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시인] 이천에서 봄비가 보내온 詩 70

[초대수필] '도마' 김동인(김정인) (2021.12.05)

■ 도마 / 김동인(김정인) 결혼하고 살림을 하다보니 부엌이란 장소는 거의 나의 영역이 되었다. 지금은 전기가 들어와 밭솥도 쓰고 전자렌지며 오븐이며 조리하기 편리한 주방도구들이 많아졌지만, 나의 어머니 세대만 해도 밥을 하려면 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했다. 불꽃이 사그라진 재 위에 석쇠로 생선을 굽고 곤로(풍로)에 국을 끓이기도 했다. 그 옛날 가족들의 한끼 식사를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가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 쯤 어머니는 내게 나무 도마를 하나 사 주셨다. 두툼하니 받침대도 양쪽으로 두 개나 있고, 그 네 모퉁이에 돌기같은 검은 고무받침이 네 개가 있어 안전하고 튼튼했다. 무엇을 썰어도 안정감이 있고 들지않는 칼로 힘주어 썰어도 잘 버텨 주었다. 도마와 나는 끼니마다..

[초대수필] '항아리' 김동인(김정인) (2021.12.05)

■ 항아리 / 김동인(김정인) 볕이 잘 드는 곳에 항아리가 옹기종기 붙어 서 있다. 큰 항아리에는 간장이 가득하고 중간 항아리는 된장이, 작은 항아리엔 맛스러운 고추장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 옆으로 소금 항아리 깻잎장아찌 항아리... 집집마다 서열이 있듯이 쓰임이 많고 중요시 여기는 항아리는 안전하고 푸기좋은 위치에 자리를 하고 있다. 김치 냉장고가 없던 시절 항아리를 땅 속에 묻고 김치를 넣어 겨울 저장음식으로 먹었다. 추운 겨울 어머니가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를 퍼서 밥상에 올리면 누가 먼저 할것 없이 숟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그것처럼 시원하고 맛있는 음식도 없었다. 항아리의 옹기토에는 공기만 통하는 미세한 구멍이 있어 한 겨울 땅속에서도 김치가 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효가 되어 맛있게 변하는 ..

[나도시인] 입동, 해바라기, 들꽃, 회전목마 / 김동인 (김정인) (2021.11.18)

?? 입동 / 김동인 (김정인) 헝크러진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들 이리저리 나뒹굴다 갈 곳을 잃고 곧 허물어질 성처럼 산은 쓸쓸하고 무기력하다 이젠 겨울이구나 체념은 잎을 모두 버리라 하고 앙상한 나뭇가지 마른잎 하나 허락하지 않는 냉혹한 고독의 숨소리 그 거친 가지 위에 하얀 눈 살포시 올려 놓으리 나뭇잎의 사라짐이 기억나지 않도록 온 세상 흰 눈으로 덮고 겨울은 아름답다 말하리 가장 고귀하다 말하리 겨울, 너를 사랑하라 말하리 ?? 해바라기 / 김동인 (김정인) 군사를 거느린 장수인가 늠름히 고개를 들고 섰다 겸허하고 당당한 낮 빛 여일하게 충성을 다 하듯 그 얼굴은 태양을 향하고 어둠 속 침묵의 소용돌이 장수같으나 꽃이기에 슬픈 그의 충성은 늦가을 비로소 무거운 고개를 떨군다 ??..

[나도시인] '가을냄새', '가을', '다 아시는 주님' 김동인(김정인) (2021.10.23)

◇ 가을냄새 / 김동인(김정인) 안개가 피어오르는 저녁 찌륵찌륵 귀뚜라미 소리 찬바람에 두 볼이 시려온다 뉘엿뉘엿 해는 서쪽으로 가고 붉게 물든 주황빛 하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 싸늘한 찬바람 냄새 낙엽 타는 듯한 냄새 산이 말라가는 냄새 마른 건초들의 냄새 코 끝이 아련해 오는 노을빛 가을냄새 조용한 시골마을에 찾아와 내 마음을 할키듯 훔쳐서는 오늘도 해를 따라 사라진다 ◇ 가을 / 김동인(김정인) 언제 왔는지 모르게 가을이 와 있고 언제 물 들었는지 모르게 우리 마음이 가을에 물들었고 세상은 가을 풍경을 그리고 있다 누가 붓을 든 것도 아니고 누가 물감을 뿌린 것도 아닌데 산이 알록달록 변하고 하늘이 청명하게 변하는 가을 색칠을 다 마친 낙엽은 바람을 타고 스르르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 인생..

[나도시인] '구름은 그래서', '가을비', '그루터기의 슬픔' 김동인 (2021.09.16)

■ 구름은 그래서 / 김동인(김정인) 구름의 색깔이 왜 하얀고 하니 담아두지 않고 다 비워서 주머니엔 순수함 그것뿐이어서 구름의 몸이 왜 가벼운고 하니 거추장스런 가식이 없어서 허세와 꾸밈이 없는 몸이라서 구름이 왜 자꾸 가는고 하니 세상엔 어떤 미련도 없어서 아무리 보아도 마음 둘 곳 없어서 ■ 가을비 / 김동인(김정인) 푸른 잎 지게 하는 그것이 죄 짓는 것 같아서 쓸쓸하게 고독하게 하련다 고운 잎 지게 하는 그것이 아프게 하는 것 같아서 외롭게 그립게 하련다 여름, 그것을 힘겹게 밀어낸 애잔한 가을 하늘 이별이 못내 아쉬운 듯 잎 사이로 파르르 가려나 가시려나 물드는 잎새를 달래며 가을 하늘이 운다 지켜주지 못한 가녀린 꽃잎 위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 그루터기의 슬픔 / 김동인(김정인) 가장..

[나도시인] '가을바람', '여름 끝자락', '화분', '감자', '별들의 쇼' 김동인 (2021.08.22)

?? 가을바람 / 김동인 (김정인) 가을빛 받아 아롱한 푸른 호수에 붉은 잎 하나 배 띄우련다 머물 수 없는 철새처럼 잠 못 이룬 향연의 밤 쓸쓸히 산등성을 붉게 휘감아 놓고 홀로 채우는 빈잔 새벽 종소리 사무치는 저린 외로움 ?? 여름 끝자락 / 김동인 (김정인) 화관을 쓴 진한 자색 나팔꽃이 담벼락에 기대어 여름 끝자락을 잡는다 여름비 맞으며 꽃잎을 파르르 어찌할 수 없는 문턱 앞에 결국 화관을 내린다 ?? 화분 / 김동인 (김정인) 물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무라서 가을이 두려운 것은 겨울이 오고 있음을 흙이 얼고 뿌리가 어는 이 고통 화분 속 꽃들 목마름의 연가 울며 시집가는 여인처럼 화려하지만 슬픔 속에 있는것 우린 안다 차라리 민들레 홀씨 되어 바람 타고 날아 갔으면 ?? 감자 / 김동인..

[나도시인] '심심한 하루', '산에 오르니', '가을이 오네요' 김동인 (2021.08.18)

?? 심심한 하루 / 김동인 (김정인) 아빠는 논에서 풀 뽑으시고 엄마는 밭에서 고추 따시고 나는 소나무 그늘 아래 푸대자루 하나 깔고 앉았다 매미가 시끄럽게 맴맴 운다 지나가는 작은 개미 한참을 보다가 아이 심심해 고춧잎 작은 풀벌레 한참을 보다가 아이 심심해 어디서 날아왔나 파리 한마리 팔을 이리저리 아이 귀찮아 벌떡 일어나 참외밭으로 간다 뜨거운 햇살에 참외가 따듯해 붉은 토마토가 따듯해 톡 따서 한입 베어 물으니 에이 맛없어! 옥수수 밭으로 간다 긴 수염 쓰다듬다가 내 머리카락보다 짧네 아빠는 아직도 논에 계시고 엄마는 아직도 고추 따시고 난 아직도 너무 심심하다 앉았던 푸대자루에 돌아와 하늘 보고 눕는다 매미야 너도 심심하니... 구름아 너도 심심하지... ?? 산에 오르니 / 김동인 (김정인)..

[나도시인] '비밀', '옛 터미널 풍경', '원하고 원합니다' 김동인 (2021.07.25)

?? 비밀 / 김동인 추억을 곱게 접어 가슴 한켠에 두었다 그리움을 모아 가슴 한켠에 두었다 옛 사랑도 봉인해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다 한 날 아쉬움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일까 비가 오면 가슴이 아파오는 것이 그래서 일까 흰 눈 날리우면 가슴 사무치는 것이 떨어지는 낙옆에 내 가슴 철렁하고 잎새 하나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 곱게 접어 놓은 것 펼쳐질까 봉인된 것 들썩일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한없이 푸른 바다만이 떠도는 구름만이 위로해 줄 수 있는 그것 마음 속 비밀 ?? 옛 터미널 풍경 / 김동인 한 여름 푹푹찌는 무더운 날 짐보따리 서너 개 이고 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앉은 백발 할매 말쑥하게 차려입은 어색한 양복 중절모만 만지작거리는 아재 화장이 서툰 입술만 빨간 아주매 매표소 줄은 이내 기둥을 빙 돌..

[나도시인] '행복 줍기', '우리의 인생', '사랑이란', '인생무상' 봄비 김동인 (2021.06.30)

■ 행복 줍기 / 김동인 행복은 내가 찾아가는 것일까? 기다리면 만나는 것일까? 행복하다 느끼는 그 순간 마법처럼 누군가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가지 그리곤 행복을 가지고 도망치다 버거워 떨어뜨리고 말지 주인 없는 행복이 다니다가 내게로 오기도 하고 네게로 가기도 하고 간절히 원하는 곳에 머물기도 하지 주위를 잘 둘러보면 마법사가 놓친 행복이 있지 발견하면 눈치보지 말고 얼른 주어 그 행복 니 꺼니깐 행복은 줍는 거 아닐까? ■ 우리의 인생 / 김동인 싹이 나고 잎이 돋아 나무가 되고 장성하여 꽃이 피고 열매 맺으니 가을 지나 가지 위엔 눈이 쌓였네 나무의 일년살이가 우리네 인생 같고 꽃 피고 열매 맺은 뜨거운 열정보다 앙상한 가지 위에 눈꽃이 아름다워라 넉넉한 인자함이 무르익은 가을 같고 꽃이 지고 열매진..

[나도시인] '수레', '땔감', '사진', '초승달' 김동인 (2021.06.21)

■ 수레 / 김동인 움직이지 않는 수레를 굴리려 애쓴다 비탈길에서 손을 놓으면 제멋대로 내려가고 오르막길에서 손 놓으면 뒷걸음 쳐 도망가지 도와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비를 맞지 움직이지 않는 수레 같이 가 주길 바라는 수레 두 손으로 네 손 꼭 잡아주고 당겨주고 밀어주고 짐도 덜어주며 타이르는 수 밖에 네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걷는 수 밖에 그럴 수 밖에 ■ 땔감 / 김동인 눈보라 치는 한 겨울 냉골이 된 방 아궁이에 해지기 전 일찌감치 불을 지핀다 아버지는 어제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한가득 싣고 오셨다 이제는 열매 맺지 못하고 제 구실 못하는 것들이 실려왔다 뚝뚝 잘도 부러진다 제 나무에 붙어만 있었어도 아궁이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을 땔감이 되진 않았을 텐데 빨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