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7)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너와 나만의 시간'을 읽었다. '너와 나만의 시간'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안에서 목숨을 건 세 사람의 심리와 삶의 방식을 통해 전쟁과 인간성이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단편 소설이다.
◆ 전체 줄거리
주대위, 김일등병, 현중위 이 세 사람은 전쟁 중에 산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낙오병들이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며칠째 헤매고 있다. 주대위는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어지만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다른 두 사람이 교대로 업고 무작정 남으로 향하고 있다. 현중위는 무언 중에 주대위에게 스스로 알아서 자살하여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달라고 압박하지만 주대위는 이를 모른 체한다.
저녁 때, 현중위는 혼자 떠나고 둘이 남게 되자 주대위는 김일등병에게도 떠날 것을 권한다. 주대위는 현중위가 아군진지에 찾아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기대하지만, 현중위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김일등병이 주대위를 업고 길을 떠나지만 혼자 업고 걷는 길이라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현중위의 일을 떠올린다. 주대위는 서너 달 전 부산에서 만났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그러다가 능선 낭떠러지에서 죽은 현중위의 시체를 발견하고 둘은 기운을 잃는다. 현중위의 죽음을 확인한 주대위는 자결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때 대포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들리는 대포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희망을 갖게 된다. 주대위는 의욕을 상실한 김일등병 등에 업혀 권총으로 위협하다시피 하여 개 짖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김일병은 어떻게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걷기만 한다. 드디어 김일병은 초가집 근처까지 오지만 귀 뒤에 와 밀고 있던 권총 끝이 별안간 물러나면서 업힌 주대위의 몸뚱이가 무겁게 탁 내려앉음을 느꼈다.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전쟁에서 낙오와 부상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심리와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보여 준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삶의 욕구이다. 현 중위는 자신의 삶을 위해 혼자 떠나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김 일등병은 끝까지 주 대위를 버리지 않는다. 주 대위는 자신이 그들에게 짐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삶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주 대위가 마지막에 듣는 소리는 실제의 소리라기보다는 끝까지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 의지의 표현에 가깝다. 주 대위가 들은 그 소리는 김 일등병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소리로서, 생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힘이 된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개 짖는 소리를 듣는 것인지도 모른다.
◆ 해설 1
이 작품은 전쟁 중 낙오한 세 명의 병사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이 세 병사가 보여 주는 것은 곧 삶에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현중위는 자신의 삶만을 위해 홀로 떠나고, 김일병은 주대위를 끝까지 보살핀다. 주대위는 자신이 다른 병사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임을 알지만, 끝까지 자신의 삶에의 욕구를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의 말미에서 개 짖는 소리는 이들의 삶에의 욕구에 대한 희망의 소리인 것이다.
1964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작품집 『너와 나만의 사간』에 수록된 다수의 작품은 이념의 대립과 갈등을 사랑과 휴머니즘으로 극복하고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모든 영광은」, 「너와 나만의 시간」, 「가랑비」 등은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전쟁의 상처와 분노보다는 따뜻한 인간애를 다루고 있어서 황순원의 작품이 인간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 해설 2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안에서 목숨을 건 세 사람의 심리와 삶의 방식을 통해 전쟁과 인간성이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황순원의 단편 소설이다. 황순원은 6?25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너와 나만의 시간’은 낙오와 부상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세 병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 대위, 현 중위, 김 일등병, 이 세 사람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아군을 찾아 막연히 남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들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주 대위는 부상당하여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나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김 일등병에게 업히면서도, 자살을 권고하는 듯한 현 중위의 눈빛을 알아채면서도 그는 삶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왕개미에게 목을 잘리는 개미떼의 꿈을 계속해서 떠올리던 현 중위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위협받는 자신의 생명의 위해, 부상당한 주 대위를 버리고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다음날 까마귀에게 눈알을 파먹힌 채로 발견된다. 그러나 현 중위의 시체를 발견한 김 일등병과 주 대위를 휩싸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 아니라, 다음은 내 차례라는 공포감이다. 삶에의 욕구를 바탕으로 쉴새 없이 걸음을 놀려왔던 김 일등병은 마침내 모든 희망을 잃고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나 결국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생존에의 본능이었다. 끝까지 인간애를 가슴에 담고, 부상당하여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주 대위를 버리지 않는 김 일등병과 삶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 주 대위는 결국엔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즉 이들의 강인한 생존에 대한 욕구가 바깥으로 형상화된 것이 결국 개 짖는 소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개 짖는 소리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는 소리이기 이전에, 그들 내부에서 솟아나는 생에 대한 의지의 소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죽음에 직면한 세 명의 병사들을 통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하에서 인간 개개인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존재에 대해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본능적인 생존에의 의지와 기독교적인 인간애에는 황순원이 특히 힘을 싣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기 혼자만의 생존을 위해 동료들을 떠나는 현 중위가 가장 먼저 시체로 발견되는 아이러니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총을 들이대면서까지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 주 대위와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는 김 일등병의 모습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황순원은 간결한 문체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은 이 세 사람의 심리를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황순원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이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일정한 거리를 통해 사건을 바라보게 하고, 그로 인해 죽음 앞의 인간이라는 화두를 천천히 객관적으로 음미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 작가 소개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소설가. 시인. 평남 대동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경희대학 교수. 예술원 회원을 역임함. 1930년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1934년 첫 시집 를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활동함. 1935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와 소설을 함께 발표하고, 1940년 단편 소설집 을 간행하면서 소설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에는 교직에 몸담으면서 “독짓는 늙은이”(1950), “곡예사”, “학”, 등의 단편 소설과 “별과 같이 살다”(1947), “카인의 후예”(1953), “인간접목”(1955) 등 장편 소설을 발표함.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에는 단편 소설의 완결성과 단일성에 걸맞는 개인의 문제에, 장편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는 삶의 총체적 인식에 주력하여 많은 문제작을 남겼다. 그리고, 시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문체와 스토리의 조직적인 전개를 그 특징으로 삼았으며, 그의 문체는 설화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인간의 본연적인 심리를 미세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비극적인 현실을 심원한 사상이나 종교로서 감싸고 이해하려는 주제 의식의 확대를 보여 주고 있다.
■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벌써 이틀째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굴곡진 산봉우리와 계곡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없는 성싶었다. 바람도 없었다.
주 대위의 몸은 양쪽에서 부축을 받고도 자꾸만 아래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냥 그것은 두 사람의 어깨에 매달려 끌려가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요행 동맥과 신경은 건드리지 않아 우선 압박대로 지혈을 시켜놓고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던 것인데, 오늘 아침부터는 그것이 부패작용이라도 일으켰는지 마구 저리고 쑤셔댔다.
어디까지 가면 된다는 한정된 길도 아니었다. 그저 무턱대고 남쪽으로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부상자에게 있어 일정한 거리감이 가져다주는 영향력이란 대단하다는 걸 주 대위는 알고 있었다.
어떤 전투에서 한 병사가 하복부에 관통상을 입고도 그 구멍 뚫린 하복부에다 제 옷섶을 틀어막아가며, 반 시간 남아 걸려야 하는 진지까지 돌아와서야 고꾸라진 일이 있었다. 그런 치명상을 입고도 그 병사가 진지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어디까지만 가면 진지가 된다는 일정한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해진 목적지가 지금 자기네에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 대위는 자기를 부축하고 걷는 현 중위와 김 일등병에게 자기는 더 걸을 수가 없으니 여기 남겨놓고 먼저들 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혼자 처진다는 것은 그대로 죽음을 의미했다.
김 일등병이 업자고 했을 때도 주 대위는 잠자코 업히었다. 올해 김 일등병은 열아홉살밖에 안 됐으나 농촌 출신이라, 업고 걷는 거리도 상당했다. 현 중위가 대번해서 업을 차례가 되었다. 그는 업기 전에 슬쩍 주 대위의 허리께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권총이 매달려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이미 배낭이며 철모며 총이며 웃저고리를 벗어버린 지 오래였다. 남은 무기라곤 주 대위의 허리에 찬 권총뿐이었다.
주 대위는 현 중위의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됐을 때부터 이미 자기의 몸뚱어리는 두 사람에게 거치장스러운 짐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차마 상사인 자기를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이쪽이 그걸 알아차리고 권총으로 자결할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 대위는 현 중위의 시선을 모른 체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군복바지와 군화마저 벗어버리고 그의 등에 업혔다. 현 중위는 김 일등병만큼 못했으나, 그래도 같은 학도병 출신인 주 대위보다는 체구가 크고 힘도 세어 꽤 잘 업어냈다.
이러한 그들이 이틀 동안에 먹은 거라곤 더덕과 칡뿌리, 그리고 어쩌다 찾아낸 샘물로 겨우 갈증을 면한 것밖엔 없었다. 게다가 첫여름 햇볕은 불길이었다. 업은 사람의 얼굴에서는 찝질한 땀줄기가 마구 눈과 입으로 기어들었다. 그렇건만 손으로 훔쳐내지도 못하고, 그저 눈을 꾹꾹 감아 땀을 몰아내거나 입을 푸푸거리며 고개를 흔들어 떨구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점차로 업은 사람의 걷는 거리가 줄어들고, 교대가 잦아갔다. 주 대위는 자기의 가슴과 업은 사람의 등이 젖은 셔츠를 격해 서로 미끈거리는 상쾌하지 못한 촉감에서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꼈다. 주 대위를 다시 바꿔 업은 현 중위는 땀을 철철 흘리며 걷는 동안, 벌써 몇 번짼가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 다시금 나타났다.
그는 그젯밤 적의 꽹과리와 날라리 소리를 듣기 전 잠 속에서 꿈을 꾸었던 것이었다.
(중략)
현 중위는 자기 등을 짓누르고 있는 주 대위의 중량을 자꾸만 느꼈다. 이 달갑지 않은 중량을 제거해 버리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주 대위 자신이 어서 삶에 대한 미련을 단념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세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산중에서 몰죽음을 당하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능선굽이에 이르렀다. 김 일등병이 대번해서 업을 차례였다. 지형상으로 보아 앞에 가로놓인 계곡을 내려가 앞산으로 질러 올라가면 잠깐이요, 그렇지 않으면 꾸불꾸불 굽이진 능선을 상당히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곳이었다.
현 중위는 계곡을 내려가 곧장 가자고 했다. 누구든지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었다. 더욱이나 그들은 단 몇 걸음의 단축이나마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는 것이었다. 김 일등병의 의견은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계곡을 내려갔다가 나무 숲속에서 방향이라도 잃게 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길만 더 더디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얼른 결정이 지어지지 않고 있을 때 주 대위가 한마디 했다.
“현 중위, 김 일병의 말대루 하지.”
퍼뜩 현 중위의 눈이 주 대위의 허리에 매달려있는 권총으로 갔다. 그러는 그의 눈앞에는 또다시 꿈의 장면이 나타났다.
(중략)
현 중위는 주 대위를 업지도 않은 몸이건만 전신에 비지땀을 흘렸다. 해거름때 세 사람은 구렁이 한 마리를 잡아 나눠 먹었다. 다 먹고 난 현 중위가 뒤라도 마려운 듯이 자리를 떴다. 그런지 좀만에 주 대위가 김 일등병에게 말했다.
“자네두 여길 떠나게.”
김 일등병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주 대위를 쳐다봤다.
“현 중윈 갔어, 기다리다 못해.”
“기다리다 못해 가다뇨?”
“내가 자살하길 기다리다 못해 떠났어.”
사실 현 중위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기를 피하면서,
“자네두 어서 여길 떠나게.”
김 일등병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서산에 비낀 붉은 놀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없이 주 대위에게 등을 돌려댔다.
혼자 업고 가는 길이라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지가 않았다. 조금 가서는 쉬고 조금 가서는 쉬고 했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아무데고 드러누웠다. 짐스럽다고 맨 먼저 버리고 온 배낭 속에 들었을 건빵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실상 그들은 이미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들은 현 중위의 일을 생각했다. 지금 어디쯤 갔을까. 김 일등병은 자기네를 버리고 간 그가 원망스러웠다. 한편 주 대위는 한시 바삐 그가 아군 진지를 찾아 구원병이라도 보내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입 밖에 내어서는 말하지 않았다.
김 일등병이 잠든 뒤에도 주 대위는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제와선 상처의 아픔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일단 잠들었다가는 영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중략)
날이 밝자 또 걸었다. 어제보다도 쉬는 도수가 잦아갔다. 김 일등병도 군복바지와 군화마저 벗어버렸다. 맨발로 산길을 걷기가 힘든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신발이 천근만근 무겁게 여겨져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발바닥이 터져 피가 내배었다. 그렇다고 돌부리 아니 고운 땅만 골라 밟을 수만도 없었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인가 아닌 산봉우리와 계곡의 움직임 없는 굴곡뿐이요, 귀에는 그처럼 갈망하고 있는 아군의 폿소리 대신 한없이 먼데까지 퍼져나간 고즈넉함과 김 일등병의 몰아쉬는 거칠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래도 주 대위는 온 신경을 귀로 모으고 있었다. 어떤 색다른 소리나마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번은 주 대위가 저리 가 물을 마시고 가자고 했다. 김 일등병은 어디 물이 있는가 싶었다. 그러나 주 대위가 말하는 데로 가 보니, 바위틈에서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루종일 걸은 것이 겨우 십릿길도 못 되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산개구리 몇 마리를 잡아 날로 먹었을 뿐이었다. 김 일등병의 무릎은 굽어지고 허리는 앞으로 숙여져 거의 기는 시늉이었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의 허리가 앞으로 숙는 각도에 따라 그만큼 자기의 생에 대한 희망도 꺾여들어감을 느껴야만 했다.
저녁때쯤 어느 능선을 돌아가느라니까 앞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펄럭 하고 날아올랐다. 깎은 듯한 낭떠러지가 가로놓여있는 것이었다. 발길을 돌리며 김 일등병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까마귀 두세 마리가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쪼고 있었다.
사람의 시체였다. 그리고 첫눈에 그것은 현 중위의 시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젯저녁 두 사람을 버리고 떠났을 때와 똑같은 위는 셔츠바람이요, 아래는 군복바지에 군화를 신고 있었다. 까마귀란 놈이 시체 얼굴에 붙여서 무엇인가 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쪽을 보고는 날아갈 기미를 보이다가도 그저 까욱까욱 몇 번 울 뿐, 다시 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시체 얼굴에는 이미 눈알은 없어져 떼꾼하니 검은 구멍이 나있었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와 아무데나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현 중위의 시체를 보자 마지막 남았던 기운마저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잠시 후에 김 일등병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일어나 허청거리며 벼랑 쪽으로 가더니 돌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까마귀가 펄럭 하고 시체를 떠나는 것이었으나, 곧 못마땅한 듯이 까욱까욱 하면 다시 내려앉는 것이었다.
김 일등병은 도로 와 쓰러지듯이 드러누워버렸다. 옆에 누워있는 주 대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번듯이 누워 있었다. 김 일등병은 전에 치열한 싸움터에서는 오히려 잊게 마련이었던 죽음이란 것을 몸 가까이 느꼈다. 내일쯤은 까마귀가 자기네의 눈알도 파먹으리라. 그러자 그는 옆에 누워있는 주 대위가 먼저 죽어 까마귀에게 눈알을 파먹히우는 걸 보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기편이 먼저 죽어 모든 것을 모르고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럴 기운조차 지금 그에겐 없었다. 저도 모르게 혼곤히 잠 속에 끌려 들어갔던 김 일등병은 주 대위가 무어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늘에 별이 총총 나있었다.
“저 소릴 좀 듣게.”
주 대위가 누운 채 쇠진한 목 안의 소리로,
“폿소릴세.”
김 일등병은 정신이 번쩍 들어 상반신을 일으키며 귀를 기울였다.
과연 먼 우레소리같은 포성이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다.
“어느편 폽니까?”
“아군의 포야. 백 오십오 미리의…….”
이 주 대위의 감별이면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 얼마나 먼 거리냐고 물으려는데 주 대위편에서,
“그렇지만 너무 멀어. 사십리는 실히 되겠어.”
그렇다면 아무리 아군의 포라 해도 소용이 없다.
김 일등병은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주 대위는 지금 자기는 각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상스레 맑은 정신으로 그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지금까지 피해 오던 어떤 상념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것은 권총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죽을 자기가 진작 자결을 했던들 모든 문제는 해결됐을 게 아닌가. 첫째 현 중위가 밤길을 서두르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제라도 자결을 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지친 김 일등병이라 하더라도 혼잣몸이니 어떻게든 아군 진지까지 도달할 가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김 일등병을 향해,
“폿소리 나는 방향은 동남쪽이다. 바로 우리가 누워있는 발 쪽 벼랑을 왼쪽으루 돌아 내려가면 된다!”
있는 힘을 다해 명령조로 말했다. 그리고 무거운 손을 움직여 허리에서 권총을 슬그머니 빼었다.
그때, 바로 그때 주 대위의 귀에 은은한 폿소리 사이로 또 다른 하나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의심스러운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저 소리가 무슨 소리지?”
김 일등병이 고개만을 들고 잠시 귀를 기울이듯 하더니,
“무슨 소리 말입니까?”
“지금은 안 들리는군.”
거기에 그쳤던 소리가 바람을 탄 듯이 다시 들려왔다.
“저 소리 말야. 이 머리 쪽에서 들려오는…….”
그래도 김 일등병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같애.”
개 짖는 소리라는 말에 김 일등병은 지친 몸을 벌떡 일으켜 머리 쪽으로 무릎걸음을 쳐나갔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등성이를 넘어가면 된다!”
그러나 김 일등병의 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누웠던 자리로 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도 받고 싶었다.
김 일등병이 드러누우며 혼잣소리로,
“내일쯤은 까마귀떼가 더 많이 몰려들겠지. 눈알이 붙어있는 것두 오늘밤뿐야.”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권총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어둠 속에 주 대위가 권총을 이리 겨눈 채 목 속에 잠긴 음성치고는 또렷하게,
“날 업어!”
하는 것이다.
김 일등병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면서도 하라는 대로 일어나 등을 돌려 대는 수밖에 없었다.
“자, 걸어라!”
김 일등병은 자기 오른쪽 귀 뒤에 권총 끝이 와닿음을 느꼈다.
등성이를 넘어 컴컴한 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좀 서!”
업힌 주 대위가 잠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
“왼쪽으루 가!”
좀 후에 그는 다시,
“잠깐만.”
그러고는,
“앞으루!”
이렇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하는 주 대위의 말대로 죽을 힘을 다해 걸음을 옮겨 놓는 동안에도 김 일등병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주 대위가 죽음을 앞두고 허깨비 소리를 듣고 그러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하필 자기네 두 사람은 마지막에 이러다가 죽을 필요는 무언가. 어젯 저녁부터 혼자 업고 오느라고 갖은 고역을 다 겪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원망이 주 대위를 향해 거듭 복받쳐 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쪽 귀 뒤에 감촉되는 권총 끝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권총이 비틀거리는 걸음이나마 옮겨 놓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산밑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루!”
“그대루 똑바루!”
그제야 김 일등병의 귀에도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점점 개짖는 소리로 확실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만한 거리에서인지는 짐작이 안되었다.
목에서는 단내가 나고, 간신히 옮겨 놓는 걸음은 한껏 깊은 데로 무한정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렇건만 쉬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귀 뒤에 와 닿은 권총 끝이 더 세게 밀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뵈는 게 없었다. 어떻게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저쪽 어둠 속에 자리잡은 초가집 같은 검은 그림자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 그리고 거기서 짖고 있는 개의 모양이 몽롱해진 눈에 어렴풋이 들어왔다고 느낀 순간과 동시에 귀 뒤에 와 밀고 있던 권총 끝이 별안간 물러나면서 업힌 주 대위의 몸뚱이가 무겁게 탁 내려앉음을 느꼈다.
―1958 칠월
[출처] 황순원『카인의 후예』(동아출판사, 1995) ㅡ 한국소설문학대계 (27)
/ 2021.01.2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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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감상] '길', '기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2021.01.23) (0) | 2021.01.23 |
[명사수필] '어디로 갈 것인가?' 윤세영 (2021.01.19) (0) | 2021.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