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신발의 이름」 이해인 (2021.01.17)

■ 신발의 이름 / 이해인 수녀 내가 신고 다니는 신발의 다른 이름은 그리움 1호다 나의 은밀한 슬픔과 기쁨과 부끄러움을 모두 알아버린 신발을 꿈속에서도 찾아 헤매다 보면 반가운 한숨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르는 기침소리가 들린다 신발을 신는 것은 삶을 신는 것이겠지 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건너간 내 친구는 얼마나 신발이 신고 싶을까 살아서 다시 신는 나의 신발은 오늘도 희망을 재촉한다 ㅡ 글 모음집 『기쁨이 열리는 창』에서 엊그제는 먼 곳에서 온 손님과 광안리 바닷가로 향하는데 길에서 어느 부부가 여러 종류의 신발을 팔고 있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습니다. 한 켤레는 3900원, 두 켤레는 6000원이라며 이것저것 골라보라고 했지요. 마침 실내화로 신으면 좋을 것 같은 신발이 있어 검은색, 회색 두..

[명시감상] '홍어' 손택수, '시래기를 위하여' 복효근, '어머니의 감성돔' 정일근 (2021.01.17)

■ 홍어 / 손택수 어느 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 점 먹고 싶고 김치 한 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 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

[명시감상] '깊은 맛' 김종제, '마늘촛불' 복효근, '슬픈 음식' 홍관희 (2021.01.17)

■ 깊은 맛 / 김종제 모름지기 배추는 다섯 번은 죽어야 깊은 맛을 얻을 수 있다는데 밭에서 잘 자란 놈을 모가지 잡아채서 쑤욱 뽑아내니 그 첫 번째요 도마 위에 올려놓고 번득이는 칼로 몸통을 동강내니 그 두 번째요 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물 뒤집어쓰고 누웠으니 그 세 번째요 고춧가루에 마늘에 생강에 온몸이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었으니 그 네 번째요 마지막으로 독이란 관에 묻혀 흙 속으로 다시 돌아가니 그 다섯 번째라 푸르뎅뎅한 겉절이 같은 것이 아니라 시큼털털한 묵은지 같은 것이 아니라 쓴맛에 매운 맛에 단맛까지 몇 번은 죽어 깊은 맛을 내는 김치처럼 우리네도 몇 번은 죽었다가 몇 번은 살았다가 곰삭은 인생이야말로 깊은 맛을 지니는 것 아닌가 잘 익은 저 주검을 손으로 집어 한 입 먹어주는 것도 生에 한..

[명시감상] '쓴맛에 대하여', '독서법', '늙마의 길' 홍해리 (2021.01.15)

■ 쓴맛에 대하여 / 홍해리(洪海里)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하지만 맛의 근본은 쓴맛일시 혀끝으로 촐랑대는 단맛에 빠진 요즘 세상일이 다 그렇다 혀끝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내면서 그곳에서 놀고 있다 단맛이란 맛있다는 말과 동의어지만 어찌 단맛이 맛의 전부일까 삶의 은근한 맛은, 아니 멋은, 느낄 때까지의 시간이 길고 또 오래 남아 없어지지 않는 쓴맛에 있음이 아니랴 단맛이 단맛을 내기 위해서는 쓴맛이 근저에 있어야 하는 것을 고진감래가 감진감래, 아니 감진고래로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고 속담으로나 남아 있는 표현이 되었지만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싫어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지 어찌 젊은이들만의 일일까만 더위 먹어 헛헛하고 헛배 부를 때 밥맛을 일깨우고 기운 차리게 하는 한 대접의 익모초, 그 초록빛..

[명시감상]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2021.01.14)

■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 2021.01.14 편집 택.. youtu.be/t0sN4-Wc-_s

[명시감상] '무소의 뿔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우리는 하나', '나는 강이 되리니' 고규태 (2021.01.10)

■ 무소의 뿔처럼 / 고규태 가라 좋은 벗 있으면 둘이서 함께 가라 가라 좋은 벗 없으면 버리고 홀로 가라 달빛엔 달처럼 별빛엔 별처럼 바람 불면 바람처럼 가라 내가 나에게 등불이 되어 그대 홀로 등불이 되어 함께 못 가도 같이 못 가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가라 나의 맘 고우면 나누며 함께 가라 가라 나의 맘 탁하면 버리고 홀로 가라 꽃길엔 꽃처럼 물길엔 물처럼 천둥치면 천둥처럼 가라 내가 나에게 등불이 되어 그대 홀로 등불이 되어 함께 못 가도 같이 못 가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아이를 등에 업고 / 고규태 누굴 기다리나 그대 아이를 등에 업고 겨울 찬 바람 이는 변두리 두암동 푸른 수건으로 머리칼 감싸고 누굴 기다리나 그대 이 늦은 시각 금이 간 긴 담벼락 아래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명시감상] '마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마리 로랑생 (2021.01.07)

■ 마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사랑은 지나가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가버리네 이처럼 인생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흘러간 시간도 옛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 기욤 ..

[명시감상] '카르페 디엠' 호라티우스의 송가 (2021.01.07)

☆ 카르페 디엠(Carpe diem)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이 명언은 번역된 구절인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로도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호라티우스의 송가(..

[명시감상]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 만남, 닭의 착각, 두꺼비와 개구리.. 정채봉 시모음(2021.01.07)

☆ 정채봉 시 모음 ■ 풍선 / 정채봉 불어야 커진다 그러나 그만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옆 사람보다 조금 더 키우려다가 아예 터져서 아무것도 없이 된 신세들을 보라 ■ 오늘 내가 나를 슬프게 한 일 / 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못했네 목욕하면서 노래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운 사람을 생각했었네 좋아죽겠는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았네 나오면서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 / 정채봉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

[명시감상] '축혼가' 김효근, '결혼의 노래' 조운파, '축혼가' 요시노 히로시,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2021.01.06)

■ 축혼가 / 김효근 온 하늘 지저귀는 새들 이 기쁨 노래하여라 마주잡은 두 손에 사랑 무지개 온 땅에 웃음짓는 꽃들 이 기쁨 노래하여라 마주보는 두 눈에 행복의 미소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절망에 빠질 때에도 두 마음 힘 모아 헤쳐나가고 믿음으로 굳건히 지켜나가면 끝없는 즐거움이 언제나 넘쳐나리라 아름다운 한 쌍의 원앙 한마음 되는 날이니 모두 이 둘을 축복하소서 축복하소서 영원하라 하나 되어라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날 축하합니다 ■ 결혼의 노래 / 조운파 그대 인생 나의 것이니 내 인생도 그대 것이네 기쁠 때나 괴로울 때에도 우린 항상 함께 있으리 비바람 거친 파도 작은 배로 떠나지만 믿음과 사랑의 등대로 행복을 지키리라 우린 서로 거울이 되고 우린 서로 그림자 되어 슬플 때나 두려울 때에도 우린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