵, 그는 일제의 권유로 박영희 · 임학수 · 김동인과 함께 ‘북지 황군 위문’에 나섬으로써 친일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렇게 발을 들여놓은 뒤, 이광수는 차츰 적극적으로 친일 노선을 걷는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김용제 · 최재서 · 김기진 등과 문인보국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이성근 · 김연수 · 최남선 등과 함께 도쿄에 파견되어 학병 지원 권유 강연도 한다. 일찍이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 때 문안을 기초하고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주필까지 지낸 춘원 이광수의 변절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에게 실망과 함께 분노와 배신감을 안긴다.

1944년에 그는 건강을 돌보고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물러난다. 그러고서 경기도 양주의 사릉에서 농사를 짓던 중, 1945년 8·15 해방을 맞는다. 해방 직후 그는 일제 말기의 친일 행각으로 말미암아 격렬한 비난 속에서 적지 않은 고초를 겪는다. 이광수는 해방 뒤에도 사릉에 한동안 더 머물며 농사를 짓고,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수필집 『돌베개』를 쓰는 일로 소일한다. 그러다가 건강이 더 나빠지자 1948년 사릉에서 서울로 돌아온다. 어릴 적부터 워낙 몸이 약하던 그는 도쿄 유학 시절에 폐병을 심하게 앓은 바 있다. 그 뒤로도 집필 작업으로 인한 과로로 하루도 몸이 성할 사이가 없이 지낸 것이 이 무렵에 이르러 폐렴과 고혈압, 안면 신경 마비 등 합병 증세로 나타난 것이다.

1949년 1월, 이광수는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에 협력한 혐의로 반민특위에 걸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아들 영근과 사릉 주민들이 탄원을 해서 곧 병 보석으로 나온다. 1950년 『태양신문』에 장편 「서울」을 연재하던 도중 6·25를 맞는데,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는 7월 12일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다. 이 뒤로 오랫동안 행적이 밝혀지지 않아 남한에서는 그의 생사조차 모르게 된다. 이광수가 북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려진다. 강계에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산악 지대의 강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그는 병약한 몸에 심한 동상까지 걸린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나중에 북한 부수상까지 지내는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 25일 숨을 거둔다. 1970년대에 들어 북한 당국은 그의 무덤을 평양으로 옮기고 빗돌을 세워주는 것으로 조선 현대 문학의 개척자인 춘원을 예우한다.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서 이광수만큼 많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은 달리 찾기 어렵다. 한국 문학사는 춘원 이광수를 빼놓고는 기술할 수 없다. 그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하다. 최남선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데 반해, 이광수는 몰락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세파를 헤쳐나간다. 고아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취약하고 불우한 배경 속에서도 춘원은 명민한 머리와 피나는 노력으로 한국 문학의 선구자,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다.

그러나 우리 현대 문학사가 낳은 이 걸출한 인물은 동시에 변절자 또는 민족 반역자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비행기 격납고 속처럼 폐쇄적이던 왕조 시대의 막바지에 목숨을 받아, 개화파의 계몽주의와 척사파의 민족주의가 한꺼번에 분출되며 혼란의 극치를 이루던 시기에 개화 사상에 눈을 떠서 계몽주의적 문학가의 길을 따른 한 식민지 작가의 한계이고, 치명적인 실패의 불가피한 노정인 것이다. 한국 문학의 자랑이자 수치인 이광수...... 이광수라는 선각자를 낳게 된 것은 우리 현대 문학사에 내장된 매우 불행한 행복이다.

[출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1

/ 2021.02.04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