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 눈사람 / 박동규
내가 6살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는데, 아버지는 글을 쓰고 싶으셨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방에 상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책상이 없었던 아버지는 밥상을 책상으로 쓰고 있었죠. 어머니는 행주로 밥상을 잘 닦아서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책상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세 달 된 여동생을 등에 업히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불 같은 포대기를 덮고서는 "옆집에 가서 놀다 올 게!" 하고 나가셨습니다.
나는 글 쓰는 아버지의 등 뒤에 붙어 있다가 잠이 들었고 얼마를 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깨워서 눈을 떠 보니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깨우더니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나가서 어머니를 좀 찾아오너라."
나는 자던 눈을 손으로 비비고 털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가 보니까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고 또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집 저 집 어머니를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오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가 아랫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번만 더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눈사람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동규야!" 하고 불렀습니다.
보니까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철철 맞으며 보자기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보자기를 들추면서 가까이에 오시더니 "너 어디 가니?"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볼멘소리로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해서 아랫동네 아줌마 집에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가 내 귀에 가까이 입을 대면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글 다 쓰셨니?"
나는 고개만 까딱거렸습니다. 어머니는 내 등을 밀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삽니다. 세월이 갈수록 내 머릿속엔 몇 시간씩이나 눈 구덩이에 서서 눈을 맞으며 세 달 된 딸을 업고 있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세 달 된 내 여동생이 아버지가 시를 쓸 때 울어서 방해될까 봐 그렇게 어머니는 나와서 눈을 맞고 서 있었던 겁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처음 직장에 다닐 때 즈음 조금 철이 들어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한 번 물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힘들었어? 돈도 많이 벌어오지도 못하고, 그런데 어머니는 뭐가 좋아서 밖에 나가서 일도 하고, 힘들게 고생하면서 애를 업고 있었어?"
나는 어머니가 우리 집 생활을 끌고 가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웃으면서,
"그래도 니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다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보라고 해." 하고 웃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도 시인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하는 아버지의 배려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사는 것은 이런 배려를 통해서 서로 사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ㅡ 박동규 문학박사가 기억하는 내 어머니
(청록파 시인 박목월 님의 아내 이야기)
/ '받은 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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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상 앞에서 / 박목월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이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 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
어린 것을 내가 키우나
하나님께서 키워 주시지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 위에 찬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으로
인간은 얽매어 살아왔던가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올 게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이여, 당신 앞에
육신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ㅡ 박목월 시인, 유고 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 中에서
/ 2021.02.12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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