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소설읽기] '들꽃 향기' 임철우, '들쑥에게' 곽재구 (2020.12.15)

● 들쑥에게 2 / 곽재구 아이들아 겨우내 잃은 빛 되찾고 겨우내 움츠려 접은 날개 펼치고 바람 위에 파랗게 뜨는 저 들꽃 보아라 이슬 적신 얼굴 흙냄새로 일어서는 오천년 찬란한 아침 풀밭 보아라 보아라, 보아라 큰 칼 작은 칼 쟁강쟁강 부딪치며 이슬 속을 걸어오는 대장장이 네 할배 이마 위 기쁜 햇살 보아라 그러나 아이들아 지금 너희들이 꿈을 꾸는 교실 너희들의 시 너희들의 사랑 너희들의 어떠한 그리움 속에서도 내 어릴 적 들쑥 맛은 없구나 두려움도 쓰라림도 없구나 ● 들쑥에게 3 / 곽재구 아이들아 햇볕 아래 서면 대궁 꺾인 풀꽃처럼 툭툭 쓰러지고 꼭꼭 숨은 너희들의 근시로 이 들판 그리움의 풀꽃 한 잎 헤아릴 수 없구나 아이들아 지금 너희들이 꾸는 꿈들은 경쾌하고 날렵한 지름길을 지녔지만 아이들아 ..

[소설읽기] '사평역' 임철우 (2020.12.15)

오늘은 1995년에 출간된 한국소설문학대계(83) 임철우의 『곡두운동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사평역'를 읽었다. 임철우 작가는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탁월한 시선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눈 내리는 겨울밤 시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그들 각자의 삶에 대한 상념을 그리고 있다. 막차를 기다리는 소설 속 서민들의 애환이 나와 내 이웃의 이야기로 느껴져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난로의 톱밥과 눈 내리는 대합실 밖의 풍경, 제각기 사연을 지닌 사람들..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소설읽기] '곡두운동회' 임철우 (2020.12.15)

오늘은 1995년에 출간된 《한국소설문학대계(83)》 임철우의 『곡두운동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곡두운동회'를 읽었다. 임철우 작가는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탁월한 시선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곡두운동회'로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곡두 운동회'를 읽으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없기를, 우리의 아이들이 평화로운 땅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 곡두운동회 / 임철우 ― 그해 8월 ○일 금요일 새벽 4시 바닷가 그 작은 마을을 난데없이 찌렁찌렁 울려 대기 시작한 그 요란한 노랫소리에 놀란 주민들 팔백여명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아침잠을 모르고 일찍 일어나는 시골 사람들이..

[사색의향기] '단풍본색(丹楓本色)' 백승훈 (2020.12.15)

♤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상처가 보이고 너무 멀면 그 고운 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가 나면 상처가 난 대로, 벌레 먹은 잎은 벌레 먹은 대로 아름답다. 산에 올라 때맞춰 본색을 드러내는 나무들의 화려한 축제를 보며 늘 때를 놓치며 살았던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도 한 번 쯤은 저 나무들처럼 화려하게 타오를 수 있을까 생각한다." ■  단풍본색(丹楓本色) / 백승훈 시인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다. 설악에서 처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하루에 200m씩 고도를 낮추며 산에서 내려온다는데 순식간에 천지간이 단풍 물결을 이룬 것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느티나무는 물든 이파리들을 색종이처..

[사색의향기] '은행나무에 대한 단상' 백승훈 (2020.12.15)

♤ 은행나무 주위를 둘러친 철제 울타리엔 시인들의 시화가 빼곡히 걸려 있어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걸린 시화 중엔 몇몇 반가운 이름도 눈에 띈다. 걸린 시화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은행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마치 시집이라도 한 권 읽고 난 것처럼 마음 가득 시심이 출렁거린다. 그 중에도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이란 시가 소름 돋듯 마음 안섶에 돋을새김 되어 되살아난다. 나뭇잎이/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어 매끈한 것은/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별처럼 아름답다. ■ 은행..

[사색의향기] '열매는 꽃의 미래다' 백승훈 (2020.12.15)

♤ "왕가위 감독의 홍콩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꽃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꽃의 시간이란 열매를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苗而不秀者 有矣夫(묘이불수자 유의부) 秀而不實者 有矣夫(수이부실자 유의부)’라 했다. ‘싹은 틔워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꽃은 피우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놈도 있다’는 말이다." ■ 열매는 꽃의 미래다 / 백승훈 시인 “우리가/너를 잊었는가 싶을 때/들판은 휘영청, 초록 연두 노랑 갈색으로 흔들린다/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흔들린다/철길너머 낮은 언덕/그 너머 낮은 山 위의 무덤들이 덩달아/제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온 것들을/예쁘게 예쁘게 익혀가고 있는 계절…(박라연의 ..

[사색의향기] '집안에 가을을 들이다' 백승훈 (2020.12.13)

♤ "우울감을 떨쳐버리는 데엔 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집 가까이에 있는 화원엘 갔더니 국화가 한창이다. 작은 국화 화분을 구입해 도봉산이 바라다보이는 창가에 놓았더니 온 집안에 가을향기가 가득해진 느낌이다." ■ 집안에 가을을 들이다 / 백승훈 시인 쨍한 하늘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에 눈이 시리다. 투명한 은빛 햇살은 눈이 부시고 나뭇잎에 살랑거리는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쎄시봉 가수 송창식이 곡을 붙여 부른 미당의 시 ‘푸르른 날’이란 시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불한불서(不寒不暑). 춥지도 덥지도 않은 요즘이야말로 일 년 중 가장 좋은 시절이다. 그런데도 집 밖을 나설 때면 마스크부터 챙겨야 하는 요즘이다 보니 계절을 즐기기는커녕 외..

[명시감상] 아버지는 누구인가?, 임진강에서,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의 마음, 남자의 인생 (2020.12.13)

♤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 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 아버지는 누구인가? / 작자 미상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 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禍)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사색의향기] '나무에게 위로 받다' 백승훈 (2020.12.13)

♤ "진화 기간에 99.5%를 자연환경에서 보낸 우리 인간에겐 바이오필리아(bio philia)가 있다고 한다. 바이오필리아란 ‘인간의 마음과 유전자에 자연에 대한 애착과 회귀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학설로 '자연의 장소와 소리를 선호하고 다른 생물에게 호기심을 갖거나 끌리거나 최소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선천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몸이 아프면 엄마의 품속이 그리워지듯 마음이 지칠 때 내 발걸음이 숲으로 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나무에게 위로 받다 / 백승훈 시인 유난히 길었던 장마철 비구름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우울감이 좀처럼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생이란 게 원래 조금은 우울한 것이라 해도 우울모드가 이처럼 오래 지속하기는 처음인 듯싶다.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

[사색의향기] '처서 무렵' 백승훈 (2020.12.13)

♤ "대숲이 빽빽해도 흐르는 물은 방해받지 않고, 산이 높아도 나는 구름은 거리끼지 않는다(竹密不妨流水過(죽밀부방유수과) 山高豈碍白雲飛(산고개애백운비)는 경봉스님의 선시처럼 제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시절의 오고 감을 막지는 못한다." ■ 처서 무렵 / 백승훈 시인 모기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났다. 모처럼 맑은 하늘을 보니 따가운 햇살마저도 정겹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너머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흰 뭉게구름을 보면 비에 젖어 살았던 지난 여름의 일들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처서가 지나면 햇빛도 햇빛이지만 물빛도 달라지고 다가서는 산 빛도 달라진다. 대숲이 빽빽해도 흐르는 물은 방해받지 않고, 산이 높아도 나는 구름은 거리끼지 않는다(竹密不妨流水過(죽밀부방유수과) 山高豈碍白雲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