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칸나의 뜰 노창재, 으름넝쿨꽃 구재기, 기차 소리 듣고 싶다 김용락 (2019.09.12)

푸레택 2019. 9. 12. 16:55

 

 

 

 

 

● 칸나의 뜰 / 노창재

 

대문도 없이 삭정이 흔적마저 허물진 토담을 지날 땐 그냥 빈집인 줄 알았지요. 웅웅거리며 눈앞을 스치는 잠자리에 놀라 안을 살풋 들여다보았잖아요.

 

맨드라미 봉숭아 과꽃 접시꽃들이 우물 귀퉁이만 살짝 내어놓은 채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널브러졌겠지요. 빈집 지키느라 저들끼리 저리도 무성했는지 허공에 잠자리 씨 한 가득 뿌려놓고 접시꽃 높이만큼 키를 키웠잖아요. 푸른 물결에 출렁 빈집이 입은 또 얼마나 크게 벌렸는지요.

 

후다닥 벌거숭이가 되어 첨벙 뛰어들고 싶지 않았겠어요.

 

아, 그런데 저기 저 이국의 소녀 칸나,

우물가 이파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얀 치맛자락

 

황구 한 마리 머리를 쓸어가며 조용조용 고구마 순을 다듬고 계신 팔순의 아가씨

 

● 으름넝쿨꽃 / 구재기

 

이월 스무 아흐렛날

면사무소 호적계에 들러서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붉은 줄이 있지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들의 붉은 줄이 있지

다섯 누이들이 시집가서 남긴 붉은 줄이 있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호적의 붉은 줄 속으로

용하게 자라서 담자색으로 피어나는 으름넝쿨꽃

지금은 어머니와 두 형들의 혼을 모아

쭉쭉 뻗어나가고

시집간 다섯 누이의 웃음 속에서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는 으름넝쿨꽃

오히려 칭칭 탱자나무를 감고 뻗쳐나가는

담자색 으름넝쿨꽃

 

●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 김용락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미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 날 바로 그날 밤

양철지붕을 쉬지 않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 2019.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