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길', '기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2021.01.23)

푸레택 2021. 1. 23. 22:46

 

 

■ 기회(機會) / 김소월

강 위에 다리는 놓였던 것을!
나는 왜 건너가지 못했던가요
'때'의 거친 물결은 볼 새도 없이
다리를 무너치고 흐릅니다려

먼저 건넌 당신이 어서 오라고
그만큼 부르실 때 왜 못 갔던가!
당신과 나는 그만 이편 저편서
때때로 울며 바랄 뿐입니다려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길 / 김소월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길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정주 곽산(定州郭山):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복판: 일정한 공간이나 사물의 가운데
*바이: 전연, 아주, 도무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향을 두고서도 가지 못하는 나그네의 비애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처지를 우리의 전통적인 율격인 3음보를 바탕으로 애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차가 다니고, 배가 갈 수 있는 고향이 있지만,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재 고향이 화자가 꿈꾸는 현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가 지어진 시대 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할 때, 일제 강점 치하에서 고향은 화자가 어린 시절 자랐던 아름다운 모습을 상실한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결국 화자는 그러한 고향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정처 없이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시대 상황과 시의 내용 파악

이 시는 일제 강점 하에서 창작된 작품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할 수 있다. 시 속 화자는 고향을 떠나온 처지이다. 고향은 차도 다니고 배도 갈 수 있는 곳으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화자는 지금 그러한 고향을 두고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고향은 물리적으로는 존재하는 곳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고향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채 일제 강점 하에 놓인 조국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온 화자는 조국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나그네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우리 민족의 고달픈 상황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고려 가요인 ‘청산별곡’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을 계승한 김소월

가장 한국적인 시인을 꼽으라면 누구나 김소월을 쉽게 연상한다. 그는 민요조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대표작들인 ‘진달래꽃’, ‘접동새’, ‘산유화’ 등은 정한(情恨)과 슬픔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전통 율격인 3음보를 바탕으로, *상사별곡류(相思別曲類)의 사랑과 이별에 관련된 모티프를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재창조하고 있다. 과거의 민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개인의 특수한 상황과 미묘한 감정 및 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길’도 3음보의 기본 율격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 시이지만, 동시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맥락으로 하여 이해할 수도 있다.

작가 소개

김소월(金素月, 1902~1934)
시인. 평북 구성 출생. 본명은 정식(廷湜).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하여 일상적이면서 독특하고 울림이 있는 시를 창작했다. 시집으로 “진달래꽃”(1925)이 있다.

/ 2021.01.2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