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시인] 이천에서 봄비가 보내온 詩

[초대수필] '도마' 김동인(김정인) (2021.12.05)

푸레택 2021. 12. 5. 20:32

■ 도마 / 김동인(김정인)

결혼하고 살림을 하다보니 부엌이란 장소는 거의 나의 영역이 되었다. 지금은 전기가 들어와 밭솥도 쓰고 전자렌지며 오븐이며 조리하기 편리한 주방도구들이 많아졌지만, 나의 어머니 세대만 해도 밥을 하려면 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했다. 불꽃이 사그라진 재 위에 석쇠로 생선을 굽고 곤로(풍로)에 국을 끓이기도 했다. 그 옛날 가족들의 한끼 식사를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가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 쯤 어머니는 내게 나무 도마를 하나 사 주셨다. 두툼하니 받침대도 양쪽으로 두 개나 있고, 그 네 모퉁이에 돌기같은 검은 고무받침이 네 개가 있어 안전하고 튼튼했다. 무엇을 썰어도 안정감이 있고 들지않는 칼로 힘주어 썰어도 잘 버텨 주었다. 도마와 나는 끼니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함께 생활을 해야 했다.

오래 사용하다보니 가운데는 움푹 칼자국이 생겼고, 양쪽 끝으로는 잘 지지 않는 손 때가 많이 묻었다. 위생을 위해서라도 새 도마가 필요할 듯 보였다 . 시장에 나와 보니 예쁘고 세련된 도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써보지 않은 각양각색의 모양들. 고민하다 나는 결국 비슷한 나무 도마를 샀다. 집에 돌아와 옛 도마는 현관 옆에 멀찌감치 놓아두고 새 도마를 씻은 후 김치 한 폭을 꺼내 썰기 시작했다.

코팅된 도마에선 또각또각 소리가 요란했다. 벌써 기스가 나면 어쩌나 조심스럽고 소리도 낯설었다. 야채를 썰어도 또각또각 날카롭게 들리는 그 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나와 십여 년을 함께한 도마는 둔탁한 정겨운 소리였는데 새 도마는 좀 조심해 달라는 듯이 맘을 불편하게 했다.

현관에 놓인 도마를 힐끔 쳐다 보았다. 신발이 발에 가장 편한 순간은 밑창이 다 낧고 헤져서 새 신으로 바꿔야 할 그 때라고 한다. 나의 걸음걸이가 편하도록 신발은 그만큼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저 도마의 모습이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기성세대들의 아픈 모습과 닮은 듯하다.

또각또각...... 그 당당한 소리 앞에 나는 기죽지 않고 도마를 길들여 갈 것이다. 어쩌면 내가 길들여질지도 모르지만...... 서로 한동안 애쓸 것이다.

/ 2021.12.05 이천에서 보내온 봄비의 글

https://youtu.be/h8V3bm8io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