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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윤흥길 (2019.12.08)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윤흥길 워낙 개시부터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어긋져 나갔다. 많이 무리를 해서 성남에다 집채를 장만한 후 다소나마 그 무리를 봉창해 볼 작정으로 셋방을 내놓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 내외는 세상에서 그 쌔고쌘 집주인네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설읽기] 「장마」 윤흥길 (2019.12.06)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60) 《장마》 (윤흥길, 1995년, 동아출판사)에 실려있는 《장마》를 읽었다. ■ 장마 / 윤흥길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동구 밖 어디쯤이 될까. 아마 상여를 넣어 두는 빈집이 있는 둑길 근처일 것이다. 어쩐지 거기라면 개도 여우만큼 길고 음산한 울음을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일지도 모른다. 잠시 꺼끔해지는 빗소리를 대신하여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짬을 메우고 있었다. 그..

[소설읽기] 「눈길」 이청준 (2019.12.05)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53) 눈길》 (1995, 동아출판사)에 실려있는 이청준의 소설 『눈길』을 읽었다. ■ 눈길 / 이청준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점심상을 물러나 앉으면서 나는 마침내 입 속에서 별러 오던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노인과 아내가 동시에 밥숟가락을 멈추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본다. "내일 아침 올라가다니. 이참에도 또 그렇게 쉽게?" 노인은 결국 숟가락을 상 위로 내려놓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친 걸음이었다.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될 바엔 말이 나온 김에 매듭을 분명히 지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 내일 아침에 올라가겠어요. 방학을 얻어 온 학생 팔자도 아닌데, 남들 일할 때 저라고 이렇게 한가할 수가 있나요. 급하게 맡아 놓은 일도 한..

[소설읽기] 「벌레 이야기」 이청준 (2019.12.05)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53) 눈길》 (1995, 동아출판사)에 실려있는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읽었다. 오래 전 이청준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감명깊게 읽었다. 오늘 읽은 『벌레 이야기』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다. ■ 벌레 이야기 / 이청준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어쩌면 행여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과 녀석에게 마지막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지 놈을 다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그 어미로서의 강인한 의지와 기원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해 5월 초 어느 날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각이 훨씬 지나도록 귀가를 안 했다. 달포 전에 갓..

[소설읽기] 「무진기행」 김승옥 (2019.12.01)

■ 무진 기행 / 김승옥 무진으로 가는 버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 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테토론직(織)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 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光州)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를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