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작수필] '내 소년 시절과 소', '적성산의 한여름 밤' 김환태.. '무주, 그리고 최북과 김환태' 방민호 (2020.12.26)

■ 내 소년 시절과 소 / 김환태(金煥泰) 내 마음의 이니스프리에는 소가 산다. 이리하여 네거리 아스팔트 위에서나 철근 빌딩 밑에서 바위 그림자와 같은 이니스프리의 향수에 엄습할 때면 나는 내 마음 심지에 '못 가장자리를 핥는 잔물결 소리' 외에, 또 골짝을 울리는 해설픈 소울음을 듣는다. 소가 사는 내 이니스프리의 경개(景槪) 는 이렇다. 사방을 산이 빽 둘러쌌다. 시내가 아침에 해도 겨우 기어오르는 병풍 같은 덕유산 준령에서 흘러나와 동리 앞 남산 기슭을 씻고, 새벽달이 쉬어넘는 강선대 밑에 휘돌아 나간다. 봄에는 남산에 진달래가 곱고, 여름에는 시냇가 버드나무숲이 깊고, 가을이면 멀리 적상산에 새빨간 불꽃이 일고, 겨울이면 먼 산새가 동리로 눈보라를 피해 찾아온다. 나는 그 속에 한 소년이었다. 사..

[명시감상]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2020.12.26)

■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金尙鏞)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감상과 해설] 1 창을 남쪽으로 내겠다는 제목부터가 생활의 건강하고 낙천적인 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에 대한 굳은 신념을 나타내면서도, 역설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제2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해학과 더불어 매우 시다운 표현을 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시의 특별한 매력이다. 마지막 연은 의미의 함축성과 표현의 간결성 및 탄력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도회 생활의 공허한 삶은 생각지도 않고 무슨 재미로 전원에 파묻혀 사느냐고 질문하는 친구에게 만족한 대답을 주려면..

[명시감상] '광고의 나라' 함민복 (2020.12.26)

■ 광고의 나라 / 함민복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가득 찬 저기, 자본의 에덴동산, 자본의 무릉도원, 자본의 서방정토, 자본의 개벽세상-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휴먼테크의 아침 역사를 듣는다 르네상스 리모컨을 누르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휴먼퍼니처 라자 침대에서 일어나 우라늄으로 안전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토피아의 전등을 켜고 21세기 인간과 기술의 만남 테크노피아의 냉장고를 열어 장수의 나라 유산균 불가리~스를 마신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누군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는, 드봉 아르드포 메이컵을 하고 함께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꼼빠니아 패션을 입는다 간단한 식사 우유에 켈로크 콘프레이크를 먹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명시감상]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2020.12.26)

■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

[명시감상] '옛날 국수 가게' 정진규 (2020.12.25)

■ 옛날 국수 가게 / 정진규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 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감상과 해설] 이버지는 잔치국수를 참 즐기셨다. 그런 만큼 어머니는 잔치국수를 맛깔나게 만드셨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면 아들딸은 유부우동을 주문하는데 아버지는 언제나 잔치국수를 드셨다. 어쩌면 아버지의 입맛을 닮아 나도 면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큰 멸치를 우린 국물, 적당히 삶아 찬물에 박박 씻은 국수, 따로 부쳐 잘게 썬 흰자와 노른자 그리고 김 가루를 얹은 고명, 쪽파와 고춧가루, 간장으로 만든 ..

[명시감상] 추억-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정진규

■ 추억-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 정진규 식구들은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말없이 먹었다 신발의 진흙도 털지 않은 채 흐린 불빛 속에서 늘 저녁을 그렇게 때웠다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다만 세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된 나날이었다 잠만은 편하게 잤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맛있는 잠! 잠에는 막힘이 없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 ㅡ《시집 반..

[명시감상] 걱정을 쌓아 놓지 않게 하소서, 걱정을 내려놓는 연습 (2020.12.25)

♤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ㅡ 티벳 속담 ■ 걱정을 쌓아 놓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오니 힘든 일에 부딪칠 때마다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찢어진 상처마다 피고름이 흘러 내려도 그 아픔에 원망과 비난하지 않게 하소서 어떤 순간에도 잘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헛된 욕망과 욕심에 빠져 쓸데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게 하소서 고통 당할 때 도리어 믿음이 성숙하는 계기가 되도록 강하고 담대함을 주소서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무런 가치 없는 일로 인해 걱정을 쌓아 놓지 않게 하소서 걱정을 구실 삼아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소서 있지도 않은 일로 인해 근심을 쌓아 놓지 않게 하소서 내 마음에 걱정이 파고 들어와 스스로를 괴롭히지..

[명시감상] 탑, 마루나무, 저수지에 빠진 의자 유종인 (2020.12.23)

■ 탑 / 유종인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 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 저수지에 빠진 의자..

[명시감상] 개여울, 못 잊어, 먼 훗날 김소월.. 시와 노래 (2020.12.21)

■ 개여울 /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 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못 잊어 / 김소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 먼 훗날 /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

[명시감상]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임진강에서' 정호승,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2020.12.19)

■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임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