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2021.01.24)

푸레택 2021. 1. 24. 17:23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을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내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발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넌 서 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에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김수영: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50년 북한군에게 끌려갔다가 탈출해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1952년 석방됨. 박인환 등과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냈고, 시집 『달나라의 장난』, 시선집 『거대한 뿌리』,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전집』,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등이 있음.

◆ 감상과 해설

1.
항상 절정 위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나의 일상이 정면에서 너무 비껴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이닥칠 때 이 시를 읽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살아있다면, 첫 연의 4행을 조금 고쳐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설렁탕집 주인에게 욕을 하고” 정도로 말이죠), 그는 이미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첫 연의 4행이 마음에 몹시 걸리지만 그래도 이 시의 놀라운 정직함을 좋아합니다. 후대의 시인으로서 김수영 시인에게서 배운 가장 큰 것이라면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삶에 대해 가져야할 '정직함'과 '번민'의 자세입니다.

이 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들이닥친 1961년 5.16 군사쿠테타, 그 반혁명의 시절을 살아내는 소시민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회초리를 들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자유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갈망과 일상에 대한 냉혹한 반성이 만날 때입니다. 그리하여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 첫 부분)고 열기 어린 사랑의 지향을 노래할 때입니다. 60년대의 김수영이 거론하는 ‘비겁’의 목록을 2010년대의 ‘비겁’의 목록으로 바꾸어 읽어봅니다. 떠오르는 많은 괄호들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아,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이 탄식이 하릴없는 자조로 침몰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씩씩해져야겠습니다. 오, 자유! 오, 사랑! ㅡ 김선우 (시인)

2.
주제: 소시민 의식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역사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서는 저항하거나 비판 하지 못하고 일상(日常)의 사소한 일에만 화를 내는 자신의 소시민적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4·19 혁명으로 한층 부풀었던 자유와 사랑과 양심에의 희망이 5·16군사 쿠데타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자신의 처지를 조롱함으로써 한때 소리 높여 외쳤던 자유, 사랑, 혁명이 좌절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무엇보다도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진솔하게 보여 준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발견하게 된 자신의 초상(肖像)은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나 민중시인으로서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알게 된다.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소위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장이'나 '야경꾼'들로 대표된 가지지 못한 자, 힘 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한다.

또 그는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간' 소설가를 보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대항하지 못하고,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한다. 이렇게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도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마침내 시인은 자기 모멸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또한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한 그는 '모래'·'풀'·'바람'보다도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 반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는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폭로, 고발하는 진지한 자기 반성을 통해 자신의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인 '풀'이라는 걸작을 창작하게 되는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 2021.01.2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