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박 / 김용락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
자식새끼 둥둥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을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 올망졸망 두루 달고
도심 아파트 담장 위에서 전진하는 모성(母性)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
● 말하지 않은 슬픔이 / 정현종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 쑥갓꽃 / 김명기
해 걸음 느린 저녁
누군가 화단처럼 만든 텃밭에 노란 꽃 피었다
눈 익은 푸성귀에 저렇게 예쁜 꽃이라니
꽃피우기 전 다 잘라먹어
언제 저것의 꽃을 본 적 있어야지
텃밭 주인 맘이 좋거나
혹은 게으르거나 어쨌든 다행이다 싶어
밭가를 맴도는데
붉게 퍼져가는 저녁 안으로
느실느실 돌아오는 사람들
흔한 저 푸성귀 닮았다, 텃밭 같은 세상
제가 꽃인 줄도 모르고 피어 잘라 먹히는 사람들
근근한 생을 기워주는 일터가 날마다 잘라먹고
그 생의 7할은 자식이 잘라먹고
잘라먹은 자식은 망할 놈의 사교육이 다시 잘라먹고
나는 당신들을 당신들은 나를 잘라먹고
그런 우리 생의 대부분은 협소증을 동반한
기관지 천식 같은 자본들이 씨렁씨렁 잘라먹고
그래서 여태 푸른 대궁인 사람들 돌아오는
어스름한 저녁 길, 어떻게 살아남아 꽃피웠냐고
바람을 쥐고 싸락싸락 흔들어대는 꽃들에게
오래오래 견디는 법을 물어본다
/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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