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채봉 시 모음
■ 풍선 / 정채봉
불어야 커진다
그러나 그만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옆 사람보다 조금 더 키우려다가
아예 터져서
아무것도 없이 된 신세들을 보라
■ 오늘 내가 나를 슬프게 한 일 / 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못했네
목욕하면서 노래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운 사람을 생각했었네
좋아죽겠는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았네
나오면서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 / 정채봉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 몰랐네 / 정채봉
시원한 냉수 한잔 주욱 마셔보는 청량함
오줌발 한번 좔좔 쏟아보는 상쾌함
반듯이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보는 아늑함
딸아이의 겨드랑을 간지럽혀 웃겨보는
아들아이와 이불속에서 발싸움 걸어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클어져서 달려보는
아, 그것이 행복인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네
이 하잘 것 없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깊고도 깊은 말씀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네
■ 두꺼비와 개구리 / 정채봉
두꺼비와 개구리가 논두렁을 가고 있었다
개구리는 엉금엉금 가는 두꺼비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느리게 기어서 언제 양지바른 언덕에 도착하니?"
두꺼비가 숨을 가쁘게 쉬는 개구리를 향해 대꾸했다
"그렇게 빨리 가서 뭐할 거지?"
"그냥 빨리빨리 가는 거야
가서 시간이 남아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아"
두꺼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천천히 가는 것도 좋아
이슬방울도 들여다보고 풀꽃하고도 대화하며..."
개구리는 답답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펄적펄쩍 뛰어가며 말했다
"내 같은 빠름은 네 같은 느림과 동행이 될 수 없어 먼저 간다"
개구리는 펄쩍펄쩍 뛰어서 금새 사라졌다
두꺼비는 천천히 천. 천. 히
하늘도 천천히 보고 파리도 천천히 잡아먹으며
돌틈에 기대어 졸기도 하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두꺼비는 도랑을 건너다 말고 시체를 보았다
그것은 경운기에 치여 죽은 먼저 간 개구리였다
■ 닭의 착각 / 정채봉
암탉이 있었다
평범하게 모이를 찾아 먹으며 때가 되면 알을 낳는 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암탉은 건너편 오동나무에 척 내려와 앉는 너무도 멋진 황새를 보았다
암탉은 황새가 너무도 부러웠다
“어떻게 그리 아름다룰 수가 있지”
“아름답다니, 별말씀. 나는 그냥 나다울 뿐이야.”
암탉은 끈질기게 물었다
“모이는 무얼 먹지, 그리고 운동은?”
“모이는 그냥 물고기나 우렁을 잡아 먹고 운동이라야 날기밖에 안하는데 뭘”
암탉은 그날부터 황새처럼 되기 위해 물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그리고 날기 운동에 모든 시간을 다 썼다
그러나 마르기만 하고 알도 낳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어느 날 주인은 암탉을 붙들어 목을 비틀면서 말했다
“빌어먹을 것, 계란은 낳지 않고 주제에 날려고나 하는 널 튀김이나 해 먹어야지”
■ 한몸 뿐인 조상 / 정채봉
이집트에서
한 피라미드 발굴 때
몇 천 년 썩기를거부한 밀알도
다른 주장품가 함께 몸을 드러냈다
이때
하늘을 날고 있던 참새가 보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
“저만 아는 못된 인간 같은 밀알도 있구나 밭에 묻혀 썩었더라면 그동안에 몇 천 가마 밀알의 조상이 되었을 터인데 이제 제 한몸으로 저렇게 달랑 나타나다니...”
■ 만남 / 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 첫 길들이기 / 정채봉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창을 열고 푸른 하늘빛으로
눈을 씻습니다
새 신발을 사면
교회나 사찰에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습니다
새 전화기의 녹음은
웃음소리로 시작합니다
새 볼펜의 첫 낙서는
'사랑하는' 이라는 글 다음에
자신의 이름 써 봅니다
새 안경을 처음 쓰고는
꽃과 오래 눈맞춤을 합니다
■ 희망에 곰팡이 슬 때 / 정채봉
풀섶 위에 하루살이 형제가 날고 있었다
풀섶 속에는 개구리 형제가 졸고 있었다
한 낮에 졸고 있는 개구리 형제를 내려다보며 아우 하루살이가 말했다
"형, 우리도 조금만 쉬었다 날아요"
그러나 형 하루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우리는 쉬고 있을 틈이 없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곧 희망의 그 순간이다"
아우 하루살이가 물었다
"지금이 희망의 그 순간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어요?"
형 하루살이가 대답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금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명이 짧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아니다. 삶은 짧거나 긴 기간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생에 얼마나 열심이었느냐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저기 저 개구리들은 그러한 것을 모르고 있는가요?"
"알고 있겠지... 그런데 저 개구리들은 약도 없는 죽을 병에 걸린 것 같다"
"그 병이 무엇인데요?"
"알고 있으나 움직이지 않는 것 바로 그 병이다"
형 하루살이가 아우와 어깨동무를 하고서 날며 말했다
"아우야, 희망은 움직이지 않으면 곰팡이 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이 말을 명심하거라"
풀섶 속에 잠들어 있는 개구리 형제를 향해
뱀이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 정채봉 작가(1946~2001)
1946년 11월 3일,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서 아버지 정용석과 어머니 허정순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48년 1월에 일가족과 함께 옆동네인 전라남도 광양시로 이주하였고, 이후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3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5살 때는 아버지도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75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학사 학위했으며, 1978년부터 2001년까지 월간 《샘터》를 발행하는 샘터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물에서 나온 새》, 《오세암》, 《스무살 어머니》, 《생각하는 동화》(전 7권) 등이 있다. 불교 환경에서 자랐지만,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전도환 독재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된 이후, 정신적인 방황에 시달리면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다양한 종교 체험은 그의 작품이 불교와 가톨릭의 영향을 동시에 받게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성인동화 장르를 크게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2001년 1월 9일에 간암으로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10년째인 2011년에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정채봉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2021.01.07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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