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흰 종이 수염' 하근찬 (2021.01.24)

푸레택 2021. 1. 24. 19:03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7) 하근찬의 『수난 이대』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흰 종이 수염'을 읽었다. 하근찬의 '흰 종이 수염' 은 어린 주인공 소년을 통해 역사적 수난이 어떻게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조명하며, 어린 아이의 아픈 삶은 결국 시대가 만든 비극임을 보여준다.

◆ 전체 줄거리

사친회비가 밀렸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동길’은 냇가에서 ‘용돌’과 멱을 감으며 놀다가 철교 위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징용 나간 아버지 생각을 한다.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온 ‘동길’은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지만 한쪽 팔이 없는 아버지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음 날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동길’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야단치는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아버지는 ‘창식’을 통해 ‘동길’이 사친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에 찾아간다. 학교에 찾아온 ‘동길이 아버지’ 모습을 본 ‘창식’은 친구들에게 ‘동길이 아버지’가 한쪽 팔이 없다는 소문을 내고, 친구들은 ‘동길’을 ‘외팔뚝이’라고 놀린다.

한편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돌려받은 책보를 ‘동길’에게 주면서 사친회비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극장에 취직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원래 목수였지만, 전쟁 때문에 한쪽 팔을 잃어 목공소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난 ‘동길’은 종이수염을 만드는 아버지를 돕는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그걸로 광대놀음이라도 할 것이냐고 묻고, 아버지는 서글피 웃는다.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 ‘동길’은 하교하는 길에 광대 분장을 하고 극장의 광고판을 몸에 매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에서 구경하던 ‘동길’은 그 광대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창식’이 나무 꼬챙이로 아버지의 흰 종이수염을 건드리며 놀리는 광경을 본 ‘동길’은 분노가 극에 달해 ‘창식’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린다. 이를 본 아버지는 놀라서 달려와 ‘동길’을 말린다.

◆ 이해와 감상

하근찬(河瑾燦)의 소설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주된 제재로 삼는다.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 전쟁에 이르는 아픈 역사 자체가 그의 소설의 무대를 이룬다.

이 작품에서는 어린 동길이를 통해 역사적 수난이 어떻게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조명한다. 주인공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현실 상황은 대체로 감추어져 있지만, 어린애의 아픈 삶은 결국 시대가 만든 비극임을 극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년이 아닌, 어린애가 받는 충격이라 그 아픔은 훨씬 깊게 그려진다. 전쟁은 아버지의 부채를 불러오고,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 고통은 현실적 가난이다. 그것은 사친회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친회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은 어린애로 하여금 열등감에 빠지게 하고, 그 열등감이 과격한 행동을 또 불러온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들, 특히 동길이와 용돌이는 그런 면에서 두드러진 인물이다.

동길이는 담임을 향해 감자를 먹이고, 용돌이는 ‘개똥리 캐라.’고 반발한다. 소년들이 가지는 사회적 반발심을 욕지거리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욕설은 가장 원초적인 거부의 행동이다.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기존의 권위에 대해 일탈적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이들이 그런 사회적 억압에 터무니없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아버지의 불행은 고스란히 아들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을 짓는다. 수난기의 아픔은 당대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까지 그 아픔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이다. 하근찬이 “수난 이대”에서도 두 세대에 걸친 아픔을 극화하고 있듯이 이 작품에서 두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동길이가 아버지에 대하여 품고 있는 생각은, 하나는 부자 간의 정이요, 또 하나는 못난 아버지를 둔 부끄러움이다. 아버지가 노무자로 가고 없을 때, 그 서러움은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하면 사라질 것이라 믿으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의 기간은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위상을 지니는 관계를 맺는 시간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부터 소년의 직접적 아픔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부재 기간은 사랑이 있던 시기이며, 아버지가 집에 있는 기간은 거꾸로 아버지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아버지가 팔을 잃고 돌아옴으로써 동길이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한다. 평소에 반짝이는 눈과 센 주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기죽어 지내는 동길이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외팔이가 되어 돌아온 것 때문에 풀이 죽는다. 아버지가 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담임을 만나러 학교에까지 왔기 때문이다. 동길이의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은 의기를 소침하게 하는 만큼 과격한 행동을 유발할 원인을 제공한다.

아버지를 놀리는 친구를 보자 안으로 가라앉아 있던 부끄러움이 분노로 발산되는 것이다. 수난의 역사는 결국 어린 영혼으로 하여금 그 순진성을 앗아 가고,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의 콤플렉스에 젖게 하여 마침내 폭력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놀린다고 분연히 일어서는 동길이의 심층 심리에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픈 역사가 터무니없이 부여한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재미나게 읽어 가는 가운데 역사의 비극을 다시금 돌이켜볼 수 있다.

◆ 소설읽기

흰 종이 수염 / 하근찬

1
아버지가 돌아오던 날, 동길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교실을 쫓겨났다. 다른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였다.

아이들은 모두 풀이 죽어 있었다. 어떤 아이는 시퍼런 코가 입으로 흘러드는 것도 아랑곳없이 눈만 대고 깜작거렸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아이도 있었다. 여생도 둘은 찔끔찔끔 눈물을 자내고 있었다. 촉 처진 조그마한 어깨들이 볼수록 측은했다.

그러나 동길이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두 주먹을 발끈 쥐고 있었다. 양쪽 볼에는 발칵 불만을 빼물고 있었고, 수박씨만한 두 눈은 차갑게 반짝거렸다.

치 ! 우럼마 일하는데 어떻게 학교에 오는공. 우라부지 인제 돈 많이 벌어 갖고 돌아오면 다 줄 낀데, 자꾸 지랄같이……

동길이는 담임선생의 처사가 도무지 못마땅하여 속으로 또 한번 눈을 흘겼다.

쫓겨 나온 교실이 마음에 있다거나, 선생님의 교탁 안으로 들어간 책보가 걱정이 된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알량한 몇 권의 헌책 나부랑이, 혹은 사친회비를 못 내고 덤으로 앉아서 얻어 배우는 치사스러운 공부 같은 것, 차라리 시원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돈을 가져오라는 호령 따위도 이미 면역이 된 지 오래여서 시들했다. 그러나 돈을 못 가지고 오겠거든 아버지나 어머니를 학교에 데려오라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사람이면 염치가 좀 있어야지. 한두 달도 아니고. 이놈아 ! 너는 사, 오, 륙, 칠, 넉 달치나 밀렸잖나. 2학년 올라와서 어디 한번이나 낸 일 있나? 지금 당장 가서 가져오든지 그렇잖음 아버질 데려와!」
냅다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간이 덜렁했으나 동길이는 또렷한 목소리로,
「아부지 집에 없심더.」
했다.
「어디 가고 없노?」
「노무자 나갔심더.」
「……」
징용(徵用)에 나았다는 말을 듣자 선생은 잠시 말이 없다가,
「그럼 어머니라도 데려와.」
했다. 목소리가 꽤 누그러졌으나 매정스럽기는 매양 한가지였다.
「안 데려옴 넌 여름 방학 없다. 알겠나?」
「……」

동길이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물고 양쪽 볼에 발칵 힘을 주었다. 그리하여 다른 다섯 아이와 함께 책보는 말하자면 차압을 당하고 교실을 쫓겨났던 것이다.

아이들은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운동장을 걸어나갔다. 여생도 둘은 유난히 단발머리를 떨어뜨리고 걸었다. 목덜미가 따갑도록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맨 앞장을 서서 가던 동길이는 발끝에 돌멩이 하나가 부딪치자 그만 그것을 사정없이 걷어차 버렸다. 마치 무슨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발가락 끝에 불이 화끈했으나 그는 어금니를 꽉 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다.

킥! 하고 한 아이가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킬킬 웃었다. 어쩐지 모두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뒤를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웃음은 일제히 뚝 그치고 말았다. 그들을 쫓아낸 얼굴이 창문 밖으로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섯 개의 가느다란 모가지가 도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교문을 나서자 아이들은 움츠렸던 목을 쑥 뽑아들고 다시 교실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선생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장단을 맞추어 구구를 외는 소리만이 우렁우렁 창 밖으로 울려나왔다.
사-이는 팔, 사-삼 십에 이, 사-사 십륙……

동길이는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른쪽 주먹을 왼쪽 손아귀로 가져가더니 그것을 그만 힘껏 앞으로 밀어내며,
「요놈 먹어라 !」
하는 것이었다. 감자를 한 개 내질러준 것이다. 그리고 후닥닥 몸을 날렸다. 뺑소니를 치면서도 냅다,
「사오 이십, 사륙에 이십사, 사칠에 이십팔……」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다른 아이들도 와아 환호성을 올리며 덩달아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군용 트럭이 한대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2
「오-이는 십, 오-삼 십에 오, 오-사 이십……」
동길이는 중얼중얼 구구를 외우면서 신작로를 걸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뺨을 타고 까만 목 줄기로 흘러내렸다.

「아아, 덥다.」
동길이는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땀 줄기를 훔쳤다.
읍들머리에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밑에 깔린 자갈들이 손에 잡힐 듯 귀물스럽게 떠 올라보이는 맑은 시내였다. 그 위로 인도교와 철교가 나란히 지나가고 있었다.

다리에 이르자 동길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히야, 용돌이 짜식, 벌써 멱감고 있대이, 학교는 그만두고, 짜식 참 좋겠다.」
그리고 쪼르르 강둑을 굴러 내려갔다.

동길이를 보자, 용돌이는 물 속에서 배꼽을 내밀며,
「동길아 ! 임마 니 핵교는 안 가고, 히히히……」
웃어댄다.
「갔다 왔어, 짜식아.」
「무슨 놈의 핵교를 그렇게 빨리 갔다 오노.」
「돈 안 가져왔다고 안 쫓아내나.」
「뭐. 돈?」
「그래, 사친회비 안 냈다고 집에 가서 어무이를 데려오라 안카나.」
「지랄이다, 지랄 ! 그런 놈의 핵교 뭐 할라꼬 댕기노. 나같이 때리차버리라구마.」
「그렇지만 임마, 학교 안 댕기면 높은 사람 못된다. 아나.」
「개똥이 다 캐라, 흐흐흐……」
그리고 용돌이는 개구리처럼 가볍게 물 속으로 잠겨버린다. 동길이는 물 기슭에 서서 때에 절은 러닝샤쓰와 삼베바지를 홀랑 벗어 던졌다.

이때,
꽤애-ㄱ
기적소리도 요란하게 철교 위로 기차가 달려들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기차였다. 동길이는 까만 고추를 달랑거리며 후닥닥 철교 쪽으로 뛰었다. 용돌이란 놈도 물에서 뿔뿔 기어나왔다.

커더덩 커더덩…… 요란하게 울리고, 그 위로 시꺼먼 기차가 바람을 일으키며 신나게 달려간다. 차창마다 사람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떤 창구에는 철모를 쓴 국군아저씨가 담배연기를 푸우 내뿜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동길이는 저도 모르게 두손을 번쩍 쳐들었다.
「만세이!」

그리고 용돌이를 돌아보았다. 용돌이란 놈은 까닭도 없이 대고 주먹으로 감자를 내지르고 있다. 고약한 놈이다.

동길이는 웬일인지 기차만 보면 좋았다.
'우라부지도 저런 차를 타고 척 돌아올 끼라. 우라부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사라져 가는 기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동길이는 잠시 노무자 나간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뻐근했다. 그러나 얼른,

「용돌아, 임마 내기할래?」
고함을 지르면서 후닥닥 몸을 날렸다. 풍덩 ! 물소리와 함께 까만 몸뚱어리가 미끄러이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용돌이도 뒤따라 풍덩 ! 물 밑으로 잠긴다.

물고기들 부럽잖게 얼마를 놀았는지 모른다. 뚜-- 하고 정오를 알리는 싸이렌소리가 울려왔을 때에야 동길이는 물에서 나왔다. 배가 훌쭉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주워 걸치며,

「짜식아, 그만 안 갈래?」
용돌이를 돌아보았다. 용돌이란 놈은 무슨 물고기 삼신인 듯 아직도 나올 생각을 않고 풍덩거리며 벌쭉벌쭉 웃고만 있다.
「배 안 고프나?」
「배사 고프다. 그렇지만 임마, 집에 가야 밥이 있어야지. 너거 집엔 오늘 점심 있나?」
「몰라, 있을 끼다.」
「정말이가?」
「짜식아, 있으면 니 줄까바.」
그리고 동길이는 타박타박 자갈밭을 걸었다.

다리를 지날 때, 후끈한 바람결에 난데없이 노래 소리가 흘러왔다. 극장에서 울려나오는 스피커소리였다. 이 무더운 대낮에 누가 극장엘 가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아리랑 시리랑…… 하고 악을 써쌓는다.

그러나 동길이는 배가 고파서 그런 건 도무지 흥이 나질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장기가 치미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오래 멱을 감은 탓일까? 타박타박 옮기는 걸음이 자꾸 무거워만 갔다.

3
집 사립문 앞에 이르자 동길이는 흠칫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아니었다. 남자였다.

동길이는 조심조심 사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머니는 부엌문 앞에서 무엇을 북북 치대고 있었다. 인기척에 후딱 뒤를 놀아본 어머니는 마루에 누워 있는 사람을 눈으로 가리켰다. 어머니의 두 눈에는 슬픈 빛이 서려 있었다.

동길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루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부지!」

동길이는 얼른 누워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가까이 갔다. 아버지는 자고 있었다. 그러나 동길이는 아버지를 향해 꾸뻑 절을 했다.


꼬박 2년만에 돌아온 아버지-동길이는 조심히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꺼멓게 탄 얼굴에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눈자위, 그리고 코밑이랑 턱주가리에는 수염이 지저분했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입 언저리에는 파리떼가 바글바글 엉켜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푸푸 코를 불면서 자고만 있다. 동길이는 파리란 놈들을 후쳤다.

어머니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동길이를 힐끗 돌아본다.
집에 와서 갈아입었는지 아버지의 입성은 깨끗했다. 징용에 나가기 전, 목공소에 다닐 때 입던 누런 작업복 하의에 삼베샤쓰……그런데,
「에!」
이게 웬일일까?
동길이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동길이의 놀라는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후유-- 한숨을 쉴 따름이었다. 동길이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한쪽 소맷부리를 들추어보았다.

없다. 분명히 없다.
동길이는 어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어무이 ! 아부지 팔 하나 없다!」
「……」
「팔 하나 없어, 팔!」
「……」
「잉?」
「……」
말없이 돌아보는 어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다.

동길이는 아버지가 슬그머니 무서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 곁으로 가서 부엌문에 붙어 서서도 곧장 아버지의 한쪽 소맷자락을 힐끗힐끗 건너 다 보았다.
어머니는 또 한번 후유-한숨을 쉬면서 함지박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밀가루 수제비를 뜨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똑똑 떨어져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 속으로 들어가는 수제비를 바라보자, 동길이는 배에서 꼬르르 소리가 났다. 꿀컥 침을 삼켰다. 아버지의 팔뚝 생각 같은 것은 이미 없었다.

수제비를 떠서 두 그릇 상에 받쳐들고 어머니가 부엌을 나오자 동길이는 앞질러 마루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아직 쿨쿨 자고 있었다. 아버지의 한쪽 소맷자락이 눈에 띄자 동길이는 다시 흠칫했다.

「보이소 예 ! 그만 일어나이소. 점심 가져왔구마.」
어머니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아버지는,
「으으윽-」
한 개밖에 없는 팔을 내뻗어 기지개를 켜며 부시시 일어났다. 동길이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얼른 아버지를 향해 절을 하기는 했으나, 겁을 집어먹은 듯 눈이 둥그래졌다. 아버지는 동길이를 보더니,

「으으-핵교 잘 댕긴나? 어무이 말 잘 듣고?」
그리고 아아윽 ! 커다랗게 하품이었다.
점심 상을 가운데 놓고 아버지와 동길이가 마주앉았다. 그 곁에 어머니는 뚝배기를 마룻바닥에 놓고 앉았다.

몰씬몰씬 김이 오르는 수제비 죽 - 동길이는 목젖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후딱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 뜨끈뜨끈한 놈을 푹 한숟갈 떠올리기가 무섭게 아가리를 짝 벌렸다.

아버지도 숟가락을 들었다. 왼쪽 손이었다. 없어진 팔이 하필이면 오른쪽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자 이마에 슬픈 주름을 잡으며 얼른 외면을 했다. 그러나 동길이는 수제비를 퍼 올리기에 바빠서 아버지의 남은 손이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그런 건 도무지 아랑곳없었다.

돼지새끼처럼 한참을 그렇게 퍼먹고 나서야 좀 숨이 돌리는 듯 동길이는 힐끗 아버지를 거들떠보았다. 아버지의 숟가락질은 도무지 서툴기만 했다. 그리고 동길이는 남은 국물을 훌훌 마저 들이마셨다. 콧등에 맺힌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린다.
「아-」
이제 좀 살겠다는 것이다.

(중략)

7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동길이는 눈이 번쩍 띄었다. 참 희한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만큼 먼 거리였으나 얼른 보아도 그것이 무슨 광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마니 한 장만이나 한 크기일까? 그런 광고판이 길 한가운데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움직이는 광고판을 따라 우르르 아이들이 떠들어대며 몰려오고 있었다.

동길이는 저도 모를 새 뛰고 있었다. 차츰 가까와지면서 보니 그것은 틀림없는 광고판이었다. 그러나 그 광고판에는 다리가 두개 달려 있고 머리도 하나 붙어 있었다.

사람이었다. 사람이 가슴 앞에 큼직한 광고판을 매달고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등에도 똑같은 광고판을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 머리에는 알롱달롱하고 쭈뼛한 고깔을 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밀가룬지 뭔지 모를 뿌연 분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턱에는 수염이 허옇게 나부끼고 있었다. 아주 늙은 노인인 것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그렇지 않은 듯도 했다.

이 희한한 사람이 간간이 또 메가폰을 입에다 갖다대고 뭐라고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오늘밤에, 아-오늘밤에 활동사진은 쌍권총을 든 사나이! 아 -쌍권총을 든 사나이! 많이 구경하러 오이소! 많이많이 구경하러 오이소!」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얼른 메가폰을 입에서 떼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럴라치면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가끔 목소리를 돋구어,

「아 - 오늘밤에는 쌍권총을 든 사나이!」
「아 - 쌍권총을 든 사나이! 구경하러 오이소.」
「아 - 오늘밤에 많이많이 구경하러 오이소.」
하고 떠들어댔다.

동길이는 공연히 즐거웠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우뚝 멈추어 서서 우선 광고판의 그림부터 바라보았다.

시꺼먼 안경을 낀 코쟁이가 큼직한 권총을 두자루 양쪽 손에 쥐고 있는 그림이었다. 노란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깔을 가진 여자도 하나 웃도리를 거진 벗은 것처럼 하고 권총을 든 사나이 등뒤에 납작 붙어 있었다. 괴상한 그림이었다.

「아 - 쌍권총을 든 사나이! 아-오늘밤에 활동사진은 쌍권총을 든 사나이! 많이 구경 오이소! 많이많이 구경 오이소!」

그리고 메가폰을 입에서 뗀 그 회한한 사람의 시선이 동길이의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동길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뒤통수를 야물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희한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동길이와 눈이 마주치자 약간 멋적은 듯했다. 그리고는 얼른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동길이는 코끝이 매워오며 뿌옇게 눈앞이 흐려져 갔다.

아이들은 더욱 신명이 나서 떠들어댄다.
「아 - 오늘밤에는 쌍권총입니다.」
「아 - 쌍권총을 든 사나이, 재미가 있습니다.」
이런 소리에 섞여 분명히,
「동길아! 너가부지다. 너가부지 참 멋쟁이다.」
하는 소리가 동길이의 귓전을 때렸다. 용돌이란 놈의 목소리에 틀림없었다.

동길이는 온몸의 피가 얼굴로 치솟는 듯했다. 주먹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뿌리쳤다. 뿌옇던 눈앞이 확 트이며 얼른 눈에 들어온 것은 소리를 지른 용돌이가 아닌, 창식이란 놈이었다. 요놈이 나무꼬챙이를 가지고 아버지의 수염을 곧장 건드리면서,

「진짜 앙이다야, 종이로 만든 기다, 종이로.」
하고 켈켈 웃어쌓는 것이 아닌가.

동길이는 가슴속에 불이 확 붙는 것같았다. 순간 동길이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이미 물불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삵괭이처럼 내달을 따름이었다.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길바닥에 나가떨어진 것은 물론 창식이었다. 개구리처럼 뻗었다. 그러나 동길이는 그 위에 덮쳐서 사정없이 마구 깔고 문댔다.

「아이크! 아야야야,……캑!」
창식이는 떡이 되는 판이었다.
아이들은 덩달아서 와아와아 소리를 지르며 떠들어댔다.

동길이 아버지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손에서 메가폰을 떨어뜨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창식이는 이제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윽! 윽! 넘어가고 있었다.
「와 이카노! 와 이카노! 잉?! 와 이캐?」
동길이 아버지는 후닥닥 광고판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하나 남은 손을 대고 내저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턱에 붙였던 수염의 실밥이 떨어져서 횐 종이수염이 가슴 앞에 매달려 너풀너풀 춤을 춘다.

「이누무 자식이 미쳤나. 와 이카노! 와 이캐! 잉」

[출처] 하근찬 『수난이대』(동아출판사, 1995) ㅡ 한국소설문학대계 (37)

/ 2021.01.2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