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미 / 조오현
어미는 *목매기 울음을 듣지 못한 지가 달포나 되었다
빨리지 않는 젖통이 부어 온몸을 이루는 뼈가 자리다
통나무 구유에 여물 풀냄새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긴 널빤지를 죽죽 깔아서 놓은 마루에 갈대를 걸어 만든 자리도
번듯번듯 잘생긴 이집 가족들도 오늘은 꺼무끄럼하다
낯설다
다 알고 있다 풀을 뜯어먹고 살 몸마저 빼았겼음을,
이미 길들여지고 있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어미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임을,
곧 어미를 잊을 것임을
어미는 젖을 떼기도 전에 코를 꿰었다
난생 첨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쇠똥구리 한 마리가 자기몸 두 배나 되는 먹이를 굴리는것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어린 눈에 뿔을 갖고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어미도 미웠다
그러나 그 어미는 그 밤을 혀가 마르도록
온몸을 핥아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팔려갔다
보았다 죽으러가는 그 어미의 걸음걸이를,
꿈쩍 않고 버티던 그 힘 그 뒷걸음질을,
들입다 사립짝을 향해 내뻗던 뒷발길질을,
동구 앞 당산 길에서 기어이 주인을 떠 박고 한달음에 되돌아와 젖을 먹여주던
그 어미의 평생은 입에서 내는 흰 거품이었다
이후 어미는 그 어미가 하던 일을 대물림 도맡았다
코에는 코뚜레를, 목에는 멍에를, 등에는 걸채를 다 물려받고
다 받아들이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삶은 냉혹하다는 것을 알았고
앎으로 어른스러워졌다
논밭을 갈고 바리바리 짐을 실어나르며
몸하면 교배하고 새끼를 낳아기르며
하 그리 고된 나날을 새김질로 흘려보냈다
이제 어미는 주인의 잔기침 소리에도 그 날 할 일을 알아차린다
아까부터 여러모로 뜯어보던 거간꾼의 엉너릿손,
목돈을 받아 침을 뱉아가며 한 장 두 장 세는 울대뼈
기다랗고 큼직한 궤짝에 들어갔을 목숨 값으로 눈물 많던 할멈 제삿날
조기라도 한 손 올렸으면 좋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뿔에 신기하게도 반쯤 이지러진 낮달 빛이 내리비치고
흰구름이 걸린다
다급하게 울어쌓던 매미 한 마리 허공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남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생감이 뚝 떨어진다
두엄발치에 구렁이가 두꺼비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오줌을 질금거리며 사립을 나선다
당산 길 앞에서 그 어미가 주인을 떠 박고 헐레벌떡 뛰어와 젖을 먹여주던
십년 전 일을 떠올리고 ‘음매’하고 짐짓 머뭇거리는 순간
허공에 어른어른거리는 채찍의 그림자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내를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가면서 힐끔 돌아보았지만
목매기는 보이지 않는다
두 아이는 걸리고 한 아이는 업은 아낙이 지나간다
맞은편 찻길 밑에 불에 타 그을리고 찌그러진 짐차,
사람들이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농한기 산너머 채석장에서 떠낸 석재를 싣고 읍내로 갔던 길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오갔던 길
올 정초에는 눈이 많아 질퍼덕 질퍼덕거리는 진창에 바퀴가 겉돌아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삐어 돈을 벌어들이지 못했다
지금 다 아물었으나 큰 힘을 쓸 수 없다
힘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
힘없는 죄 외에는 죽을 죄가 없다 만약 조개더라면 물 위로 떠올라 껍질을 열고
만천하에 속을 다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 할멈은 속을 안다 힘들거들랑 쉬어라고 멍에 목 흉터를 만져주고 등 긁어주던 할멈
남몰래 밤재운 익모초 생즙을 쇠죽에 타 주고 측백나무 잎을 우려낸 술도
잡곡 가루를 풀처럼 쑨 죽도 먹여주던 할멈은
채마밭 건너 열두 배미의 논에 곱써래질을 하던 날 죽었다
시체를 관에 넣고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
할멈의 장롓날 울었던 앞 뒷산 먹뻐꾸기들이 일년 내내 울어 그해 가을
그 울음을 받아먹은 텃밭의 감도 대추도 모과도 맛이 들대로 들었고
벼도 수수도 여물었고 고추도 매웠고 끝동의 오이도 대풍이 들었지만
사람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언제나처럼 마굿간이 썰렁했다
할멈 보는 데서 고삐를 벗고 풀이 무성한 벌판을 단 한번 달려보지 못한 것이
남아있는 한이지만,
사람도 죽는데 못 죽을 것이 없다고 할멈을 생각하는 사이,
떠밀려 도살장 안으로 성큼 들어섰고
그 꽉 막힌 그 막다른 한순간
어미는 목매기의 긴 울음소리를 아득히 듣는다
*목매기: 아직 코뚜레를 꿰지 않고 목에 고삐를 맨 송아지
[출처] 조오현 문학전집 《적멸을 위하여》(2012)
[감상]
조오현 스님의 '어미'라는 시를 읽으면, 간뇌도지(肝腦塗地)하는 중생의 애닮은 고통이 3만 6천 뼈를 시리게 한다. 어미소와 송아지의 심중에 어쩌면 이토록 일심과 동체에 이를 수 있을까, 그 경지가 아득해질 뿐이다. ㅡ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 舐犢之情 (지독지정)
舐 : 핥을 지
犢 : 송아지 독
之 : 어조사 지
情 : 뜻 정
어미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정이라는 뜻으로,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어버이의 심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새끼를 핥는 어미소처럼 약자를 껴안다.
■ 肝腦塗地 (간뇌도지)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졌다는 뜻으로, 나랏일을 위하여 제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2021.06.09 편집 택
https://blog.daum.net/mulpure/15856295
https://blog.daum.net/mulpure/15856290
https://blog.daum.net/mulpure/15856282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감상] '철조망에 걸린 편지' 이길원 (2021.06.10) (0) | 2021.06.10 |
---|---|
[명시감상]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2021.06.09) (0) | 2021.06.09 |
[명시감상] '적멸을 위하여', '절간 이야기', '아지랑이', '비슬산 가는 길', '고목 소리' 조오현 (2021.06.08) (0) | 2021.06.08 |
[명시감상] '강물' 오세영, '백담사', '나 없는 세상', '논두렁에 서서' 이성선 (2021.06.07) (0) | 2021.06.07 |
[명사수필] '봄' 피천득 (2021.06.07) (0) | 2021.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