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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 「벌레 이야기」 이청준 (2019.12.05)

푸레택 2019. 12. 5. 17:43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53) 눈길》 (1995, 동아출판사)에 실려있는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읽었다. 오래 전 이청준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감명깊게 읽었다. 오늘 읽은 『벌레 이야기』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다.

■ 벌레 이야기 / 이청준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어쩌면 행여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과 녀석에게 마지막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지 놈을 다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그 어미로서의 강인한 의지와 기원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해 5월 초 어느 날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각이 훨씬 지나도록 귀가를 안 했다. 달포 전에 갓 국민학교 4학년을 올라간 녀석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다시 동네 상가에 있는 주산학원을 나가야 했다. 우리가 부러 시킨 일이 아니라 녀석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곳이었다. 다리 한쪽이 불편한 때문이었을까. 제 어미 나이 마흔 가까이에 얻어난 녀석이 어릴 적부터 성미가 남달리 유순했다. 유순한 정도를 지나 내숭스러워 보일 만큼 나약하고 조용했다. 어려서부터 통 집 밖엘 나가 노는 일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도 어울리려 하질 않았다. 집 안에서만 혼자 하얗게 자라 갔다. 혼자서 무슨 특별한 놀이를 탐하는 일도 없었다. 무슨 일에도 취미를 못 붙이고 애어른처럼 그저 방 안에만 틀어박혀 적막스런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녀석의 몸짓이나 말투까지도 그렇게 조용조용 조심스럽기만 하였다.

국민학교엘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의 불구에 이력이 붙은 우리 부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녀석의 담임반 선생님까지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살폈지만, 녀석에겐 전혀 별다른 변화의 기색이 나타나질 않았다. 친구를 가까이 사귀는 일이나, 어떤 학과목에 특별히 취미를 붙여 가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특별히 취미는 없어하면서도 학과목 성적만은 또 전체적으로 고루 상급에 속할 만큼 제 할 일은 제대로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봄, 녀석이 4학년을 올라가고 나서였다. 이때까진 전혀 어떤 특별활동 시간에도 관심이 보이지 않아 오던 녀석이 이번엔 누가 권하질 않았는데도 제물에 새로 생긴 주산반엘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 어떻게 적성이 맞았던지 나름대론 패나 열성을 쏟는 눈치였다. 학교를 파하고 오면 집에서까지 늘상 주판을 끼고 살더니, 나중엔 가까운 상가거리의 주산학원 수강등록을 시켜 달랬다. 그리고 한 두어 달 학교에서 돌아오면 점심이나 겨우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서 그 길로 곧장 다시 학원을 쫓아가곤 하였다.

우리는 어쨌거나 다행이라 싶었다. 아이가 주산이 뛰어나고 아니고는 문제 바깥이었다. 소질의 여부도 따질 바가 아니었다. 녀석이 거기나마 취미를 붙여 다니는 것이 더없이 다행스럽고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전에 없이 녀석의 귀가가 늦고 있었다. 학원 갈 시각이 지났는데도 녀석이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약국에서 함께 일을 보던 아내가 안채를 몇 번 들어갔다 왔지만 그쪽으로도 아무 연락이 없더라 하였다. 늦게 돌아온다는 전화연락 같은 것도 없었다. 하긴 학원 가는 시간을 미루고 어디서 다른 일에 어울려 놀고 있을 아이도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아내의 배신감은 너무도 분명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절망과 파탄은 거기서도 아직 다한 것이 아니었다. 더 절망스런 아내의 파탄은, 그렇다고 그녀가 다시 인간의 복수심을 선택해 버릴 수도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물론 김집사의 강압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는 이미 그 스스로 용서를 결심하고 그를 찾아갔을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은 스스로도 믿음과 사랑의 계율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참뜻과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내가 그것을 버리는 것은 아내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 속의 '인간'을 부인하고 주님의 '구원'만을 기구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기엔 주님의 뜻이 너무도 먼 곳에 있었고 더욱이 그녀에겐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아내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김집사 앞에서 거기까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말을 한들 누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 그 허점과 한계를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가 없는 한 김집사로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내가 지금까지 내게 입을 다물어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무서운 고통과 절망이 입조차 열 수가 없게 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그 아내의 절망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아이를 잃은 아비가 아니더라도 다만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그녀의 아픔만은 함께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기로서니 그것이 그 가엾은 아내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으라, 그리고 그 절망스런 고통을 덜어 주고 아내를 파탄에서 구해 내기 위해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었으랴. 나는 그런 아내를 알고서도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질없이 아내를 맴돌면서 안타깝게 마음만 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차피 아내가 넘어서야 할 삶과 믿음의 고갯마루라던 김집사의 조언을 믿고 있는 때문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이 아내 스스로가 이기고 일어서야 할 자기 몫의 고통이라 여긴 때문이었을까 아니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김집사는 아직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도 아내를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섭리와 완벽한 사랑을 설교했다. 그리고 아내의 신앙심의 회복과 주님의 종으로서의 용기를 부추졌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게는 다른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내게는 다만 그 아내의 절망과 아픔을 안타까워하면서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 부질없는 소리들로 그녀의 심사만 어지럽혀 댔을 뿐 다른 위로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과연 마지막 절망 속에 자신을 힘없이 내맡겨 버리고 있었다. 김집사나 나의 어떤 소리도 도대체 의식에 닿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다시 입을 까맣게 다물어 버린 아내는 물 한 모금을 제대로 마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아, 아내의 그 절망과 고통의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차마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아내는 결국 그러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이고 섭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여 절망의 뿌리를 끊어 버린 것이었다. 그 사람 김도섭의 사형 집행 소식이 아내를 거기까지 자극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고 2월로 접어들어 김도섭은 마침내 교수형이 집행됐고 그 소식이 라디오에까지 방송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김도섭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몇 마디는 내게까지 어떤 새삼스런 배신감으로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제 육신의 일부는 이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맡기고 가니까요. 형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었다.

-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 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회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고 살아 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 주고 위로해 주십사고...

그간에도 거기 늘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내 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지내던 아내가 이날따라 하필이면 라디오를 켜놓고 그 몹쓸 뉴스를 모두 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지난 2월 5일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틀 뒤, 아내도 끝내는 더 견디지를 못하고 제 손으로 혼자 약을 마셔 버린 것이었다. 자기를 끝까지 돌보아 온 김집사에게는 물론 내게마저 유서 한 조각 남기지 않은 채였다. (『비화밀교』 나남, 1990)

☆ '벌레이야기':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

☆ 이청준(李淸俊) 소설가

▲ 1939년 전남 장흥군에서 출생

▲ 1954년 장흥 대덕동국민학교 졸업

▲ 1957년 광주서중학교졸업

▲ 1960년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 1965년 단편 '퇴원'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

▲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 졸업

▲ 1967년 '병신과머저리'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 수상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