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소설읽기]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하창수 (2019.11.09)

●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1 겨울 병사 전방(前方)의 가을은 언제나 온몸으로 저물었다. 적철색(赤鐵色)의 쇳녹 같은 나뭇잎 위로 겁탈하듯 서리가 내렸을 때, 나는 다만 그것을 처음 보았다는 것 때문에 무서위했었다. 그리곤 겨울이었다. 예고도 없이 잠결 위로 퍼부어지던 비상 ..

[소설읽기] 「꿈꾸는 짐승」, 「슈퍼스타를 위하여」,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이창동 (2019.11.09)

● 꿈꾸는 짐승 / 이창동 노새는 지금 없다. 이제 다시 그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생각이 바지 단추를 푸는 대기의 손을 부르르 떨게 하고, 단추를 채 끄르기도 전에 몇 방울의 오줌을 찔끔거리게 했다. 개천 건너편 쭉쭉바 공장의 드높은 굴뚝을 마주 보고 오줌을 갈기면서 대..

[소설읽기] 「빈집」, 「용천뱅이」, 「녹천엔 똥이 많다」 이창동 (2019.11.09)

● 빈집 / 이창동 상수는 그날 저녁 절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집 앞 골목에서 방범대원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연행되었는데, 그곳에서 수갑이 채워져 다시 경찰서로 넘겨졌다. 사흘째 잠을 자지 못했다는 두 눈에 핏발이 선 형사가 그를 취조했다. 그는 상수의 이름과 나이, 주..

[소설읽기] 「소지」, 「친기」, 「눈 오는 날」 이창동 (2019.11.08)

● 소지(燒紙) / 이창동 "할머니, 할머니. 큰일났어." 타는 듯이 붉은 갑사(甲紗) 옷감에 오래도록 눈을 박고 있어서인가, 바느질감을 손에서 놓고 고개를 든 그녀는 눈앞이 휑하게 비워지는 듯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우리 아파트 앞에 수상한 사람이 와 있어. 수상한 사..

[명시감상] 호박 김용락, 쑥갓꽃 김명기, 말하지 않은 슬픔이 정현종 (2019.09.12)

● 호박 / 김용락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

[명시감상] 칸나의 뜰 노창재, 으름넝쿨꽃 구재기, 기차 소리 듣고 싶다 김용락 (2019.09.12)

● 칸나의 뜰 / 노창재 대문도 없이 삭정이 흔적마저 허물진 토담을 지날 땐 그냥 빈집인 줄 알았지요. 웅웅거리며 눈앞을 스치는 잠자리에 놀라 안을 살풋 들여다보았잖아요. 맨드라미 봉숭아 과꽃 접시꽃들이 우물 귀퉁이만 살짝 내어놓은 채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널브러졌겠지..

[명시감상] 9월 오세영,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코스모스 꽃밭 도종환, 9월에 부르는 노래 최영희 (2019.08.30)

● 9월 /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는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명시감상] 시집 《연리근》 정구조 시인, 관악고 잠신고 광양고 교감 (2019.08.27)

● 서시序詩 - 연리근(連理根) / 정구조 무에 그리 보고 싶고 무에 그리 절절하여 밤마다 손 내밀어 한 몸이 되었을까? 오가는 젊은 가슴에 열어 보인 그 속내 ● 해바라기를 보며 / 정구조 도로 표지판 옆 틈새를 비집고 솟아오른 너를 우연히 보았다 하필이면 척박하다고 말하기에도 미안..

[명시감상] 성민희 시인의 시집 '미리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해 본다' (2019.08.26)

■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겨울 보리, 그 건강한 생명력 / 성민희 (시인) 사랑하는 아이야 나를 꼭꼭 밟아다오 싫고 귀찮아도 모른 척 지나가지 말고 제발 나를 밟아다오 밟으면 밟을수록 더 힘차게 일어나는 싹 아프면 아플수록 더욱 푸르게 꿈틀거리는 생명 사랑하는 아이야 춥다고 웅크리고 있지 말고 밖으로 뛰어나와 내 몸을 꼭꼭 밟아다오 어서 나를 밟아다오 - 졸시,「 겨울보리」전문 어느 겨울에 남도에 간 적이 있다. 서울에서 나서 한 번도 서울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남쪽지방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서울에서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볼 수 있었고 겨울은 정말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계절이었는데, 남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밭에는 시금치, 홍당무가 파릇파릇 심겨져 있었고, 여기저기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