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초 우거진 골에 / 백호(白湖) 임제 (林悌)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난이
잔(盞) 자바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현대어 풀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 하노라
푸른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잠을 자느냐 누워 있느냐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 두고 흰 뼈만 묻혀 있느냐 술잔을 잡고 권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 하노라
푸른 풀 우거진 골짜기에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젊고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에 두고, 창백한 백골만 묻혀 있는 것이냐 술잔을 잡아 권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지은이]
임제 (白湖 林悌1549-1587) :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 천재 시인이며 문장에 뛰어남. 호는 백호. 39세로 요절. 한문소설 《수성지》, 《원생몽유록》를 지음.
[창작 배경]
조선시대 최고의 낭만과 풍류 남아라 일컬어지는 임제(林悌)가 35세에 서도병마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가는 길에 송도에 있는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술상을 차려 놓고 제사 지내며 지은 시조다. 작자는 당대의 대문장가로서 명산(名山)을 두루 찾는 풍류인이었다. 그가 평안도 평사(評事)로 부임해 가는 길에, 이미 세상을 떠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서 읊은 노래다. 작자가 풀섶에 덮힌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조로, 후에 이 사실이 말썽이 되어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해서 파직되었다고 한다.
[이해와 감상]
조선시대 뛰어난 기생이었던 황진이의 묘를 찾아서 죽음을 슬퍼함. ‘청초’와 ‘홍안’, ‘백골’ 등은 색채적인 대조를 이루어 시어 배열의 묘를 살렸고, ‘자난다 누어난다’와 ‘무쳣난이’는 이미 죽은 황진이의 무덤을 향해 허탈하게 묻는 말로 작자의 애절한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평소에 함께 시주(詩酒)를 나누며 연분을 나누었던 명기 황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주제는 떠난 임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인생무상이다.
* 紅顔 : 젊고 고운 얼굴(紅 : 붉을 홍, 顔 : 얼굴 안)
[出典] 《진본청구영언 珍本靑丘永言》
■ 곡(哭)하지 말라 / 김기록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이 경계해야 할 과오 중 으뜸으로 꼽는 것은 탐욕과 오만이다. 탐욕과 오만에 빠진 인간은 예외 없이 파멸에 이른다. 좀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 탐욕이라면, 많이 가졌다고 우쭐대는 마음은 오만이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이며 오만은 과도한 자부심이다. 탐욕과 오만에 대한 교훈은 무엇이든 과도한 상태에 이르기를 경계하고 절제와 중용, 그리고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합리주의를 반영한다.
요새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다. 정치인들의 끝없는 탐욕과 코로나19 때문에 삶은 피곤하며 고달프다. 세상은 왜 이렇게 어지럽고 복잡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해 본다.
모처럼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87) 선생을 책에서 만났다. 조선이 낳은 인물 중 그 만큼 드러나지 않고 신비에 쌓인 인물은 별로 없다. 그는 불세출(不世出)의 천재이면서 온 세상을 품을만한 기개를 가진 대장부(大丈夫)였으나,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와 칼을 벗 삼아 주유천하(周遊天下)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후대의 석학들로부터 “조선왕조 5백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 시인이자 자주독립사상을 견지하여 사대부유(事大腐儒)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던 높은 인간성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호방불기(豪放不羈)라 할 수 있다. 그는 4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하늘과 땅 사이 어디에도 걸림 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삶으로 일관했다. 타고난 기질이 격정적이고자유분방(自由奔放)한 그는 스승도 없이 독학하며 산천을 유람하다 20세 되던 해 보은에 은거하던 당대의 석학 성운(成運)선생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의 준열한 꾸중과 격려로 중용을 8백독을 한 후 유명한 의마부(意馬賦)를 지어 스승께 바치고 하산한다. 의마부는 道가 사람을 멀리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道를 멀리 하고(道不遠人 人遠道), 산이 세속을 떠나는 게 아니라 세속이 산을 떠난다네(山非離俗 俗離山). 속리산이란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임제는 정감어린 시어와 풍류로 황진이, 일지매, 찬비(한우) 등 명기들과의 연분이 세간에 많이 알려졌으나 그는 흔해빠진 선비들처럼 음풍농월로 세월을 허송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귀공명을 백안시하고 남다른 우국충정으로 비분강개하는가 하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기백의 지사요 헛된 명리를 초개처럼 버리고 저자와 산수간(山水間)을 오가던 재세출세간(在世出世間)의 현인이었다.
그의 비범함은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과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식물을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최초의 한문소설과 7백수가 넘는 한시, 남명소승 등 절세의 작품들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알려진 허균(許筠 1569-1618)과 쌍벽을 이루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기백은 멀리 고려 말 선조 임탁(林卓에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임탁은 이성계가 고려의 왕족과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운 역성혁명(易姓革命) 에 반발해 벼슬을 내던지고 회진현(지금의 나주)에 숨어들어 절의를 지킨 그는 후손에게 새 왕조에 나아가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임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 도사 예조정랑 등의 벼슬을 거쳤으나 관리들의 부패와 파벌, 붕당에 깊은 환멸을 느껴 더러운 관직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35세가 되던 해 평안도 도사로 부임해 가던 중, 송도삼절로 불리던 당대의 아름답고 다재다능한 저항의 기녀 황진이를 만나고자 했으나 이미 석 달 전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따르며 지은 시조는 너무도 유명하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에서는 사대부가 천한 기생의 무덤에 절하며 곡을 했다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니 임제는 안 그래도 못마땅한 벼슬을 헌신짝 버리듯 던지고 천하를 주유하며 담대하고 협기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늘은 이 희대의 천재에게 수(壽)를 주지 않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니 향년은 겨우 39세였다. 장지(葬地)를 어디로 할까 묻는 자손들에게 “저-기 신걸산에서 영산강을 향해 뻗어 내려오는 지맥 중턱에 나를 묻어다오. 넓은 벌판이나마 시원하게 굽어보자구나...” 척당불기(倜戃不羈)의 호방한 정신이 드러나는 그 다운 유언이다.
임종이 가까워져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천하의 모든 오랑캐와 야만족이 다 중원의 황제를 칭했는데 오직 조선만이 중국의 신하노릇을 했을 뿐이다. 이런 한심한 조선 땅에서 산들 어떻고 죽은들 어떤가. 곡(哭)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칠 줄 모르는 권력과 정치적 탐욕 그리고 끝없는 경쟁 속에 메말라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백호 임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듯 하다.
[출처] 《시정일보》 김기록 한국시니어케어연구회 이사 (2020.03.23)
■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나주 백호문학관 / 박성천
조선의 천재시인 백호(白湖)의 호방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2013년 개관… 문학적 혼 품은 곳
유물·고문헌 등 옛것의 향기 발해
황진이 추모한 시 시대 초월 회자
시대 비판 “풍류기남아”라 불려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백호 임제문학관을 가기 위해서는 나주읍을 거쳐 영산강과 다시 들판을 지나야 한다. 강과 들을 거느리며 가는 길이다. 다시면은 곡창 나주평야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다시(多侍)는 ‘삼백’의 고장으로 불리었다. 쌀, 누에고치, 목화가 다량으로 생산됐다. 영산강의 한복판으로 광주와 함평을 잇는 지리적인 요충지였다. 논과 논이 겹치고 들과 들이 겹쳐 평야를 이룬 이곳은 비옥한 농토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 때 수탈의 대상이 됐던 건 그 때문이다.
추수가 끝나는 이맘때면 근동에 산더미 같은 나락가마가 쌓였다. 기흥리에서는 기원전 1050년께로 추정되는 벼화분이 검출되기도 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숭늉 같은 강물이 넓은 평야를 살찌웠던 것이다. 모든 곡창은 시간과 강의 합작품이다. 바람과 햇볕이 부조를 하고 농부의 피와 땀은 거름이 된다. 눈앞의 들녘은 오랜 시간 풍화와 수탈을 견딘 남도의 자랑이요 자부심이다. 단순한 수사가 아닌 자존과 품위를 간직한 나주의 자랑이다.
어디선가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라는 호방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다시면에 들어서면 넓은 들녘과 함께 그 사내의 결기와 거침이 없던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의 뛰어난 문장가 백호 임제(1549~1587)를 알현해야 하는 이유다.
백호는 명종 4년, 1549년에 임진(1526~87)과 남원 윤씨 사이에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등의 별호가 있지만 ‘백호’(白湖)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87년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주간에 늠름한 육척의 사나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마음은 어리석어 육운(陸運)의 병 면키 어렵고
지모는 졸렬하여 원헌(原憲)의 가난도 사양치 않아
풍진 속 벼슬살이야 잠깐 동안 굽힘이니
강해(江海)의 갈매기와 누가 잘 어울릴까
나그네 빈 방에는 밤마다 고향 꿈
다호(茶戶)며 어촌으로 옛 이웃들 찾아간다오
(백호 임제의 ‘이 사람’ 전문)
문학관 전시실에서 만나는 백호의 시문은 가슴 한켠을 쏴하니 적신다. 이곳에는 임제의 생애와 작품이 시기별로 전시돼 있다. 백호문학관은 지난 2013년 4월 임제 선생의 고향인 다시면 회진리에 들어섰다. 이곳에선 어린이 글짓기, 백호 문학제를 비롯해 백호 선생의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문학관 외관은 전체적으로 세련된 구조이지만, 내부는 고전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유물과 고문헌 등에서는 옛것의 향기가 발한다.
그러나 '백호' 하면 어떤 이들은 황진이를 떠올린다. 임제가 1583년 평안도도사로 부임돼 가는 길, 개성의 어느 청초 우거진 골짜기에서 무덤 하나를 본다. 황진이는 백호보다는 앞선 세대의 인물이지만 조선 최고 여류 시인이었다. 백호는 부임도 전에 황진이 무덤에 들러 추모를 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 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이 일은 그의 발목을 잡고 만다. 후일 파직됐다는 설이 전해오는데 저간의 일화와 무관치 않다. 임제는 단지 문인으로서 황진이를 상정했던 것 같다. 문장가로서 문장가로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지난다 누엇난다’는 ‘청구영언’에 전해오는데, 우리 문학사를 풍성하게 만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백호의 출사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다. 1576년(선조 9) 진사에 급제했으니 당시 나이가 만 27세였다.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에 배수됐다. 이후 흥양현감, 서북도 병마평사, 관서 도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당쟁에 얽히는 것을 원치 않아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문학관 곳곳에는 임제의 생애와 문학적 혼이 숨 쉰다. ‘임제(1549~1587)’라고 적힌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부착돼 있다. “백호 임제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라 일컬어졌다”
백호는 너무 큰 그릇이어서 시대가 품기에는, 아니 그 시대를 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허균·양사언 등은 백호의 문재와 기백을 알았다. 허균 등은 당대 필명을 날렸던 문사다. 그 같은 이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은 백호의 문장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물론 허균 또한 당대 사회와 불화해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을 견뎌야 했다.
성운(成運, 1497~1579)은 백호 임제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이다. 역사적 기록에는 임제가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돼 있다.
문학관에는 백호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과 자료가 비치돼 있다. 《백호시선》에서 봤던 문장들도 만난다. 벼슬을 집착하지 않는 이의 자유와 기상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오늘의 정치인들은 한번쯤 백호의 자유와 무애의 경지를 접했으면 싶다. 더 많은 것을 쥐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백호의 정신은 죽비처럼 다가온다.
[출처] 《광주일보》 글·박성천 (2021.01.18)
/ 2021.06.01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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