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성민희 시인의 시집 '미리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해 본다' (2019.08.26)

푸레택 2019. 8. 26. 20:52

■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겨울 보리, 그 건강한 생명력 / 성민희 (시인)

 

사랑하는 아이야

나를 꼭꼭 밟아다오

싫고 귀찮아도

모른 척 지나가지 말고

제발 나를 밟아다오

밟으면 밟을수록

더 힘차게 일어나는 싹

아프면 아플수록

더욱 푸르게 꿈틀거리는 생명

사랑하는 아이야

춥다고 웅크리고 있지 말고

밖으로 뛰어나와

내 몸을 꼭꼭 밟아다오

어서 나를 밟아다오

 

- 졸시,「 겨울보리」전문

 

어느 겨울에 남도에 간 적이 있다. 서울에서 나서 한 번도 서울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남쪽지방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서울에서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볼 수 있었고 겨울은 정말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계절이었는데, 남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밭에는 시금치, 홍당무가 파릇파릇 심겨져 있었고, 여기저기 배추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강진에 가니 어느 시골집 푸른 탱자나무 울타리엔 노란 탱자가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고, 동백꽃이 빨갛게 피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 처음 간 남도여행에서 남도의 겨울은 이렇게 생명력으로 가득하구나 하고 신기해하고 놀라워했었다.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한 시가 바로「겨울보리」이다.

 

농부들은 가을에 보리를 심는다. 그런데 한겨울, 보리가 싹이 나올 무렵 보리를 밞아주면 보리는 더 깊이 뿌리 내리고 싹은 강해져서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다. 평소 보리의 싹에선 100알의 알곡이 맺히지만 보리밟기를 해주면 4배나 많은 알곡이 맺힌다고 한다. 이런 자연의 이치를 알기에 현명한 농부들은 겨울철에 반드시 보리밟기를 한다. 방학 때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주로 이 보리밟기에 동원되곤 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보리를 화자로 설정하여 보리가 갖고 있는 건강한 생명력을 아이들이라고 하는 대상과 연결시켜 보았다. 겨울은 춥다고 움츠리기 쉬운 비활동적인 계절이다. 이 시에서 보리는 아이에게 밖으로 나와 추운 겨울을 씩씩하게 이겨내라고, 그리고 자기 몸을 기꺼이 밟아달라고 말한다. 보리가 밟아야 잘 자라듯이 생명이란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 속에서 더 충실하게 열매 맺는 것임을, 진정한 생명이란 억압과 아픔 속에서 아름답게 꽃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 나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형제들에게 치이면서 존재감 없이 자라난 일, 중3때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일, 부모님의 가정불화, 10남매나 되는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게 된 일, 그리고 5년 전의 건강문제,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난 더 내적으로 더 강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삼 주 전에 샤워를 하는데 오른쪽 가슴에 멍울이 잡혔다. 혹시나 없어질까 하여 며칠 기다리다가 병원에 가서 x-ray, 초음파, 조직검사를 하였다.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하면서도 의사선생님의 조직검사를 권하며 자못 심각해 보이는 얼굴 표정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5월 12일 검사결과가 나왔다. 악성종양이었다. 에스트로겐 과다로 5년 전 호르몬제를 복용하며 치료를 받았었는데 이 에스트로겐이 내 가슴에 다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일순간 내 인생의 행복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교사라는 좋은 직업과 성실하고 가정적인 남편, 그리고 예쁘게 자라고 있는 두 딸들, 정말 무엇 하나 부럽지 않은 나였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 년 전에 첫 시집도 낼 수 있었고...‘ 우리시회’라는 좋은 모임도 만나서 뭔가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내게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A병원 권위 있는 의사 선생님에게 연결되어 치료의 스케줄을 받고, 빠르게 학교일을 정리했다. 수업 진도를 마무리 짓고, 새로 온 선생님에게 인계해 주고, 학생들에게 나의 신상에 일어난 일들을 알리고 작별인사를 했다.

 

공교롭게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이 스승의 날인 15일이었다. 학생들은 급작스런 이별을 슬퍼하며 롤링페이퍼를 써서 나를 위로해 주고 눈물까지 흘려주었다. 나는 곧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29년간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나, 내가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놀아도 되는 그런 처지가 된 것이다. 종양의 사이즈가 커서 8센티나 되고 의사 선생님은 2기말이라고 하시기에 좀 걱정이 되었지만 내가 내 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난 이 모든 것을 빠르게 받아들였고 하나님께 맡겨버렸다. 그러니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난 이번 사건을 내 인생의 하프타임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다. 일체의 일을 내려놓고 마음껏 쉼을 누리라고, 자신의 몸을 돌보며, 조용히 예배하며 영적인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휴가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쉬지 않을 걸 아셨기에 이런 카드를 쓰신 것이다. 비록 치료의 과정은 힘들겠지만 난 두렵지 않다. 순간순간 나를 붙들어주시고 승리를 주실 주님을 믿기에. 내게 있는 불순물을 제하고 쓰시기 위해, 내 인생의 아름다운 후반전을 위해 꼭 필요하기에 이런 시련을 주셨음을 난 알고 있다. 투병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이루실 일들이 기대가 된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장 1.2절)

 

쉽게 쉽게 사는데 길들여진 우리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는 고난과 작은 아픔들, 그것이 당장은 힘들더라도 나를 더 성숙시키고 내 인생에 충실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추운 겨울이 있고 눈보라가 몰아칠 때, 작은 아픔이 있을 때 그때가 오히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밟혀야 강해진다는 것을.

 

성민희 시인

* 1997년 계간《오늘의문학》으로 등단

* 시집『미리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해 본다』가 있음

* 현재 광남고등학교 재직

*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원

 

[시집] 《미리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해 본다》 - 성민희

 

● 폐업신고 / 성민희

 

보기 좋게 펜을 잃어버렸다 

잃은 것은 얻기 위함이라는데

책들로 빼곡한 서가를

아무리 뒤져도 습작노트는 보이질 않는다

살아 있음의 낯설음

생의 아름다운 반역에 난 종내 마음이 서운한 거다

서운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한 거다

새벽녘에 읽다 잠든 아픈 시의 한 구절

베낄 만한 원고지 한장 내겐 없구나

난 내가 부려야 할 말들을 잔기침 처럼 늘 흘리고 다닌다

별처럼 반짝이는 생각 없음에 절망한다

나의 말들은 어는 음침한 망각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지

도무지 발 디딜 틈도 없는 방,

영혼들은 없고 물건들로 이루어진 너절한 세상

난 한치 나갈 수가 없다

시의 나라에 발을 붙일 수가 없다

폐업신고를 해야 겠다

 

● 꽃을 보며 / 성민희

 

하늬바람처럼 너에게 가 닿고 싶다

내 몸을 조금 누이고

좁다란 바람의 길목에 서 있으면

세상은 온통 칠쭉꽃 흐드러지게 핀 꽃 대궐

일제히 들려오는 건 진홍빛 술렁임이 아니냐

바람의 유희에 떨고 있는 수줍은 꽃잎 속에

벙그는1) 또 하나의 세상이여

너에게로 성큼 다가가고 싶다

소리보다 빠르게 너에게 달려가고 싶다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 너의 심장에 머물고 싶다

멈출 수 없는 이 쓸쓸한 사랑을 너에게 보여주고

조용히 네 곁을 지켜온 이 함묵을 너에게 들려주고

너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네 안에서 봉오리를 여는 순결한 마음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다면

비록 더디지만 일생을 건 사랑으로

너에게 다가가고 싶다

가슴 속 시린 물길 하나를 안고 건너는 우리의 생生

그 막막함이며 쓸쓸함을

애잔한 몸짓으로 노래하고 싶다

1)벙그는 : '벌어지는' 의 옛말

 

● 강아지풀 / 성민희

 

오요요 오요요요 부르면

꼬리치며 내게로 달려올 듯하다

 

바람의 무심한 장난에도

힘없이 흔들리지만

동네아이들 널 함부로 꺾고

마구 잡아채 가지만

어느 날 비 개인 강둑에

수천 개의 꼬리로

푸들푸들 일어서는 강아지풀이여

 

사람을 좋아하는

늘 사람 편인 너는

잠든 누이의 콧속에 몰래 닿으려고

누군가의 목덜미를 살짝 간질이려고

오늘도 바람에 너울대는구나

 

● 두물머리에서 / 성민희

 

두물머리의 물처럼 흘렀으면 한다

비 오고 난 후의 넉넉한 물길처럼

자신을 넓히면서 잔잔히 흘렀으면 한다

 

원래 물은 두 줄기인데

어디서 아유러져 하나가 되었는지

서두르며 흐르던 물살이

두물머리에서는 왜 유유히 흐르는지

 

여유로우면서도 살갑게

그렇게 흘렀으면 한다

두물머리의 물처럼 흘렀으면 한다

 

● 갈대 / 성민희

 

난 이제 외롭지 않아

이대로 쓰러져도 외롭지 않아

내 이름 기억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저물녁 강가에 홀로 서 있어도

내 안타까운 손짓에

참새 한 마리 깃들지 않아도

어둠이 제 아무리 깊푸르고

계절의 황량함이 가슴 미어지게 해도

바람 따라 흔들리는 연약한 몸

흔들릴 대로 흔들리다가

쓰러져도 쓰러져도 서립지 않아

나 쓰러져 누운들 어떠리

물결치듯 조용히 밀려왔다가

질그릇처럼 부서진다 해도

결코 난 외롭지 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해도

 

● 비가(悲歌) / 성민희

 

오라버니 잠드신 무덤가에는

그 많은 슬픔인 양

여뀌 풀들이 촘촘히 자라고

산새들이 조롱조롱 노닐다 가네

평생 가슴에 맺힌 한

풀어 주려고

어린 누이들

포도주 방울방울 흩뿌리고 가네

바람처럼 떠돌다가

이슬처럼 스러진 외로운 넋

달래 주려고

눈물꽃 점점이 뿌리고 가네

우리 오라버니 잠드신 무덤가에는

겨울해도 잠잠히 비끼어 가고

덩그마니

잘 익은 노을 하나 걸리어 있네

 

● 가을 저녁에 / 성민희

 

누른빛 속의 마지막 푸른빛

막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곤한 잎들

고 귀여운 무희(舞姬)들의 하늘거림

고즈넉하고 잔잔한 저녁 햇살 속에

금빛으로 빛나는 잔디

그 무한대의 넉넉함과 여유로움

 

내가 이곳에 앉아

시름없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대는 내 곁에 있어도 좋다

한 마디 말은 없어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기댈 것을 찾는 이 쓸쓸한 저녁에

사람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이 저녁에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주어서 좋다

내 마음 속속들이 어루만져 주는

아침 노을 같고, 저녁 햇살 같은 그대여

그대 손이 내 손 안에 잠들어 있고

내가 그대의 고른 숨결을 느끼고 있는 동안은

이대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다

 

누른빛 속의 마지막 푸른빛

막 떨어져 내리는 조그만 잎사귀들

반딧불이가 숲을 가르며 반짝이는 빛으로

제 짝을 찾고 있는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저녁에

이곳에 앉아 난 생각해 본다

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우린 서로에게 누구인지

 

● 소백산에서 / 성민희

 

내가 산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내게 간혀 있는 것이다

 

내가 산에 온 것이 아니라

산이 출렁이며 내 안에 걸어 들어와

그 향기론 숨결로 나를 결박해 놓은 것이다

 

고분고분한 짐승처럼 난 항복한다

 

내가 사람인 것이 싫다

차라리 어여쁜 다람쥐거나

작은 풀벌레 되어

여기서 살 수 있다면

 

아, 숙맥인 나라도

날마다 산허리에서 잰 걸음으로

하늘을 향해 달리거나

내 친구인 산을

종일 촉촉한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다면

 

● 산으로 / 성민희

 

나는 산으로 가려네 머릿속에 나를 어지럽히는 온갖 상념, 지분거리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산으로 가려네 쓸쓸한 기억 털어 버리러 가네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잠시 날 아프게 했던 말들, 자신과 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방황했던 캄캄한 마음 돌무더기에 내려놓으러 나는 산으로 가려네

귀룽나무, 갈매나무, 오리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귀를 씻으며, 모로 누운 여인네 허리 같은 산줄기에 총총 오르면, 둔탁하게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가 팝페라 가수처럼 수선스레 나를 맞아주리 그러면 나의 마음은 태곳적 기쁨으로 충만해지리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희롱하는 바람, 잠시 눈감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온갖 만물들이 술렁임 소리도 들려오겠네 머리 위에 드리워진 하늘은 어제 본 하늘이 아니리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쪽빛에 가슴이 시려오고 아, 가슴 한 구석이 찡해오기도 하리

해거름녁이면 마음이 이상할 만치 차분해지고 쓸쓸해지고, 밤의 지독한 어둠은 차라리 맘을 편하게 하리 산 속 밤이 깊을수록 개밥바라기는 더욱 예쁘고 또렷이 빛을 발하리

나는 산으로 가려네. 나를 어지럽히는 온갖 상념, 쓸쓸한 기억 털어 버리러 자신과 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방황했던 캄캄한 마음 돌무더기에 내려놓으러 나를 버리고 내가 되기 위하여 나는 산으로 가려 하네

 

/ 성민희 詩集 <미리내 속에 웅크리고 앉자 생각해 본다>에서

☆ 성민희 시인: 前 상도중, 경동고, 자양고, 광남고 교사


* 교사 초년병 시절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한 上道中學校에서 시인 성민희 선생님과 함께 근무했다.(1982년) 30년 세월이 흐른 후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廣南高等學校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2010년) 이렇게 두 학교에서 성 선생님과 함께 근무했다. 성 선생님의 부군(夫君) 되시는 기호헌 선생님과는 上道中學校에서 함께 근무했고(1982~1984), 중랑구 상봉동에 있는 新峴高等學校에서 다시 만나 5년간 함께 근무했다.(2005년~2010년)

이렇듯 이들 夫婦 두 선생님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늘 실천하며 베풀고 나누며 살아가시는 두 부부 선생님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안타깝게도 성민희
선생님은 광남고에서 근무하실 때 뜻밖에 찾아온 질병으로 너무도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의 별이 되셨다. 지금도 그곳에서 그토록 좋아하시던 詩를 쓰시려나... 기 선생님과는 지금도 은퇴 모임에서 자주 만나 산행도 함께 하고 정담도 나누며 지내고 있다.

 / 2019.08.26 김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