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꽃',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2020.12.07)

■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해와 감상] 1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읽을 때마다 참 멋진 시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존재의 의미성의 '꽃'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 시는 인간관계에 있어 내 존재를 알리고,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잘 알게 합니다. 이를 잘 알게 하는 것이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기..

[명시감상] '삶의 나이' 박노해, '내 삶이 잔잔했으면 좋겠습니다' 해밀 조미하 (2020.11.29)

■ 삶의 나이 / 박노해 어느 가을 아침 아잔 소리 울릴 때 악세히르 마을로 들어가는 묘지 앞에 한 나그네가 서 있었다 묘비에는 3·5·8…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 돌림병이나 큰 재난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나그네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마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여기 묘비명의 숫자가 참삶의 나이라오 ㅡ ..

[명시감상] '엄마 걱정' 기형도, '아이를 키우며' 렴형미 (2020.11.29)

■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해와 감상] 1 [감상과 해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이 비싼 음식이나 장난감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모도 결핍되어 있다. 부모가 생계로 바쁘거나, 혹은 생계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아이들을 버려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다. 특히 어머니는 더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

[감동의글] '축의금 만 삼천원' 이철환 (2020.11.21)

■ 축의금 만 삼천원 / 이철환 친구가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를 등에 업은 친구의 아내가 대신 참석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축의금 '만 삼천원'과 '편지 1통'을 건네 주었다. 친구가 보낸 편지에는... 친구야! 나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지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장사가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기가 오늘밤 분유를 굶어야 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 삼천원'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너무 기쁘다. 개 밥그릇에 떠있는 별이 돈보다 더 아름다운 거라고 울먹이던 네 얼굴이 ..

[명시감상] '시골 창녀' 김이듬 (2020.11.21)

♤ 2014년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賞(『Poets Plaza』2014 'Poem of the year' award)'에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 수상 ​■ 시골 창녀 /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명시감상] '행복', '행복해진다는 것' 헤르만 헤세 (2020.11.21)

■ 행복 / 헤르만 헤세 행복을 추구하는 한 너는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들이 모두 너의 것일지라도 잃어 버린 것을 애석해 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 하는 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표와 욕망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세상 일의 물결이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네 영혼은 마침내 평화를 찾는다 ■ 행복해진다는 것 / 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명시감상] 소소한 행복 남정림, 행복한 결핍 홍수희, 행복 헤르만 헤세.. 늘 내 곁에 있었지만 내가 몰랐던 행복 (2020.11.19)

■ 소소한 행복 / 남정림 뒤돌아보니 행복은 내 편이었더라 내가 행복의 편이 아니었지 벽돌 담장의 발등에 핀 들꽃의 미소도 푸른 하늘의 구름이 그린 응원의 글귀도 누리지 못하고 멀고 휘황찬란한 것만 쫓아다녔지 뒤돌아보니 행복은 내 편이었더라 일상의 그늘 속에 숨어 있었고 내 발 밑에서 숨을 쉬고 있었지 오늘은 눈 뜬 소소한 행복부터 지갑 속에 빼곡히 넣어두리라 내가 행복의 편에 서 보리라 ■ 행복한 결핍 / 홍수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나 내게 있으니 때로는 가슴 아린 그리움이 따습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주고 싶은 마음 다 못 주었으니 아직도 내게는 촛불 켜는 밤들이 남아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올해도 꽃을 피우지 못한 난초가 곁에 있으니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

[명시감상] 쑥부쟁이 사랑 정일근, 애기똥풀, 무식한 놈 안도현 (2020.11.18)

■ 쑥부쟁이 사랑 / 정일근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 '애기똥풀'과 '무식한 놈' / 안도현 안도현은 한국 서정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안도현의 '애기똥풀'과 '무식한 놈'은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사랑을 많이 ..

[명시감상] '어부', '5학년 1반' 김종삼 (2020.11.18)

■ 어부(漁夫) / 김종삼(1921~1984)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ㅡ 시선집 '북치는 소년'(민음사) 중에서 1 그 흔한 문학상도 별로 받지 못했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김종삼은 수많은 시인들로부터 오래도록 '내밀한'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순수하고 소박하고 맑고 따뜻하다. 바닷가에 매어진 채 외로이 출렁이는 작은 배 한 척의 풍경이 그대로 김종삼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풍경에는 삶의 난제(難題)와 희망이 고즈넉하게 들어가 있다. 존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풍랑"도 날을 세우지 않고..

[좋은생각] 살아보니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2020.11.17)

■ 살아보니까 / 장영희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란 것이다. 우리 마음은 한시도 고요하고 잔잔하지 못하고, 번뇌 망상으로 물들어 있다. 늘 파도치는 물결처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 물결이 출렁일 때는 모든 것이 일렁이고 왜곡되어 보이듯이, 마음이 고요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을 왜곡하여 보게 된다. 고요히 맑고도 텅빈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