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8월의 시 오세영, 8월 한낮 박인걸, 8월에는 최홍윤, 8월은 성백군 (2019.08.01)

푸레택 2019. 8. 1. 08:24

 

 

 

 

 

 

●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 8월 한낮 / 박인걸

 

마당가 미루나무 잎은

연실 부채질을 해도

잎에 붙은 땡볕을

떼 낼 수 없어 괴롭고

 

블럭 담장을 짚은

호박 넝쿨 여린 손가락이

화상을 입은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쏘다니던 고추잠자리도

비행을 잠시 멈추고

응달진 빈 가지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고

 

처마 밑 그늘에 앉은

칠순 노인 한 분은

눈꺼풀에 고드랫돌을 단 듯

눈 뜨기가 힘들다

 

소 등에서 피를 빨던

말벌만한 등애 한 마리가

잉잉거리며 달려들 때

오던 낮잠이 싹 달아났다

 

● 8월에는 / 최홍윤

 

봄날에

서늘하게 타던 농심(農心)이 이제

팔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된더위 만나 허우적거리지만

기찻길 옆엔 선홍빛 옥수수

간이역에 넉넉히 핀 백일홍

모두가 꿈을 이루는 8월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또 한해의 지난 날들

앳되게 보이던

저어새의 부리도 검어지는데

홀로 안간힘으로 세월이 멈추겠는가

 

목백일홍 꽃이 지고

풀벌레 소리 맑아지면은 여름은 금세

빛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마는 것

우리가 허겁지겁 사는 동안

오곡백과는 저마다 숨은 자리에서

이슬과 볕, 바람으로 살을 붙이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단지, 그 은공을 모르고

비를 나무라며 바람을 탓했던 우리

그리 먼 곳보다는

살아 있음에 고마울 뿐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인데

어디로 가고

무엇이 되고 무슨 일보다,

 

8월에는 심장의 차분한 박동

감사하는 마음 하나로 살아야겠다

 

● 8월은 / 성백군

한해의 갱년기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은 감정을

삭이는 성숙한 달이다

 

말복, 입추 지나 처서 접어들면

생각 없이 마구 극성스럽던 더위도

치솟던 분수대의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뒤돌아 보며 주저앉고, 이제는

성숙을 위해 성장을 멈추어야 하는 때를 아는 것처럼

뻣뻣하던 벼 이삭도 고개를 숙인다

 

꽃 필 때가 있으면 꽃 질 때도 있듯이

오르막 다음은 내리막

밀물 다음은 썰물

이들이 서로 만나 정점을 이루는 곳, 8월은

불타는 땅, 지루한 비, 거친 바람 다독이며 고개를 숙이고

가뭄 지역, 수해 매몰지구에 의해

시장에 나온 상처 입은 과일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생의 반환점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고

집에서 기르는 누렁이 한 마리

담 그늘 깔고 엎드려 입 크게 벌려 혀 길게 늘어뜨리고

절은 땀 뱉어내느라 헉헉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