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구들목' 박남규 (2021.01.31)

■ 구들목 / 박남규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 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 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 방바닥만큼 넓었다 차가워지는 겨울이면 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 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 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 온기를 안고 숨어있었다 오포 소리가 날 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 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 주루르 눈물을 흘렸다 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 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 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 사랑을 키웠다 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 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 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 콩나물은 자랐고, 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 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 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였다. 구들목 중심에는..

[명시감상] '겨울 사랑' 문정희, '뇌성벽력 사납던 날' 고경숙, '우리의 기원' 종근당 (2021.01.29)

■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 년 백설이 되고 싶다 ■ 뇌성벽력 사납던 날 / 고경숙 뇌성벽력은 귀앓이 한 사람에게도 들린다지 아직은 살아갈 날 아득한데 세찬 비바람 속 뇌성벽력까지 날이 선 하루다 거울 속 나를 보는 것처럼 왜 이렇게 아프고 먹먹한가 그랬다, 잘한 것이 없다 내가 다 잘못했다 때로는 사람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하고 들이받고 상처를 주었다 심장을 깨부수는 뇌성벽력에 흙빛으로 변한 가슴을 쓸어내리자 상처를 기억하는 말들이 벌벌 떤다 이제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무릎을 꿇어야 할 나이 장대비 속으로 나서야겠다 먼지에 덮인 날을 뒤집어보고 살아온 날들로 돌아가도 보고 ■..

[초대수필] '겨울 단상' 허재환 (2021.01.29)

■ 겨울 단상 / 허재환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가끔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재주가 놀랍다. 거실에서 매일 아침 차 한 잔하면서 거실창 건너편으로 들어오는 산들과 풀냄새 거기에 새소리까지 더해 널다란 유리들판 그림을 그려본다. 계절마다 소재도 냄새도 소리도 다르다. 하루하루 그려지는 특색 있는 시골의 그림이 편안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겨울은 유리 화폭에 옮기기가 참 어렵다. 을씨년스럽고 삭막하기도 하니... 그런데 엊저녁 기온이 내려가더니 눈발이 조금 흩날렸을 뿐인데 삭막한 세상이 사라지며 하얀 화폭만 남겨놓았다. 백색의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처럼. 겨울은 소재도 다양하지도 않아 화폭에 옮기기 어렵다고 한 소리를 신께서 들으셨나보다. 함박눈을 내려주시면 내가 그림을 그릴 필요..

[생각의숲] '우리의 마지막 풍경' 유인경 (2021.01.27)

■ 우리의 마지막 풍경 / 유인경(방송인) 70대 후반의 지인이 지난해 늦여름 넘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다.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그곳에선 장기간 입원을 할 수 없어 서울 강남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다 두 계절을 보내고 며칠 전 퇴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입원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병문안도 제한돼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거나 가끔 먹거리를 보내드릴 뿐이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지인은 병상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인에 따르면 70~90대의 노인들이 모인 요양병원에서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박사건 무학이건, 전문직이건 무직이건, 재산이 많건 적건 상관이 없단다. 누구나 똑같이 환자복을 입고 병상..

[명시감상] '이사' 박찬중,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노후에 돈 버는 일' 김내식 (2021.01.27)

■ 노후에 돈 버는 일 / 김내식 늙어서도 돈 버는 일이 없을까 나대로 곰곰이 생각한다 드디어 발견했다 방법은 내가 안 아픈 게 돈 버는 일이다 방법은 쉽다 대지에 한 발 두 발 입맞춤하여 걷는 일이다 가난한 자에게도 복이 있나니 ■ 이름을 지운다 /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뵈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 이사 / 박찬중 이사를 해 보면 알지 오랜 세월, 참 많은 필요치 않은 것들을 ..

[소설읽기] '흰 종이 수염' 하근찬 (2021.01.24)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7) 하근찬의 『수난 이대』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흰 종이 수염'을 읽었다. 하근찬의 '흰 종이 수염' 은 어린 주인공 소년을 통해 역사적 수난이 어떻게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조명하며, 어린 아이의 아픈 삶은 결국 시대가 만든 비극임을 보여준다. ◆ 전체 줄거리 사친회비가 밀렸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동길’은 냇가에서 ‘용돌’과 멱을 감으며 놀다가 철교 위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징용 나간 아버지 생각을 한다.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온 ‘동길’은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지만 한쪽 팔이 없는 아버지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음 날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동길’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야단치는 아버지 사이에 갈등..

[소설읽기] '너와 나만의 시간' 황순원 (2021.01.24)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7)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너와 나만의 시간'을 읽었다. '너와 나만의 시간'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안에서 목숨을 건 세 사람의 심리와 삶의 방식을 통해 전쟁과 인간성이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단편 소설이다. ◆ 전체 줄거리 주대위, 김일등병, 현중위 이 세 사람은 전쟁 중에 산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낙오병들이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며칠째 헤매고 있다. 주대위는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어지만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다른 두 사람이 교대로 업고 무작정 남으로 향하고 있다. 현중위는 무언 중에 주대위에게 스스로 알아서 자살하여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달라고 압박하지만 주대위는 이를 모른 체한다. 저녁 때, 현중위는 혼자 떠나고 ..

[명시감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2021.01.24)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을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

[명시감상] '길', '기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2021.01.23)

■ 기회(機會) / 김소월 강 위에 다리는 놓였던 것을! 나는 왜 건너가지 못했던가요 '때'의 거친 물결은 볼 새도 없이 다리를 무너치고 흐릅니다려 먼저 건넌 당신이 어서 오라고 그만큼 부르실 때 왜 못 갔던가! 당신과 나는 그만 이편 저편서 때때로 울며 바랄 뿐입니다려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길 / 김소월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길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

[명사수필] '어디로 갈 것인가?' 윤세영 (2021.01.19)

■ 어디로 갈 것인가? / 윤세영 1. 정년 퇴임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한 교수가 방송에 출연할 일이 생겨서 방송국에 갔다. 낯선 분위기에 눌려 두리번거리며 수위 아저씨에게 다가 갔더니, 말도 꺼내기 전에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퇴직해서 소속이 없어진 그분은 당황한 나머지 “집에서 왔지요.”라고 대답했다 하여 한바탕 웃은 적이 있는데, 다른 한 교수도 방송국에서 똑같은 경우를 당한 모양이다. 그러나 성격이 대찬 그분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여보시오. 어디서 왔냐고 묻지 말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시오. 나 ○○프로에서 출연해 달라고 해서 왔소.” 마침 그 프로그램 진행자인 제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와 모셔갔다. 그 제자는, “역시 우리 교수님 말씀은 다 철학이에요. 우리의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