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새나라 송(頌), 길, 금붕어, 바다와 나비 김기림 (2019.08.15)

푸레택 2019. 8. 15. 12:08

 

● 새나라 송(頌) / 김기림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어린 기사(技師)들 어서 자라나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연기를 올리자

김빠진 공장마다 동력을 보내서

그대와 나 온 백성이 새 나라 키워 가자

 

산신과 살기와 염병이 함께 사는 비석이 흔한 마을에

모터와 전기를 보내서 산신을 쫓고 마마를 몰아내자

기름 친 기계로 운명과 농장을 휘몰아 갈

희망과 자신과 힘을 보내자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

 

녹슬은 궤도에 우리들의 기관차 달리자

전쟁에 해어진 화차와 트럭에

벽돌을 싣자 세멘을 올리자

애매한 지배와 굴욕이 좀먹던 부락과 나루에

내 나라 굳은 터 다져 가자

 

1946.07

 

● 길 /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젓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 금붕어 / 김기림

 

금붕어는 어항 밖 大氣(대기)를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이라 생각한다

금붕어는 어느새 금빛 비늘을 입었다 빨간 꽃 이파리 같은

꼬랑지를 폈다 눈이 가락지처럼 삐어져 나왔다

이젠 금붕어의 엄마도 화장한 따님을 몰라 볼 게다

 

금붕어는 아침마다 말숙한 찬물을 뒤집어쓴다

떡가루를 흰 손을 천사의 날개라 생각한다

금붕어의 행복은 어항 속에 있으리라는

傳說(전설)과 같은 소문도 있다

 

금붕어는 유리벽에 부딪혀 머리를 부수는 일이 없다

얌전한 수염은 어느새 國境(국경)임을 느끼고는

아담하게 꼬리를 젓고 돌아선다

지느러미는 칼날의 흉내를 내서도 항아리를 끊는 일이 없다

 

아침에 책상 위에 옮겨 놓으면 창문으로 비스듬히

햇볕을 녹이는 붉은 바다를 흘겨본다

꿈이라 가르쳐진 그 바다는 넓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금붕어는 아롱진 거리를 지나 어항 밖 大氣(대기)를 건너서

支那海(지나해)의 寒流(한류)를 끊고 헤엄쳐 가고 싶다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고 싶다

沃度(옥도)빛 海草(해초)의 산림 속을 검푸른 비늘을 입고

鱌魚(상어)에게 쫓겨 다녀 보고도 싶다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 버려야 한다

 

排泄物(배설물)의 沈澱(침전)처럼 어항 밑에는

금붕어의 年齡(연령)만 쌓여 간다

금붕어는 오르려야 오를 수 없는 하늘보다도 더 먼 바다를

자꾸만 돌아가야만 할 故鄕(고향)이라 생각한다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현대시 100선, 바다와 나비 김기림 / 정끝별

 

청산(靑山)이라면 몰라도 바다는 나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비해 흰나비는 얼마나 작고 어리고 가냘픈가. 이 무구한 흰나비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알 수 없는 수심과 거센 물결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 흰나비에게 푸르게 펼쳐진 것은 청(靑)무우밭이고 그렇게 푸른 것은 꽃을 피워야 마땅하다. 흰나비가 삼월의 바다에서 청무우꽃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러나 짜디짠 바다에 흰나비의 날개만 절 뿐, 삼월이어도 바다가 푸르긴 해도 바다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나비의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만 비친다. 삼월의 바다, 어린 나비, 초생달은 모두 이른 것들이다. 시작인 것들이다.

 

허공을 나는 것들은 날개가 중요하고 땅을 걷는 것들은 허리가 중요하다. 헌데 '나비의 허리'라니! 공주의 아름다움은 춤에 있고 나비의 아름다움은 비상(飛翔)에 있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에서 돌아온 나비. 바다로의 비상에 실패하고 뭍으로 귀환한 '나비의 허리'는 상징적 의미가 깊다. 이제 흰나비는 청무우 꽃그늘을 노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짜디짠, 바다의 깊이와 파도의 흔들림을 맛본, 허리가 실한 나비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기 마련이다. 새롭고 먼 곳을 향해 비상하다 날개가 절어본 적이 있기에, 흰나비는 이제 흙이 묻더라도 땅을 밟는 사랑을 알았으리라.

 

이 시의 꽃은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이다. 하얗고 가늘고 기다란 나비의 몸과 초생달이 그려지고, 새파란 바닷물에 새파랗게 전 흰나비의 허리가 그려지고, 지쳐 돌아오는 흰나비 허리를 비추는 저물녘 초생달이 그려지기도 한다. '시린' 풍경들이다. 어쨌든 '바다'가 냉혹한 현실이라면 '나비'는 순진한 꿈의 표상이다. 꿈은 언제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도전한다. 근대 혹은 서구문명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역사 혹은 시대의 흐름 앞에 무력했던 시인의 모습도.

 

김기림(1908~?) 시인의 탄생은 현대시 탄생과 그 햇수를 같이 한다(얼마 전 출생연도가 1907년으로 기록된 학적부가 발굴되어 탄생 101주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30년대 이상(李箱)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하면서 서구문명을 지향하는 '새로운 생활'을 동경했다. 그는 기자, 문학비평가, 번역가, 대학 교수를 겸한 모더니즘 선봉에 선 시인이었으나 분단과 전쟁은 그를 납북 이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비운의 모더니스트'로 만들어버렸다. / 정끝별·시인, 조선일보 2008.03.10

 

☆ 김기림 [金起林, 1908.5.11~?]

본명 仁孫, 필명 片石村.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鶴中)에서 출생.

서울 普成高普, 日本大學을 거쳐 東北帝國大學 영문과 졸업.

 

1914년 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중학(立敎中學)에 편입했다. 1930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문학예술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 뒤에 신설된 학예부 기자로 옮겼다.

 

1933년 김유정(金裕貞)·이태준(李泰俊) 등과 구인회(九人會) 결성에 참가하고, 1936년에 재차 도일, 센다이(仙台)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리처즈(Richards, I. A.)론이었다. 귀국 후(1939)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40년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으로 한때 실직했으며,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 때의 제자에 시인 김규동(金奎東)이 있다.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하였는데, 이 때 많은 서적과 가재를 탈취당해 곤궁한 나날을 보냈다.

 

월남 후 중앙대학·연희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고, 그가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북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 Daum 백과사전 발췌

 

* 김기림 시인(보성고 18회)이 나의 모교 보성고등학교 선배님이어서 그의 시(詩)들이 더욱 반갑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74주년 광복절 기념식 축사에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하셨다. 오늘 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식 축사는 어느 때보다 내 가슴을 심하게 울린다. 굳건한 경제 강국, 남북 분단 극복하여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대한민국, 남북 분단이 극복되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대한민국, 우리 아들 딸 손주들이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문 대통령께서 강조하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구절이 나오는 김기림 시인의 시 '새나라 송(頌)'을 찾아 읽어 본다. / 2019.08.15 김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