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생명연습」 김승옥 (2019.12.01)

푸레택 2019. 12. 1. 22:40

 

 

 

 

 

 

 

 

 

 

 

● 생명 연습 / 김승옥

 

"저 학생 아나?"

나는 한(韓) 교수님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인사는 없지만 무슨 과(科) 앤진 알고 있죠."

다방문을 이제 막 열고 들어선 학생에게 여전히 시선을 주며 나는 대답했다. 감색 대학교복을 입고 그는 어울리지 않게 등산모를 쓰고 있다. 나와 같은 대학졸업반인데, 이름은 모르지만 그의 용모라면 대학 안에서도 알려져 있다.

"설마 나병환자는 아니지?"

한 교수님은 몸을 탁자 저편에서 내 앞으로 꺾어 기울이며 무슨 못할 소리라도 해서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셨다.

"아아뇨."

고개를 바로 돌리고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교수님께는 어린애다운 데가 있다. 오십이 넘은 분이 그렇다면 장점이다.

"내가 잘못 봤나? 어째 눈썹이 전연 없는 것 같아."

"밀어 버렸지요. 면도로 싹 밀어 버렸어요. 눈썹뿐만 아니라 머리털도 시원스럽게요."

"아니 왜?"

교수님은 바야흐로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러다가 쑥스러운 질문이었다는 듯이 또 하얀 이를 가지런히 내보이시며 웃으시는 것이다.

"극기(克己)?"

스스로 대답해 버렸다는 듯이 교수님은 아까 자세로 돌아갔다. 뒤가 개운치 않으신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역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싱긋 웃음을 보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마음이 환해지는 듯했다.

"요즘 학생들간에 유행이랍니다. 우습죠?"

나의 이런 물음에 그러나 교수님은 고개를 가로젓고 계셨다. 미소는 여전히 띠셨으나.

"안 우스우세요?"

"자넨 우습나?"

"네, 우스운걸요"

나는 우습다. 어머니와 누나와 그리고 형도 함께 살고 있었을 때이니까, 국민학교 육학년 때, 사변이 있던 그 다음해 이른 봄이었다. 전쟁중이긴 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던 여수(麗水)는 전선에서는 퍽 먼 국토 최남단의 항구여선지 인민군이 남겨 놓고 간 자취도 비교적 빨리 지워져 가고 있었다. 피난 갔던 사람들도 거의 다 돌아와서, 폭격 맞은 집터에 판잣집을 세우고 될 수 있는 대로 동란 발발 전의 생업을 다시 계속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윗녘에서 사태져 내려온 피난민들로 거리는 떠들썩했고 게다가 먼 섬으로 피난시켜 놓은 일급선박(一級船舶)들은 얼른 돌아와 활동할 생각을 아직 못 내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구호물자를 배급해 주는 교회엘 부지런히 다니고 있었다.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와 그리고 남녀공학인 야간 상업중학 삼학년에 다니고 있던 누나는 부두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교회엘 다니고 있었다.

 

여수에서는 가장 큰 교회였다. 그 교회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장 너머에 부두가 있고 부두 저편으로는 거문도(巨文島)로 가는 바다가 항상 차디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누나는 나란히 서서 금속처럼 차게 빛나는 해면(海面)을 바라보며 한참씩 서 있곤 했는데 그럴 때야 비로소 나는 어린 가슴에 찾아오는 평안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새 누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꼬옥 쥐고 있곤 했다. 교회 안의 발 시린 마룻바닥에 끓어앉은 것보다는 교회 마당가에서 있는 그것이 좋아서 나와 누나는 교회엘 다니고 있었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주는 구호물자가 하나의 목적이었던 것을 굳이 숨기지도 않아야겠다.

 

그 이른 봄 어느 날 교회에서는 대부흥회가 있었다.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이 나라에 부흥회는 얼마든지 있어도 좋다는 듯이 부흥회가 유행하던 그 무렵이긴 했지만 이번 부흥회에는 재미난 데가 있었다. 이번 부흥회를 주관하러 오신 전도사는 나이 스물인가 되던 어느 해에 손수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라는 것이었다.

 

부흥회의 첫날 밤이었다. 독특한 선전 때문에선지 부흥회는 대성황이었다. 장소는 제빙공장이 폭격을 맞아 된 빈터였는데 서너 걸음 저쪽은 파도가 밀려와서 찰싹이는 소리를 내고 물러가는 부두였다. 그 파도소리를 들으며 고촉(高燭)의 전등이 대낮처럼 어둠을 씻어 주고 있었다. 호흡이 급한 찬송가 소리와 수많은 사람이 발산하는 열이 이른봄 밤의 한기(寒氣)를 못 느끼게 해서 좋았다. 나와 누나는 손을 잡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강단의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가 지면서부터 몸이 달 정도로 기다리던 부흥회였다. 누나는 망측한 전도사라고 욕을 실컷 퍼부어 놓고 나서는 나를 껴안고 깔깔대며 웃어 대는 품이 나보다 더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형도 이것만은 흥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다락방에서 덜커덩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중략)

 

절망. 형은 발광하는 듯한 몸짓으로 픽 웃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나에게 이런 뜻의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남자관계'를 너는 그렇게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실은 그것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극기일 뿐이다. 극기일 뿐이다. 극기일 뿐이다…

 

"옛날 일을 그래서 지금은 후회하세요?"

"후회하냐고?"

교수님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셨다. 그러자 그러한 당신의 표정이 서운하셨던지 입술을 주름짓게 모아 쑥 내민 채 애처롭게 웃으셨다.

 

또 형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나에게 대한 운명적인 요구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와 누나에게는 이 말처럼 미운 것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마.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세속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 내게는 왜 이렇게 험악한 벽으로 생각되는지, 나는 참 불행한 놈이다. 절망. 풀 수 없는 오해들. 다스릴 수 없는 기만들. 그렇다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래를 빤히 내다보면서도 눈감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절망. 절망. 누나와 나는 그 다음날 저녁, 등대가 있는 낭떠러지에서 밤 파도가 으르릉대는 해변으로 형을 떼밀었다. 우리는 결국 형 쪽을 택한 것이었다. 미친 듯이 뛰어서 돌아오는 우리의 귓전에서 갯바람이 윙윙댔다. 얼마든지 형을, 어머니를 그리고 우리들을 저주해도 모자랐다. 집으로 돌아와서 불을 켜자 비로소 야릇한 평안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판자문을 삐걱거리며 열고 물에 흠씬 젖은 형이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우리의 눈동자는 확대된 채 얼어 붙어 버렸다. 형은 단 한마디, 흐흥 귀여운 것들, 해놓고 다락방으로 삐걱거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사흘 있다가, 등대가 있는 그 낭떠러지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것이었다. 나와 누나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오해에는 어떻게 손대 볼 도리 없이 우리는 성장하고 만 것이었다.

 

만화(漫畵)로써 일가(一家)를 이룬 오(吳)선생 같은 분도, 좀 이상한 얘기지만 일을 하다가 문득 윤리의 위기 같은 걸 느낄 때가 있다, 라고 내게 말씀하시는 때가 있다. 윤리의 위기라는 거창한 말을 쓰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작은 실패담이라고나 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당사자에겐 퍽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다. 이야기인즉, 하얀 켄트지(紙)로 펴놓고 먼저 연필로 만화의 초(草)를 뜬다. 그리고 나면 펜에 먹물을 찍어 연필 자국을 덮어 그리는데 직선을 그려야 할 경우엔 어쩐지 손이 떨려서 그만 자를 갖다 대고 그려 버릴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 그리고 난 뒤에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자꾸 그 직선 부분에만 눈이 가고, 죄의식이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한다. 그건 당신의 선(線)이 아니다. 그것은 직선이라는 의사(意思)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는 자[尺]의 선이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려 하는구나, 라고. 형 같은 경우는 아예 비길 수 없이 으리으리하게 확립된 질서 속에서 오선생은 살고 있는 것이지만 긍정이라든지 부정이라든지 하는 따위의 의미를 일체 떠난 순종(順從)의 성곽(城郭) 속에도 밤과 낮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 저녁 입관하시는 데 가보시겠군요?"

나는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교수님은 난처한 웃음을 띠셨다.

"내가 울까?"

"정순의 죽은 얼굴을 보고 내가 울까?"

"물론 안 우시겠죠."

"...."

"그렇다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옳은 말씀이다. 이제 와서 눈물을 뿌린다고 해서 성벽(城壁)이 쉽사리 무너져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슬프세요?" 내가 웃으며 물었더니,

"글쎄, 지금 생각중이야"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할 수 없이 또 한번 웃고 말았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청아출판사, 1992)

 

☆ 김승옥(金承鈺) 소설가

▲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 1954년 순천중학교 졸업

▲ 1960년 순천고등학교 졸업

▲ 1964년 사상계에 '무진기행' 발표

▲ 1965년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77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 슬픈 도회의 어법 / 유종호(이화여대 교수)

 

그는 그네들의 말투를 알고 있었다. 저 도회의 어법을. 「차나 한잔」

작가 김승옥의 문학적 성가(聲價)는 대체로 1966년에 나온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생명 연습」을 비롯하여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한 권으로 김승옥은 단편작가로서의 역량을 현란하게 보여 주면서 누구도 부인할 길 없는 뚜렷한 흔적을 우리의 현대문학사에 남겨 놓았다. 단편집 발간 이후에도 그는 「다산성」, 「내가 훔친 여름」과 같은 중장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작품들이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한 개성을 보여 주는 매력있는 작품임에는 틀림 없지만 첫 단편집이 보여 준 작품세계를 크게 수정하거나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충격을 딛고 선 작품이기 때문에, 또 새로운 충격을 더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양적 추가라는 국면이 크게 돋보인다. 첫 단편면집 이후에 보여준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과 같은 단편은 작가의 본령이 단편 쪽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서울 1964년 겨울」의 세계를 한결 풍요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이 1960년대 독자들에게 던져 준 충격은 압도적이면서도 공통적인 것이었다. 한동안 이의를 제기하는 소리도 없었다. 작가에 대한 호의에 찬 비평적 반응과 부수적인 기대는 그 후 작가 쪽에 크나큰 부담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단편집 후기에서 김승옥은 "이젠 한국 문단의 계관이라는 동인문학상까지 받아 놓았으니 끝장이 날 때까지 '쇼'를 계속해야 할 모양이다. 그러나 손님들이 웃지 않는 때가 오면 언제든지 집어치워 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뒷날 그는 젊은날의 객기가 없다 할 수 없는 이 말을 사실상 현실화하였다. 사정을 헤아릴 길이 우리에게는 없고 또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짤막한 후기가 많은 시사를 던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의 그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것을 구태여 찾자면, 우리의 일부에게는,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도 낯설어했던 기독교적 정신 또는 합리주의가, 일부에게는 배금사상이, 일부에게는 상업공부를 한 민족주의가 그것들이다. 생활하기에는 그만한 것들로써도 충분한 것이다." 위의 발언과 그후에 전개된 사회적 지적 풍토를 떠올리면서 언제든지 집어치울 각오가 되어 있다는 오기를 포개어 본다면 김승옥의 부분적 전념 포기에 대한 맥락은 얼추 잡히는 셈이다.

 

어쨌거나 김승옥은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과 몇몇 후속 단편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성취는 너무나 섬세하고 휘황하여 작가 자신마저도 숨가쁘게 할 정도였다. 혼히 한 세대로 가늠하는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는 한결 차분하고 정돈된 눈으로 그 문학적 성취를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0년 전 하나의 경이로 다가왔던 그의 문체와 그것을 낳게 했던 풋풋한 감수성은 오늘날 얼마쯤 바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문체는 후속 세대들에게 문체의 위엄과 위력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 소설 일반의 문제를 더욱 섬세하게 할 수 있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작 김승옥 문체의 눈부심을 삭감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문학의 역사가 한편으로 '낯설게 하기'의 교체현상이라는 일면이 있기 때문에 김승옥 문체는 여전히 평면적 사실주의에 대한 대조이자 해독제로서 매력 있는 사례가 되어 주고 있다. 비속한 재치나 개그가 문학 내부를 혼란시키고 있는 오늘 그의 신선하고 섬세한 문체는 문학 고유의 자신과 이어이 모범 사례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는 문체가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학의 고유성이 거기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문체적 매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은 여전히 「무진 기행」이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가 전혀 그 문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역시 30년 전에 씌어진 「감수성의 혁명」이란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몇 줄의 손놀림으로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를 끝내는 솜씨도 요약하면 문체의 효과인 것이다. 옛 글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중언부언하지 않겠지만 김승옥 문체의 사실적이고도 환정적(喚情的)인 기능은 표피적인 약간의 부침(浮沈)을 겪는 대로 항상적(恒常的)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유정의 몇몇 단편이 오늘날까지 읽히는 것이 그 말솜씨라는 것과 사정은 같다. 문학과 비문학을 구분해 주는 것도 문체이다. 문체 없는 문학은 흘로 서지 못한다. 그렇지만 문체만 가지고도 안 된다. 참다운 문체는 세상과 사람을 지각하고 읽는 방법이다. 「무진 기행」에서도 속물 중의 속물인 세무서장과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여교사와 그녀를 짝사랑한다는 무진이 고향인 젊은 교사의 생동감 있는 성격묘사는 만만치 않은 세상읽기의 결과이고 그것이 문체와 어울려서 이룩하는 것이다.

 

1 도시적 인간관계

『서울 1964년 겨울』이란 표제는 계시적이다. 「파름의 승원」 제1장에 붙인 '미라노 1796년'을 상기시키는 이 표제는 김승옥이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와 장소에 대해서 충실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도록 상기시켜 준다. 스탕달은 소설을 한길에 세워 둔 거울이란 뜻으로 말한 적이 있지만 근대소설은 사회현실과 밀착된 근친성을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진하게 가지고 있다. 그것이 소설의 특징이며 단편도 느슨하긴 하지만 매한가지다. 근대소설은 대체로 당대 사회의 객관적 묘사를 지향했는데 이때 시간과 장소는 그 특정성으로 해서 객관적 묘사에 있어 필수적 요인이 된다. 특정 시간과 장소의 구체적 명시야말로 신화나 로맨스와 구별되는 소설의 특징이다. 표제에 명시되어 있듯이 김승옥이 꼼꼼하고 정감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1960년대 서울에서의 사람살이이다. (물론 「건」, 「수술」과 같이 시골 삶이나 다른 연대의 세상을 다룬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만큼 그것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무진 기행」은 지방이 무대이지만 화자이자 주인공의 서울 이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생활자의 시점에 선 작품이다.)

 

1960년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 없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속도가 이례적이리만큼 빨랐던 거대변화가 시작되던 연대이다. 그 거대변화는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뒷날에 가서야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던 변화의 논리와 궤적을 가지고 있었다. 비근하고 일상적인 것에 매몰되는 신문 기사와 신문의 시사해설에 향도받아 눈에 뜨이는 정치적 사건에 사람들이 일희일비하는 사이 거대변화의 수레바퀴는 소리없이 마력(馬力)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승옥의 뛰어난 단편들은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거대변화의 징후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보여 주고 있다. 변화의 징후가 현저하계 드러나는 것은 도시이고 그의 주요작품이 도시 거주자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전봇대에 붙은 약광고판 속에서는 이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떤 빌딩의 옥상에서는 소주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있었고, 소주광고 곁에서는 약광고의 네온사인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황급히 꺼졌다간 다시 켜저서 오랫동안 빛나고 있었고, 이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종이 한 장이 바람에 휙 날리어 거리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종잇조각은 내 발 밑에 떨어졌다. 나는 그 종잇조각을 집어 들었는데 그것은 '美姬 서비스, 特別廉價'라는 것을 강조한 어느 비어 홀의 광고지였다. (「서울 1964년 겨울」, 225쪽)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한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 정의되어 있는 서울의 밤풍경을 재현한, 약광고와 술광고와 유흥가의 선전지가 고작인 이 대목은 산업화가 시동단계에 있던 서울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 1980년대 지금의 서울 거리와 다르고 이태준이나 박태원이나 이상이 보여 주던 1930년대 서울 거리와도 다르다. 절대빈곤을 시사하는 겨울밤의 거지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거리의 포장 친 선술집에서 대학원생과, 육사에 낙방한 후 입대했다가 지금은 구청 병사계 직원이 되어 있는 화자, 그리고 아내 시체를 판 후 자살하게 되는 서적 외판원이 만나게 된다. 아니 부딪치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우연히 마주쳤고 그 중의 하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자청하여 끼여들었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연출도 공통 관심사도 공통의 과거도 없다. 익명과 익명의 우연한 부딪침이라는 도회의 항상적(恒常的) 경험을 작품은 취급하고 있다. 대학원생 안과 병사계 직원 김은 동년배라는 것과 선술집에 비슷한 시각에 들어섰다는 우연 때문에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것은 피차간에 의미 있는 경험의 교환이 되어 주지 못한다. 피차간에 인적사항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건성일 뿐이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의 눈에 가장 부럽고 신기하게 비치는 게 무언지 아십니까? 부러운 건, 뭐니뭐니 해도, 밤이 되면 빌딩들의 창에 켜지는 불빛, 아니 그 불빛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고, 신기한 건 버스칸 속에서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자기 곁에 이쁜 아가씨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아가씨들과 팔목의 살을 대고 있기도 하고 허벅다리를 비비고 서 있을 수도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을 시내 버스를 이것저것 갈아타면서 보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날 밤엔 너무 피로해서 토했습니다만.." (「서울 1964년 겨울」, 217쪽)

 

고향 탈출에 성공한 병사계 직원은 무직자 시절의 절실했던 체험을 이렇게 털어놓지만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대학원생은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냐며 말참견을 한다. 그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경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암묵의 동의가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관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의미 있는 경험 교환에 대한 지향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계속되는 그들의 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독백의 교체일 뿐이다. 그들의 초점 없는 요설은 그들의 권태와 무위의 시간 소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우연한 익명의 부딪침 속에서 의미 있는 경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도회적 삶이 국면을 드러낸다. 이들은 선의의 인간이다.

 

(중략)

 

그 사람들은 돌아갔다. 누나와 나는 병원의 어머니 한테로 달려갔다. "우리가 잘못한 거야"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젠 그만 집어쳐요, 엄마. 우리 그 장사는 그만 집어쳐요"라고 말하면서 누나는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무서워요. 무서위 죽겠어요." 계속해서 누나가 말했다. "살기란 힘든 거란다." 어머니가 힘없이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아저씨에게 보내셨다. 아저씨는 말했다. "세금을 내면서 그 장사들 하려면 음식값을 많이 받아야 한다. 음식값을 많이 받으면 누가 그걸 사먹으러 오겠니? 순경 말은 못 들은 체하구 그냥 계속 하라구 할머니한테 그래라." 그러나 우리는 아저씨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아직 덜 나으신 몸을 집으로 다시 옮겼다. 누나가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청계로에 나가서 꽃을 받아 왔다. 누나는 아침부터 꽃바구니를 들고 종로로 나갔고 어머니는 오후에 누나의 것보다는 작은 꽃바구니를 들고 소공동(小公洞) 쪽으로 나가셨다. (「염소는 힘이 세다.」, 346~347쪽)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렇지만 작품 전체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범상한 장면이다. 우리는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박고 우는 누나가 결국은 어머니의 일생을 반복하리라는 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아마도 농촌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던 어머니의 길보다도 도시 빈민으로서의 누나의 길이 더욱 가파를지도 모른다. 염소의 일생에 곁들인 여자의 일생은 원한이나 전투적 증오가 없는 '살기란 힘든 거란다'라는 예사로운 발언으로 말미암아 더할 나위 없는 위엄과 애상과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 족히 한 편의 중·장편이 될 만한 생활정보량을 가지고 있는 소재를 작가는 길지 않은 단편으로 집약해 놓고 있다. 늘어놓기보다 집약적 완결이 몇 갑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작가적 미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에서 미덕은 이렇게 재능과 포개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자연과 사회의 폭력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가난의 실체와 의미와 처참함이 이렇듯 직접적이고도 간결히 처리되어 있는 사례는 아마 달리 없을 것이다.

 

김승옥은 어디까지나 단편소설의 명수이며 앞으로 획기적인 개인사적 변동이 없는 한 뛰어난 단편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장르의 성격상 단편소설은 이른바 사회적 총체성을 겨냥하지 못한다. 삶의 어떤 시간을 포착하여 인지의 충격을 전해 주는 것이 단편소설의 고전들이 이룩한 성취였다. 김승옥은 결코 한 시대 세대 슈측의 복사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장편이건 단편이건 소설은 사회현실에 대한 근친성으로 말미암아 세태 습속 재현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 사이에서 구차하고 협착하게 정의된 '리얼리즘'은 김승옥 소설을 포용하지 못했던 것으로생각된다. 그렇지만 돌이켜보아 거대변화가 시동되기 시작한 저 1960년대라는 가버린 연대에 대하여 김승옥 단편만큼 깊이 참여하고 재현한 예는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거대변화의 하나인 도시화란 국면에 대한 참여요, 그 문학적 재현이긴 하다. 그러나 단편이 어떻게 모든 것을 망라할 수 있을 것인가. 도회와 시골과 병영 막사와 빈민굴을 어떻게 망라할 수 있을 것인가, 도시화의 초기 징후에 대한 가장 날카롭고 섬세한 인상주의적 포착과 함께 인간의 내면도 사상(捨象)하여 않으면서 독자적인 문체적 성취에 이른 김승옥 단편은 우리 소설사의 가장 눈부신 책장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를 넘어서지 않고 새로운 문학을 얘기하는 것은 어렵게 되어 있고 새 작가들이 한 번은 그 앞에서 성찰의 계기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승옥의 등장 이후 섬세함과 투박함의 기준은 그 눈금이 한결 세밀해졌다. 이 눈금의 세분화 추세가 결국은 발전이요, 성장인 것이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