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9월 오세영,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코스모스 꽃밭 도종환, 9월에 부르는 노래 최영희 (2019.08.30)

푸레택 2019. 8. 30. 10:32

 

 

 

 

 

 

 

 

 

 

 

● 9월 /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는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 코스모스 꽃밭 / 도종환

 

코스모스 꽃길을 걸으면 나는

코스모스꽃보다 더 설레인다

연분홍 꽃잎 빛깔로 얼굴 붉어진

열일곱짜리 제자들과 팔짱을 끼고

출렁이며 꽃밭에 들어서던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 몇 살의

젊은 국어선생이던 내가 떠오른다​

 

코스모스 꽃길에 들어서면

나는 코스모스꽃보다 더 엷은 꽃이 된다

순박한 빛깔 꾸미지 않은 수수한 향기의

이런 꽃들이 가득가득 피어 있는

교실에 들어서면

나는 다시 스물 몇 살의 선생이 되어

꽃밭에 서 있는 착각을 하곤 한다

 

큰길 가엔 코스모스 사라진 지 오래여서 그런지

설렘을 잊은 지 오래인 삶 때문에 그런지

 

● 9월 / 반기룡

 

오동나무 뻔질나게

포옹하던 매미도 갔다

 

윙윙거리던 모기도

목청이 낮아졌고

곰팡이 꽃도 흔적이 드물다

 

어느새 반소매가

긴 팔 셔츠로 둔갑했고

샤워장에도 온수가

그리워지는 때가 되었다

 

푸른 풀잎이

황톳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메뚜기도 한철이라

뜨겁던 여름 구가하던 보신탕집 문지방도

먼지가 조금씩 쌓인다

 

플라타너스 그늘이 구멍 뚫린 채

하늘이 푸르디푸르게 보인다

 

짝짓기에 여념 없는 고추잠자리

바지랑대가 마구 흔들린다

 

● 9월에 부르는 노래/ 최영희

 

꽃잎 진 장미넝쿨 아래

빛 바랜 빨간 우체통

누군가의 소식이 그리워진다

 

망초꽃 여름내 바람에 일던

굽이진 저 길을 돌아가면

그리운 그 사람 있을까

 

9월이 오기 전 떠난 사람아

 

지난해 함께 했던

우리들의 잊혀져 가는

그리움의 시간처럼

타오르던 낙엽 타는 냄새가

올 가을 또한 그립지 않은가

 

가을 오기 전

9월,

9월에 그리운 사람아

 

● 인생 오십 줄에 서서 / 김선호

 

헝클어진 머리 정리하고

어릴 적 뛰놀던 언덕에 서서

무지개 바라보던 그 산자락

어딘가 둘러보니

흔들흔들 안개 속에 묻힌다

 

잠시 이마 위로 비치던 봉우리

그새 아련하게 멀어지고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숲

구름이 그림자인양 잠기었다

 

산꼭대기 어디인가 나의 운명은

여전히 굽이굽이 비탈길인데

바위틈에서 몰래 피어난 꽃 한 송이는

나를 위로하듯 향기롭다

 

산 그림자 사라지는 그곳에는

나만이 간직한 이야기들 어른어른

무지개 어린 그 산자락 올려다보며

그렁그렁 젖은 눈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는 듯

나 살던 고향을 그리워하는 듯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