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시집 《연리근》 정구조 시인, 관악고 잠신고 광양고 교감 (2019.08.27)

푸레택 2019. 8. 27. 12:29

 

 

 

 

 

 

● 서시序詩 - 연리근(連理根) / 정구조

 

무에 그리 보고 싶고

무에 그리 절절하여

 

밤마다 손 내밀어

한 몸이 되었을까?

 

오가는 젊은 가슴에

열어 보인 그 속내

 

● 해바라기를 보며 / 정구조

 

도로 표지판 옆

틈새를 비집고 솟아오른

너를 우연히 보았다

 

하필이면 척박하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한

콘크리트 블록 틈새에 뿌리를 내려

낮엔 조마조마 가슴 태우고

밤에만 자랐겠구나

 

한 해 살다 가면서도

한결같은 기도

노오란 꽃 한 송이 피우려고

그 고독 꾹 참고

그 아픔 꾹꾹 참고

그 슬픔 꾹꾹꾹 참고

 

● 월요일 목요일마다 -팔당 텃밭·3 / 정구조

 

수학을 가르쳤던 이가

물리를 가르쳤던 이가

월요일· 목요일마다

예봉산 자락 텃밭에 모여

 

고추 여덟 이랑

무, 배추, 상추 네 이랑

오이, 토마토 두 이랑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내민 삶 보듬고

 

화학을 가르쳤던 이가

역사를 가르쳤던 이가

월요일 · 목요일마다

예봉산 자락 텃밭에 모여

 

다茶 한잔 나누며

뻐꾸기 노래 너머로

햇살을 향해

조로콤 핀 꽃들을 찬미하고

 

● 가을 일기 / 정구조

 

호젓한 오솔길을 나와

지나온 산을 뒤돌아보았다

 

산은

안토시아닌과 카르티노이드*로

가득하다

 

산자락 밭에서 철퍼덕 앉아

가을 햇볕 속에 콩 터는

내외가 닮았다

 

부부의 장단 소리

콩깍지 튀는 소리

갈참나무 잎 뒹구는 소리

산새들 깃 스치는 소리

산골 물 흐르는 소리

 

오래된 기억들이 지나는

늦가을 해거름 길가

쑥부쟁이 향기롭다

 

* 안토시아닌(Anthocyanin) : 빨강 색소

* 카르티노이드(Carotinoid) : 노란 색소

 

● 첫눈을 맞으며 / 정구조

 

첫눈을 맞으며

학교담장 길을 호올로 걸었습니다

하얀 눈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소복이 쌓입니다

쉬는 시간인데도 조용합니다

눈 맞으면 해롭다고 배워서인가?

요즈음 아이들

제 때[時節]도 모르는 채

바빠서 힘들겠습니다

 

함박눈에는 고향이 있습니다

마을 아이들 소리 들려오고

밭두렁에 꿩 날아오고

어느 땐가 순백純白의 마을로 찾아든

노루의 눈망울이여!

 

● 그 자리 / 정구조

 

긴 여정을 마친 어머님은

평온하셨습니다

 

그리던 고향 땅 산기슭에서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엔

흰 눈이 내렸습니다

 

창 너머 보시던 발코니의 의자

혼자서 신수패를 떼시던 화투장

지팡이 하나, 비녀 두 개

똘똘 말아 있는 만원 지폐들…

 

아, 그 자리

 

● 쌀 한 톨 / 정구조

 

'고향이 따로 없다. 배불리 먹으면 고향인 거'

누이 집 떠나던 날 차마 물을 수도 없는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서러운 쌀 남아 있다

 

통일벼 녹색혁명으로 보릿고개 사라지자

시장 개방 회오리에 외래 식품 몰려오고

우리 쌀 신토불이여, 지키기에 지친 땅을

 

이제 여기 농촌 빈터로 돌아온 젊은이들

풋풋한 생각으로 으뜸 작물 길러낸다.

이제야 이정표 보인 듯, 흙과 함께 서로 돕고

 

● 고향 길에서 / 정구조

 

해는 중천中天에 있건만

빈 두렁길 지나는 바람이 차다

 

상덕尙德 마을 어귀

장승을 곁에 하고

한 노인이 앉아 있다

 

- 안녕하셨습니까? 저 구조求祚입니다

- 누구시라?

- 다라골 댁 둘째 아들 구조입니다

- 아 구조라, 반가우이. 고맙네, 고맙네

- 어디 외출하시는 중이십니까?

- 아 아닐세, 보건소에서 진료 받고 오는 길이라

- 어디가 많이 불편하신가요?

- 허리도 쑤시고 아픈 데도 많아. 자당님은?

- 네, 잘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차에 타시죠

- 아 아닐세, 천천히 가려네, 먼저 가시게

- 그럼, 또 뵙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 어른의 목소리

오랜만에 들은 듯

천하대장군도 지하여장군도

흐뭇한 표정이다

 

●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티베트 여행 / 정구조

 

티베트 고원이 손짓하여 나는 여기에 왔다.

 

라싸 포탈라궁 앞이나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탄들을 보았다. 땅에 납작이 엎드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교만을 떨쳐 버리는 믿음이었다. 타르쵸*가 날리는 캄바라 고개 마루에서 말 한 마리와 함께 있는 한 노인을 보았다. 사진 촬영할 길손을 기다리건만 찬바람만 지나고 있었다. 얌드록 호수가 아이들이 해맑은 미소로 맞아주었다. 옥빛 호수와 파란 하늘을 닮은 눈빛을 보였다. 2천리 길, 우정공로*에서 스친 사람들, 시린 고원에서 한번 뿐인 만남인데도 바람 소리에 숨 고르며 따뜻한 시선을 나누었다. 롱북사원* 게스트하우스는 초승달 아래 있었다. 나는 10위엔 국수로 추위를 참고 이 밤, 하늘에선 별이 내려오고...

 

베이스캠프였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초모랑마*가 다가오고 이젠

바람소리 외치는 타르쵸도 정겹다.

티베트! 옴마니반메흠 닝제보듭.(너무 아름다워요.)

 

* 타르쵸 : 물·불·흙·바람하늘을 상징하며 만국기 매달 듯 줄에 매달아 고개 등, 의미 있는 곳에 걸어 놓은 것

* 우정공로 : 라싸에서 카트만두까지 이어지는 도로(1000km)

* 롱북사원 :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4950m)

* 초모랑마 : 에베레스트의 중국 명칭

 

● Where are you from? - 티베트 여행 / 정구조

 

도미토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호올로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

5인용 도미토리에 들어서자

누워 있던 두 아가씨가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이고

30W 전구 한 개의 불빛이

빨랫줄에 걸려있는 속옷을 비추고 있다.

따끈한 차를 권하며 내미는 손이

따뜻하고 부드럽다. 좋을 때다.

목이 늘씬한 아가씨에서는 장미 내음이 나고

눈이 깊고 푸른 아가씨에서는 튜립 내음이 났다.

"웨어-아-유-후롬?” 묻길래

한글을 본 적이 있느냐?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삼성, 현대, 월드컵 4강 하자

"사우스-코리아" 하고

나이 든 나를 보며 기뻐한다.

 

또, 미국인 내외가 들어오고

우리들 서로 잇는 이야기가

방의 훈기를 불러 일으켜 주는 것 같았다.

라싸의 깊은 밤

창틈 사이에 눌려 파고드는 바람 소리에

나는 유년의 가슴에 고인 소리를 듣는다.

아지메들 마주앉아 다딤이질 하는 소리

누나들 헛간에서 디딜방아 찧는 소리…

 

● 룸비니 정원 - 네팔 여행 / 정구조

 

부처님 태어난 곳

룸비니 정원*에선 '평화'를 보았습니다.

 

'탐욕을 내려놓으라'

나무, 꽃과 풀이 어우러져 있는 들녘을 거닐며

부처님 자비의 설법說法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고요 속엔 절규도 중오도 없으며

바람은 시름이나 걱정도 날려주었습니다.

햇볕이 유난히 밝았습니다.

마야데비사원, 아소카 석주*, 마야데비

푸스카르니(연못)*를 둘러보고

보리수 아래서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날리라하 꽃' 보며

차 한 잔 들었습니다.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불꽃은 계속 타고…

 

* 룸비니 정원 : 룸비니 개발계획으로 넓이 8km2

* 아소카 석주 : BC 249년 아소카왕이 이 성지를 순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돌기둥에는 '이곳 룸비니는 성인 붓다께서 탄생한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 푸스카르니(연못) : 마야 데비여왕이 붓다를 출산

하기 직전 목욕을 하였던 곳

 

● 파하르간지 -인도 여행 / 정구조

 

뉴델리 역 앞은 사람, 소, 릭샤, 자동차로 혼잡하였습니다. 그래도 큰 소리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역 2층에 있는 외국인 여행자 접수창구로 올라가려는데 웬 청년들이 가로막고 차표가 없으니 밖의 여행사로 가라고 합니다. 다른 계단을 이용하여 막무가내로 올라가 기차표를 시니어 할인받아 구입했습니다. 파하르간지*의 첫 인상은 언뜻 보기에 삶의 신산辛酸 처절하여 눈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속에도 여유와 웃음이 있습니다.

 

* 파하르간지 : 뉴델리 역 바로 앞에 있는 배낭여행자의 집결지

 

● 앙코르 유적 - 캄보디아 여행 / 정구조

 

이곳에 두 번 왔다.

 

앙코르 유적을 보고 누구는 이렇게 불가사의하고 경이로운 곳이라면 자기 여생을 이곳에서 마쳐도 한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누구는 마음의 그릇이 작아 감동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으며 그 옛날을 만나는 새로움에 매료된다고 하고, 누구는 저 웅대한 석물은 부역꾼들의 피와 땀과 남에게 짓밟힌 긴 세월의 수치스런 증언자라 했고, 누구는 천년을 묵은 돌이여서 크메르 선조들이 억겹을 내대보고 찬란히 세웠건만 언젠가는 다시 돌로 돌아간다고 했고, 누구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유적을 휘감고 올라가는 안타까운 모습에서 문명의 초라함과 자연의 위대함이 대비돼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이번에도 짧은 만남이었다.

 

● 아침시장 -라오스 여행 / 정구조

 

왕위앙 강가마을 한 귀퉁이

새벽 일찍 아침에만 열린다.

 

직접 생산한 야채와 과일

닭, 생선, 산새, 다람쥐, 말린 박쥐...

별스런 먹거리 들고 모여든다.

물물교환 하는 모습도 정겨움이 넘친다.

 

나는 아침 식사로 닭죽을 사며 무심결에

'조금만' 하고 우리말이 나왔다.

곁에서 쪼그려 앉아 닭죽 먹던 한 내외가

고개 들어 쳐다보며 반가워한다.

오랜만에 우리나라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 강가 아이들 -라오스 여행 / 정구조

 

강 언덕배기 잔디밭, 작은 집 한 채 학교

쉬는 시간, 강에 달려가 신나게 헤엄치고

바위에 올라서서 햇볕에 젖은 옷을 말린다.

선생님 뺑 둘러앉아 공부하는

예닐곱 맑은 눈동자들

운동장에선 소도 머리 숙여

풀 뜯는 학습을 함께 하고.

 

즐겁게 공부하고

강가에서 뛰노는 아이들.

 

● 천국으로 가는 계단 - 필리핀 여행 / 정구조

 

산을 넘고 넘어 깊숙이 숨어 있는

'세계 8대 불가사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

불리는 바타드 라이스테라스*에 왔습니다.

 

삼면은 온통 하늘로 치솟은 계단식 논입니다.

군데군데 있는 집들이 평화스럽게 보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대물려 받은 땅에 안기어

이어져 온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가파른 논둑 계단을 불안을 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무척 멀리 올랐습니다.

 

다락논에는 유년의 흔적이 있어

논두렁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

여기까지 따라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이곳에 머무르면 눈빛이 맑아질 것 같습니다.

 

* 바타드(Batad) 라이스 테라스: 약 2000년 전에 아푸가오 족이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으로 필리핀 북쪽 '바나우에'에 있다.

 

● 엠파이어스테이트 전망대에서 -미국 여행 / 정구조

 

지순한 얼굴로 하얗게 우뚝 서 있다.

그대는 아픈 사건(9.11)으로

맨해튼에서 다시 그 높이를 찾았구나.

오월 하순인데도 기온이 내려

겨울 잠바를 빌려 입은 나는

저 아래 넓은 센트럴 초록 숲을 보며

선각자의 혜안慧眼을 생각했다.

 

여기, 엠파이어스테이트 전망대

밝은 햇살에 서 있는 아내를 힐끗 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가 주름이 띄었다.

 

/ 정구조 詩集 《연리근 連理根》 (현대시단 시선 59) 中에서

* 詩人 정구조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 초년 교사 시절인 1987년 영등포구 관악고에서 처음 뵈었고 1996년에는 송파구 잠신고에서 또 뵈었다. 특히 잠신고 근무 시절, 정구조 교감 선생님께서 병가를 내신 어느 과학 선생님의 보강 수업을 2주간 맡아 직접 수업 준비물까지 만드시고 교과서 저자 직강 수업까지 하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서는 대전고, 서울대 화학교육학과를 졸업하셨다. 화학을 전공하신 선생님께서 이렇듯 아름다운 詩語로 멋진 시를 쓰시다니 그저 놀랍기만하다. 인품 또한 온화하시고 훌륭하시니 존경의 마음 절로 나온다. / 2019.08.27 김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