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랑이 / 조오현 (1932~2018)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아득한 성자 /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적멸(寂滅): [불교] (1)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 (2) ‘사라져 없어짐’의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
■ 고목 소리 / 조오현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장독(杖毒): 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
■ 바위 소리 들으려면 / 조오현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 소리 들으려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 조오현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여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은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 계림사 가는 길 / 조오현
게림사 외길 사십 리 허우단심 가노라면
초록산(草綠山) 먹뻐꾸기가 옷섶에 배이누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 흰구름도 빛나고
물따라 산이 가고 산을 따라 흐르는 물
세월이 탓없거니 절로 이는 산수간에
말없이 풀어논 가슴 열릴 법도 하다마는
한 벌 먹물 옷도 내 어깨에 무거운데
눈감은 백팔염주 죄일사 목에 걸어
이 밝은 날빛에 서도 발길이 어두운가
어느 골 깊은 산꽃 홀로 피어 웃는 걸까
대숲에 이는 바람 솔숲에 와 잠든 날을
청산에 큰절 드리며 나 여기를 왔고나
■ 그곳에 가면 / 조오현
울고가는 거냐 웃고가는 거냐
갈대숲 기러기 떼지어 날고있다
하늘도 가을 하늘은 강물에 목이 잠겨있다
그곳에 가면
할아버지는 손주사랑이 탱자로 익고 있다
할머니 손주사랑이 고추장으로 맛들고 있다
한 마리 강아지 우체부를 따라가고 있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 파도 / 조오현
밤늦도록 불경(佛經)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 산에 사는 날에
나이는 뉘엿뉘엿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 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스님을 찾아가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말로는 말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번 쳐 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고
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 일이다
*운판(雲版): 절에서 식당이나 부엌에 달아 놓고 식사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기구
■ 오늘 / 조오현
잉어도 피라미도 다 살았던 봇도랑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기세를 잡은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 하는
■ 사랑 / 조오현
사랑은 넝쿨손입니다
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
그 밑으로 흐르는
오염의 띠 죽음의 띠
시뻘건 쇳물
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
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잎덩쿨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마음의
잎덩쿨손입니다
하나님의 떡잎입니다
부처님의 떡잎입니다
■ 비슬산(琵瑟山) 가는 길 / 조오현
비슬산 구비 길을 스님 돌아 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듯 이어진 길 이어질듯 끊인 연(緣)을
싸락 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맷새 한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 파지(把指) / 조오현
조실스님 상당(相堂)을 앞두고
법고를 두드리는데
예닐곱 살 된 아이가
귀를 막고 듣더니만
내 손을
가만히 잡고
천둥소리 들린다 한다
*파지(把指): 손으로 쥠
■ 재 한줌 / 조오현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줌뿐이네
■ 내가 쓴 서체를 보니 / 조오현
지난 날 내가 쓴 반흘림 서체를 보니
적당히 살아온 무슨 죄적(罪迹)만 같구나
붓대를 던져버리고 잠이나 잘 걸 그랬던가
이날토록 아린 가슴을 갈아놓은 피의 먹물
만지(滿紙)는 하늘 펼쳐놓자 역천(逆天)인가 온몸이 떨려
바로 쓴 생각조차도 짓이기고 말다니!
■ 숲 / 조오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 몽상 / 조오현
산에는 백도라지 들에는 민들레꽃
내 고향 아득한 기억은 우물 속 드리운 얼굴
담장가 등돌리고 섰던 순이 한 번 만나고 싶다
물올라 싱그러운 쑥 내음은 나도몰라
십리도 까마득한 언덕 달은 너무 밝아
못 지울 영상을 밟고 몰래 나온 조그마한 마을
마셔서 차지 않고 못내 비운 이날 밤은
어딘지 시름 번질 속 쓰린 항아린가
깨고난 잠의 자리엔 메아리만 감도네
잘못 살온 세상이라도 정화수 끝내 말고
초 한 자루 밥 한 그릇 외할머니 빌어주신
그날 그 돌상 곁에서 놀 수 없는 왕자여
■ 산창을 열면 / 조오현
화엄경 펼쳐 놓고 산창을 열면
이름 모를 온갖 새들 이미 다 읽었다고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로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
크고 작은 푸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
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
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
저마다 머금은 빛을 서로 비춰 주나니
■ 절간 이야기 / 조오현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의 맨 끄트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초로의 그 신사는 역시 그 자리에서 그 자세로 앉아있기에
“아직도 갈매기 두 마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 절간 이야기 3 / 조오현
아득한 옛날의 무슨 전설이나 일화가 아니라 요 근년에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공부하는 암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물론 숲속에 파묻힌 돌담 주춧돌도, 천년 고탑도 비스듬한 그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밟히고 먹뻐꾹 울음소리가 옷자락에 배어드는 심산의 암자이지요.
그 암자의 마당 끝 계류가에는 생남불공生男佛供 왔던 아낙네들이 코를 뜯어먹어 콧잔등이 반만큼 떨어져나간,
그래서 웃을 때는 우는 것 같고 정작 울 때는 웃는 것 같은 석불도 있지요.
어떻게 보면 암자가 없었으면 좋을 뻔했던 그 두루적막 속에서 20년을 살았다는 노비구니스님이 그해 늦가을 그 석불 곁에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자기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을 때, 다람쥐 두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돌담 속으로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옳거니! 돌담 속에는 도토리가 많겠구나. 묵을 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먹어야지.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중얼거린 노비구니스님이 돌담을 허물어뜨리고 보니 과연 그 속에서는 도토리가 한 가마는 좋게 나왔지요.
그런데 그 한 가마나 되는 도토리를 몽땅 꺼내어 묵을 해 먹었던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놈의 다람쥐 두 마리가 노비구니스님의 흰고무신을 뜯어먹고 있었답니다.
그 흰고무신을 뜯어먹다가 죽었답니다.
■ 절간이야기 29 / 조오현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 절간 이야기 31 / 조오현
어느 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 위해 담장가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덩쿨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지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하다 참 신기하다 감탄을 연거푸 했지만 그놈 청개구리를 제題하여 시조 한 수를 지어 볼려고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끝내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劫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감상]
청개구리가 놀라 폴짝 뛰어오른 담장이 시인에게도 있다. 청개구리와 시조 사이의 담장. 절간 안과 절간 밖 사이의 담장. 넘을 수 없는 그 담장이 절망을 부른다. 하지만 절망이 있기에 새로운 꿈이 탄생한다. 끙끙대던 시조 형식을 버리면서 청개구리 할딱이는 숨소리가 바짝 다가왔다. 다 찬미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청개구리처럼 화들짝 도약하는 말. 담장 안과 밖이 모두 청개구리빛으로 푸르다. ㅡ 손택수·시인
[출처] 《아둑한 성자》, 《적멸을 위하여》, 《절간 이야기》 外 조오현 시인
■ ‘조오현 스님의 시’ 시평 / 이상옥 시인
1
월간 《현대시》(2003. 3)의 ‘조오현 커버스토리’, 계간 《열린시학》(2004. 겨울)의 ‘시인연구 조오현’ 등과 같이 몇몇 문예지에서 시승(詩僧)인 무산 조오현 스님의 시세계를 집중조명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그것은 근자에 조오현 시집 《절간 이야기》(고요아침, 2003), 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아름다운 인연, 2004) 등이 출간되면서 더욱 시승 조오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일면도 없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지나친 욕심이 빚어낸 여러 가지 부작용들을 직면하고 있는 이즈음 승속을 초탈한 무욕의 세계를 보이는 시승 조오현 시인의 시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라 할 수는 없다.
조오현이 주목받는 것은 욕망의 무한 질주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해 그의 시가 안티테제로 기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근자의 시단에도 선시가 유행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 시인들의 선시와 시승 조오현의 선시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일반 시인들의 선시가 수행적 깨달음에서 빚은 시승의 선시 세계에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야 뭐 대단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라서 어떤 때 어떻게 쓴다고 말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평생 시승(詩僧) 칭호로 살아오면서 고작 시조 100수, 시 30여편이 될까말까 하니 시승이라 할 수도 없지요. 또한 스스로 자신이 시인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그것을 시로 씁니다. 어떤 서러움이나 기쁨이나 하여튼 그런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문자로 붙들어 놓은 것이 시가 됩니다.
인용문은 《열흘간의 만남》에서 신경림 시인이 “스님은 어떤 시를 쓰십니까. 스님은 수행자니까 그냥 수행만 하면 될 텐데 굳이 시를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요.”라는 질문에 답한 것이다.
1968년 《시조문학》에 천료한 이후 시조 100수, 시 30여편이라면 과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시승의 시는 전문적인 시인이 시적 영감을 받아쓰는 것보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쓰는 오도송이나 게송 같은 선시이기 때문에 일반 시인들의 시작(詩作)과 단순 비교할 성질은 아니다.
전통적인 선시는 깨달음을 노래한 오도송, 죽음을 앞두고 자기 인생을 압축해서 얘기하는 열반송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 제자들에게 훈계나 잠언을 내릴 때도 게송을 써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이런 선사들의 게송을 보면 뛰어난 선적 깨달음과 문학적 서정성이 들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인용문은 역시 《열흘간의 만남》에서 조오현이 선시에 대해서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오현 스님이 수도의 길에서 만난 깨달음을 130여편의 선시로 표현했다고 본다면 결코 과작이라 말할 수 없게 된다. 수행자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거의 득도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일상인은 물론 차치하고 수행자라도 그 깨달음이 어디,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때문에 시승에게 130여편의 깨달음의 시편은 적지 않은 양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시승인 조오현의 시는 일반 선사들이 남긴 선시와도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승의 시이기 때문에 일반 선사들의 선시보다는 조오현의 시가 시의 자리에 더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한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며칠 전 해인사에 계시는 사숙님이 오셔서 “요즘 뭘 해?” 하시기에 위의 시조를 지어 보여 드렸더니 “미친 놈! 나는 병病이 다 없어진 줄 알고 왔더니 병이 더 깊었군. 언제까지나 도道는 안 닦고 장구章句 따라 다닐 참인가? 또 헛걸음했군!”
ㅡ 〈절간 이야기 29〉
조오현이 스님이기 이전에 시인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용시는 수도승으로서 아직까지 참 도에 이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대한 선문적 성격이 없지 않지만, 액면 그대로 읽으면 중노릇은 하지 않고 시조나 읊조리는 한심한 시승을 사숙이 책하고 있는 형국이다.
저는 문학을 전업으로 하기보다는 불교와 겸업으로 하는 사람이라서 가끔은 혼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상하사불급(上下事不及)이라, 겸업 아닌 겸업으로 시인으로서도 실패했고 수행승으로도 실패했습니다만 굳이 불교와 문학, 훌륭한 수행승과 훌륭한 시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시인보다는 스님을 택할 것 같습니다. 말은 겸업이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본업은 수행자란 뜻이지요.
인용문은 《열흘간의 만남》에서 스님과 시인의 겸업에 대해 겸손하게 입장을 밝힌 글이다. 하지만, 실상 조오현이 수행승으로도 시인으로서도 함께 일가를 이룬 듯하다. 그것은 스님과 시인의 길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시가 선과 만나면 선시(禪詩)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도(禪道)는 묘오(妙吾)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에 달려 있다고 하여 시와 선이 모두 묘오, 즉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에 있음을 밝힌 바 있다.
2
먼저 조오현 시는 운문과 산문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이 그 특징으로 드러난다. 조오현은 본래 시조시인이면서도 「절간 이야기」 같은 산문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지 않는가.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르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ㅡ 「내가 나를 바라보니」
이는 시조 형식이다. 이 작품은 자아를 투시하며 집중화하고 있으니, 압축된 시조 형식이 적절한 것이다. 자아를 집중 응시할 때는 고도의 응축이 요구되는 바다. 이런 경우에는 시조 형식은 매우 유효한 양식이 된다.
어떤 젊은 사냥꾼이 때마침 먹이를 찾아 물가에 나온 수달피 한 마리를 잡아 껍질을 벗겨 기세등등 집으로 돌아 왔는데요 그 다음날 내버린 수달피의 뼈가 어디로 걸어간 핏자국이 보여 그 핏자국을 조심조심 따라 가니 어느 동굴 속으로 들어 갔는데요 그 어둑어둑한 동굴 속에서 전날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낸 수달피의 한 무더기 앙상한 뼈가 아직도 살아 다섯 마리나 되는 자기 새끼들을 한꺼번에 감싸 안고 있었는데요.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새끼놈들은 에미의 참상을 못 보고 젓을 달라고 칭얼거리고 있었는데요 사냥꾼이 사람이 아무리 지독하대도 그 에미와 그 새끼들을 보고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어서 그 새끼들이 자립할 때까지 에미 수달피가 되었다는데요 그 기간이 3년이었지만 3겁怯이나 된 것 같았다는데요 결국 세상 길 마음 길 다 끊어졌는데요 세상 길 마음 길이 다 끊어진 사람이 갈 곳은 절간밖에 없었는데요 절간에서도 몸에서 비린 내가 난다고 받아주지 않았는데요 숯불을 담은 화로를 머리에 이고 뜰에 서 있었는데요 정수리가 터지고 우레소리가 진동했는데요 그때사 무외無外라는 주지가 주문으로 터진 데를 아물게 하고 살도록 허락을 했는데요 이름을 혜통惠通이라고 지어 주었다해요. 물론 신라 문무왕 때 있었던 일이지요.
ㅡ 「절간 이야기 26」
이 작품은 혜통 스님의 일화를 테마로 한 스토리 시다. 이 경우는 시조같은 엄격한 정형성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형식이 된다. 이 시는 자유시보다도 훨씬 풀어진 진술 위주로 되어 있다. 앞에서 예시한 고도의 집중화된 운문 형식과 스토리 위주의 산문 형식과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이 같은 형식적 특징은 조오현의 시 정신의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것이다. 조오현 시는 한 마디로 승속을 초탈하는 것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운문과 산문의 넘나듦이 단지, 형식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승속을 넘나드는 사유의 넓이 및 깊이와 관계있는 것이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ㅡ 「일색변·5」
이 작품만 해도 속인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정녕 사랑이라고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는 것은 물론이고 그 만나는 거리도 이승과 저승쯤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어찌 속인의 사랑이 이를 법이나 한 것인가.
조오현 시에는 속인의 사유와는 색다른 삶의 의미와 가치가 펼쳐져 있다. 이는 물론, 그가 시승(詩僧)이기에 그러하다. 시승 조오현은 그가 지니는 폭넓은 사유와 깨달음의 깊이를 절간 이야기의 산문 형식이나 시조의 운문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시 세계는 일반 시인들과는 달리, 산사에서의 개달음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구시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이다.
우리절 종두鐘頭는 매일같이 새벽 3시만 되면 천근이나 되는 대종을 울리는데 한번은 “새벽 찬바람이 건강에 해롭다하니 다른 소임을 맡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어보니 “안됩니다. 노덕老德 스님 열반종涅槃宗도 저가 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조실祖室 스님 종성도 그 종소리 흐름이 얼마나 맑고 크고 길었는지…. 그 종성 듣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날 이후 이날까지 그 소리 한번도 못 들었습니다. 그날보다 더 조심을 해도 그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종도 뭘 아는가 모르지만 노덕 스님 열반에 드시면 그 소리 나올 것 같습니다.” 하고는, “좌우지간 그 소리 한 번 더 듣고 그만 둬도 그만 둘 것입니다.” 하고 그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종두 계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ㅡ 「절간 이야기 ·20」
그 누구에게나 비천하게 보이는 종두(鐘頭)도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이 잇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매일같이 새벽 3시만 되면 천근이나 되는 대종을 울리는 종두는, 노덕(老德)이 “새벽 찬바람이 건강에 해롭다하니 다른 소임을 맡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어보니 “안됩니다. 노덕老德 스님 열반종涅槃宗도 저가 칠 것입니다” 라면서 20여 년 전 조실(朝室) 스님 열반종을 칠 때의 맑고 긴 종소리 흐름을 다시금 듣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두가 절에서 종치는 소임의 궁극은 열반종의 맑고 긴 종소리의 흐름이 환기하는 법열의 세계에 닿아 있다. 이렇듯 절간 이야기에는 종을 치고 심부름하는 일개 종두조차 범상치 세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절이라고 하면 산은 높고 골도 깊고 물도 맑아 그 부근에 가면 기우뚱한 고탑 석불 그을린 석등 버려진 듯한 부도 탑신 주춧돌 홈대 장독 무거운 축대 돌담 돌다리 설해목 같은 것이 보이고 그래서 조금은 서늘하고 고풍스럽고 밤이면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날짐승 산짐승들 울음소리로 하여 적막을 더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어떤 도류道流들이 살다가 내버리고 간 그래서 담장은 진작 다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한 파옥 한 채가 있었는데 언제 어디서 왔는지 한 노승(양실良實; 1758-1831)이 그 파옥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노승을 위해 노승이 외출한 사이 담장을 쌓고 풀을 뽑고 집을 깨끗하게 보수를 해 놓았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그 노승 왈 “풀을 다 뽑아버렸으니 이제는 풀벌레소리도 못 듣게 되었군.”
시큰둥한 표정이었는데 집을 보수를 해 놓으니 집 주인이 부자인줄 알고 도둑이 들었는데 노승은 도둑에게 줄 물건이 없어 입고 있던 옷을 홀랑 다 벗어 주고 알몸으로 마당가에 나와 둥근 달을 쳐다보고 밝아졌습니다. “저 아름다운 달까지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ㅡ 「절간 이야기 ·32」
절간 이야기에서 종두(鐘頭)마저도 범상치 않거든 하물며 노승의 이야기야 오죽하겠는가.
어떤 도류들이 살다가 내버리고 간, 그래서 담장이 진작 다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한 파옥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 노승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노승을 위해 노승이 외출을 한 사이 담장을 쌓고 풀을 뽑고 집을 깨끗하게 보수를 해 놓았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그 노승은 “풀을 다 뽑아버렸으니 이제는 풀벌레소리도 못 듣게 되었군.”이라고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집을 보수해 놓으니 집주인이 부자인줄 알고 도둑이 들자 노승은 도둑에게 줄 물건이 없자 입고 있던 옷을 홀랑 벗어 주고 자신은 알몸으로 마당가에 나와 둥근 달을 쳐다보고 “저 아름다운 달까지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읊조리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은 세속적인 생각과 얼마나 천양지차가 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절간 이야기의 ‘종두’나 ‘노승’의 일화는 세속 담론과는 반대 담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같은 안티 담론이 직설적이지 않는 것이 시의 품격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오현은 시승으로서 시적 화법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종두나 노승의 일화 같은 시인의 의도를 암시하는 상관물로써 우회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계시하고 있지 않는가.
3
시승 조오현 시는 이미, 불이문의 세계로 들어간 것일까.
산너머 놀너머
일월마저 겨운 저녁
머물던 하나 소망
그나마도 다 사위고
긴 여운 남기는 바람
열어 놓은 내 가슴
ㅡ 「불이문不二門」
불이는 둘이 아닌 경지, 곧 나와 네가 둘이 아니요, 생사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색과 공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것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이문이 곧 해탈문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고 하여 불이문을 해탈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런 경지에서는 언어마저 넘어선다고 본다. 「유마경」에서는 일체 법에는 언설도 없고 보일 것도 없고 알 것도 없다면서 모든 법문을 여읜 것이 불이 법문이라고 가르친다.
시승 조오현의 시 세계가 승속 초탈의 세계를 보이다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불이문의 세계로 가슴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불이문不二門」은 승과 속이 구분이 없어지고, 인간과 자연의 구별 또한 없어지는 경지로 그의 시심이 뻗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하늘빛 들이비치는 고향당 누마루에
대오리에 엮어 만든 발을 드리우니
오늘 이 하루에 그냥 어른어른거린다
비스듬히 걸린 벽화, 신선도 한 폭
늙은 사공 노도櫓棹를 놓고 어주漁舟와 같이 흐르고
나는 또 어느 사이에 낙조가 되었다
ㅡ 「고향당古香堂 하루」
하늘은 저만큼 높고
바다는 이만큼 깊고
하루해 잠기는 수평
꽃구름이 물드는데
닫힐 듯 열리는 천문(天門)
아, 동녘 달이 또 돋는다
ㅡ 「일월日月」
불이문으로 가슴을 열어 놓으면 신선 같이 되는 것인가. 「고향당古香堂 하루」에서 화자의 하루는 신선 놀음 같다. 비스듬히 걸린 신선도 한 폭, 늙은 사공은 노도를 놓고 어주(魚舟)와 같이 흐르고 화자 또한 어느 사이에 낙조가 되었으니, 그렇지 않은가. 「일월日月」 또한 불이의 세계로 향하는 화자의 마음을 표현한다. 「고향당古香堂 하루」에서 어느 새 낙조가 된 경지라면 「일월日月」에서처럼 천문(天門)인들 열리지 않겠는가. 이 같은 경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갈할 수도 있으리라.
삶의 즐거움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ㅡ 「적멸을 위하여」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에서 볼 때 인간은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가 속한 조그만 공간에서 세력다툼하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영예를 차지하고 하는 등의 온갖 작태를 보이는 것이 화자가 보기에는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죽하였으면 아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고 하겠는가.
이 작품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자 자신을 자책하는 듯한 어조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뭇 중생을 향한 일갈인 셈이다. 이는 곧 속세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적멸의 길로 마음을 열어라는 법문이라 해도 좋다. 이 작품이 실상 중생을 향한 일갈이지만 자책하는 듯한 어조를 취함으로써 우회적인 선시적 반열로 작품성을 끌어올린 것 역시, 시승다운 면모라 할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당당한 어조로 대성 일갈할 수 있기까지 조오현 스님이 겪은 고행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1939년 절간 소머슴으로 입산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아, 세상 사람들은 삼계대도사요 법왕인 거룩한 부처님보다 문둥이를 더 무서워하는구나. 젠장할 세상, 나도 문둥이나 되어야겠다.’ 이렇게 다짐을 하고 문둥이를 따라 갔습니다. 그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다리 밑에 거적때기로 움막을 만들어 놓고 마누라와 살고 있었는데, 남자는 이미 온몸이 다 문드러지고 여자의 몸에는 울긋불긋 복사꽃이 피기 시작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인용문 역시, 『열흘간의 만남』에서 조오현 스님이 말한 것이다. 한동안 문둥이와 한 식구가 되어서 생활하기도 했을 만큼 그의 삶은 생의 나락까지 떨어져서 신산을 맛보았던 것이다. 조오현은 출가했다고 해서 삶의 현장에서 동떨어져서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삶의 현장에서 중생들의 아픔을 몸소 겪은 것이다. 결국 조오현은 고행과 수행을 통해 깨우친 것을 더 널리 중생들에게 전하고자 시승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제, 그끄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 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 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 뿐이네
ㅡ 「재 한줌」
이미 불이의 세계로 마음을 열어놓고 집착에서 벗어난 무욕의 삶을 향유하는 그 복락을 중생들도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 시승 조오현의 욕심이라면 욕심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적멸을 위해서」에서처럼 일갈을 하기도 하고, 또한 「재 한줌」에서처럼 집착의 덧없음을 일깨워주기도 하는 것이리라.
/ 2021.06.08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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