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모음 (2021.02.09)

푸레택 2021. 2. 9. 20:16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ㅡ 한 줄도 길다, 하이쿠(俳句) 모음

한 줄의 시에
찰나와 우주를 담다
촌철살인, 자연과 해학
그리고 고독의 노래
번개처럼 우리네 삶을 파고드는
침묵의 언어들

파리, 벼룩,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

천대받는 것들, 구박받는 것들,
버림받은 것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서로 모여 정답게 이야기 나누고
평등하게 어울린다

참 별난 세계,
또 하나의 열린 아름다운 세상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ㅡ 오토쿠니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ㅡ 바쇼

눈을 감으면
젊은 내가 있어라
봄날 저녁
ㅡ 교시

새는 아직
입도 풀리지 않았는데
첫 벚꽃
ㅡ 오니쓰라

그럴 가치도 없는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
ㅡ 잇사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ㅡ 잇사

옛날에 내가 떠난 집
아직도 그 곳에
벚꽃이 피겠지?
ㅡ 잇사

이 늙은 벚꽃나무
젊었을 때는
소문날 정도로 사랑 받았지
ㅡ 잇사
(인생무상)

범종에 앉아
하염없이 잠자는
나비 한 마리
ㅡ 부손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저리 파닥거릴까?
ㅡ 치요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ㅡ 모리다케

나비가 날아가네
마치 이 세상에
실망한 것처럼
ㅡ 잇사

이 세상은
나비조차도
먹고 살기 위해 바쁘구나
ㅡ 잇사

나무 그늘 아래
나비와 함께 앉아 있다
이것도 전생의 인연
ㅡ 잇사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보라 소리
ㅡ 바쇼

누구를 부르는 걸까,
저 뻐꾸기는?
여태 혼자 사는 줄 알았는데
ㅡ 바쇼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ㅡ 바쇼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
ㅡ 잇사

내 귓가의 모기는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아는 걸까?
ㅡ 잇사

어린 모기가
연습을 하는 건지
자꾸만 자꾸만 물어 뜯네
ㅡ 잇사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
ㅡ 바쇼

한낮의 정적,
매미 소리가
바위를 뚫는다
ㅡ 바쇼

장맛비 내리자
물가에 서 있는 물새의
다리가 짧아지네
ㅡ 바쇼

저 뻐꾸기는 한여름 동안
한 곡조의 노래만
부르기로 결정했구나
ㅡ 료타

여름 소나기
잉어 머리를 때리는
빗방울!
ㅡ 시키

잡으러 오는 이에게
불빛을 비춰주는
반딧불이
ㅡ 오에마루

새벽이 밝아오면
반딧불도
한낱 벌레일 뿐!
ㅡ 아온

반딧불이 반짝이며 날아가자
"저길 봐" 하고 소리칠 뻔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ㅡ 다이기

여윈 정강이
부등켜 안고 있네
오동잎 하나
ㅡ 잇사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도 나비가 못 되었구나
ㅡ 바쇼

돌아눕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주게,
귀뚜라미여
ㅡ 잇사

비가 내리는 날이면
허수아비도
사람처럼 보이네
ㅡ 세이비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네
ㅡ 본초

이 길이여
행인 하나도 없는데
저무는 가을
ㅡ 바쇼

눈이 내린다

수선화 줄기가
휘어질 만큼
ㅡ 바쇼
(놀라운 관찰력)

첫눈이여,
글자를 쓰면 사라지고
쓰면 사라지고
ㅡ 치요니

불쌍한 눈
하필이면 담벼락에
내려 앉다니
ㅡ 잇사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우산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ㅡ 기가쿠

작년에 우리 둘이
바라보던 그 눈은
올해도 내렸는가?
ㅡ 바쇼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ㅡ 타다토모

모 심는 여자,
자식 우는 쪽으로
모가 굽는다
ㅡ 잇사

내 집에 사는 벼룩군,
자네가 이토록 빨리 수척해지는 건
다 내 탓이야
ㅡ 잇사

시원함이여,
종에서 떠나가는
종소리
ㅡ 부손

죽이지 마라, 그 파리를
살려달라고
손발을 싹싹 비비고 있지 않은가
ㅡ 잇사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ㅡ 사초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ㅡ 소세키

좁긴 하지만
뛰는 연습이라도
내 집의 벼룩
ㅡ 잇사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가지 위에서
아직도 벌레가 노래를 하네
ㅡ 잇사

벼룩, 너에게도
역시 밤은 길겠지
밤은 분명 외로울 거야
ㅡ 잇사

생선 가게 좌판에 놓인
도미 잇몸이
시려 보인다
ㅡ 바쇼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남는 것이다
저 하늘까지도
ㅡ잇사
(쉰 살을 맞아)

도둑이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ㅡ 료칸
(물건을 도둑 맞고)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 청소를 잘 안하니까
ㅡ 잇사

꺾어도 후회가 되고
꺾지 않아도 후회가 되는
제비꽃
ㅡ 나오조
(욕망의 딜레마)

이 나방은
여인의 방에 켜진 불빛을 보고
달려들어 몸을 불살랐구나
ㅡ 잇사
(욕망의 덧없음)

달빛이 너무 밝아
재떨이를 비울
어둔 구석이 없다
ㅡ 후교쿠

내 집 천장에서 지금
자벌레 한 마리가
대들보 길이를 재고 있다
ㅡ 잇사
(재밌는 관찰)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돌까?
ㅡ 소칸

쌀을 뿌려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ㅡ 잇사

내가 경전을 읽고 있는 사이
나팔꽃은
최선을 다해 피었구나
ㅡ 쿄로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 굉장한 깨달음)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ㅡ 잇사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ㅡ 소세키
(교만에 대한 경계)

미안하네, 나방이여
난 너에게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그냥 불을 끄는 수밖에
ㅡ 이싸

이 달팽이,
뿔 하나는 길고 뿔 하나는 짧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ㅡ 부손

내 집은 너무 작아
내 집에 사는 벼룩들도
식구수를 줄이네

내 오두막에선
휘파람만 불어도
모기들이 달려온다네!
ㅡ 이싸

높은 스님께서
가을 들판에서
똥 누고 계신다
ㅡ 부손

사립문에
자물쇠 대신
달팽이를 얹어 놓았다
ㅡ 이싸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ㅡ 소칸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ㅡ 사초

재주가 없으니
죄 지은 것 또한 없다
어느 겨울 날
ㅡ 잇사

한밤중
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달꽃이 떨어졌다
ㅡ 시키

늙은 개가
지렁이 울음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네
ㅡ 이싸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ㅡ 시메이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 년 후를 생각하네
ㅡ 시키

고추잠자리를 쫓아
넌 어디까지 갔니?
어느 들판을 헤매고 있니?
ㅡ 치요
(어린 아들은 죽음 뒤에)

저 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줄
미처 몰랐네
ㅡ 하진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에 앉은 파리를
쫓아 보냈네
ㅡ 잇사
(아버지의 죽음 앞에)

이 땅에 묻으면
내 아이도
꽃으로 피어날까?
ㅡ 오니츠라
(아들이 죽고 나서 쓴 시)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ㅡ 바쇼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
하지만...
ㅡ 잇사
(어린 두 딸을 잃고 아들마저 죽은 뒤 쓴 시)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ㅡ 바쇼

이 덧없는 세상에
저 작은 새조차도
집을 짓는구나
ㅡ 잇사

내 전 생애가
오늘 아침은
저 나팔꽃 같구나
ㅡ 모리다케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

본질적인 고독과 서툰 삶
그 삶의 부조리 속에서
사라지는 우리 자신..

압축과 생략의 미학(美學)
가슴에 와닿는 시의 진정성
한 줄 시의 힘이 참 세다

詩는 시를 쓴 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 된다.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썼느냐가 아니라, 읽는 이가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시의 가치가 결정된다. 아무리 멋진 시라도 내게 감동이 없으면 그 시는 한낱 글자일 뿐이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시, 내게 감동을 주는 시, 내 마음 속에 살포시 내려앉는 시가 내게 가장 좋은 시다.

[출처] 류시화 엮음 《한줄도 너무 길다》 (2000년, 이레) 外, 새 사진 촬영: 안정근 (2021.02.08 경안천)

/ 2021.02.09 편집 택

youtu.be/_htmuJjsNpU

youtu.be/rSZay3cjGRU

youtu.be/DLxaYrqaJ1A

youtu.be/3HfmhK50HEU

youtu.be/npy6XK4986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