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소지」, 「친기」, 「눈 오는 날」 이창동 (2019.11.08)

푸레택 2019. 11. 8. 23:18

 

 

 

● 소지(燒紙) / 이창동

 

"할머니, 할머니. 큰일났어."

타는 듯이 붉은 갑사(甲紗) 옷감에 오래도록 눈을 박고 있어서인가, 바느질감을 손에서 놓고 고개를 든 그녀는 눈앞이 휑하게 비워지는 듯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우리 아파트 앞에 수상한 사람이 와 있어. 수상한 사람이 삼춘 잡으러 왔어."

그녀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베란다를 타넘고 들어온 햇살이 아이의 등뒤에서 바늘 끝처럼 눈을 찔러 왔던 것이다. 아래층에서부터 한달음에 뛰어와 가쁜 숨을 씨근대는 아이의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할 뿐 얼른 시선에 잡히지 않았다.

 

"그 그기 무신 소리고?"

"나보고, 너 402.호에 살지 하고 묻더니, 니네 아빠 이름 김성국이지. 그러구, 니네 삼촌은 김성호지 하고 물었어. 그러더니 삼춘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잖아. 이리 와봐, 할머니. 베란다로 내다보면 보인단 말야."

아이가 홍분해서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키고는 먼저 베란다로 달려가 쇠난간 사이로 눈을 붙였다.

 

(중략)

 

"식아, 할매 이빨 좀 빼다고,"

그녀는 아이 앞에 입을 크게 벌렸다. 아이가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할매가 아파서 안 그라나. 우리 식이는 할매 아픈 거 싫제?"

그녀는 아이의 손을 이끌어 금방 빠질 듯이 흔들리는 이빨을 두 손가락으로 잡게 했다. 아이는 미간을 찡그린 채 망설이는 듯하더니 눈을 꼭 감았다. 이빨이 뽑히는 순간, 그녀는 아아 비명을 삼켰다.

 

믿어지지 않는 듯이 더러운 줄도 모르고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손에서 그녀는 뽑힌 이빨을 빼앗았다. 그것은 흉측한 모습으로 뿌리까지 검게 썩어 있었다. 그러나 아픔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작은 아픔의 덩어리인 것만 같은 신체의 일부를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할머니, 우는 거야? 아파서 그래?"

"울기는, 연기가 매바서 안 그러나. 핼미겉이 늙으모 울지도 못한대이."

그녀는 치마꼬리로 눈두덩을 찍었다. 그리고 쉬임없이 불길 속으로 종이를 집어넣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식아, 니도 소원 있으모 빌어라. 지금 소원을 말하모 무신 소원이래도 다 들어주신대이."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아이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불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어미가 돌아오기를 빌기라도 하는 것일까.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아이의 두 눈이 불빛을 담아 이글거렸고 그녀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소지』, 문학과지성사, 1987)

 

● 친기(親忌) / 이창동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다. 늦겨울 저녁의 바람 끝이 제법 눅눅해고, 하늘 한켠이 쿡 찌르면 쏟아질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말 눈이라도 쏟아져 주었으면, 나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밀치며 무질서하게 들어찬 산동네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떨어지지 않으려 한사코 바위를 붙들고 있는 게딱지들 같은가 하면, 폭풍우를 피해 정박한 작은 통통배들, 찢기고 부서진 무수한 난파선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요즘 들어 버스길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며 언제나 내가 느끼는 것은 높디높게 솟은 담벼락 아래에 선 듯한 막막함이었고,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가 버렸으면 하는 충동이었다. 제대를 한지 두 달이 지나도록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빚쟁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려들었고, 집을 비워야 하는 날짜는 열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더 나아지지도 악화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방 한구석을 지키고 있었으며, 나는 학교의 등록일자가 가까워 왔어도 복학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나는 그저 눈이라도 기다리는 심정으로, 눈이 내려 모든 것을 깨끗이 덮어.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어린애같이 감상적인. 생각으로 막연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언제부터인가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골목끝. 전신주에 걸린 외등의. 불빛 속으로 날벌레처럼 어지러이 날리는 눈발은 시리도록 선연한 흰빛이었다. 허공을 항해 얼굴을 치겨들었을 때 눈발이 가득찬 하는늘은 마치 동이 트는 것처럼 밝아보였다. 어떤 눈송이는 떨어지는 대신 깃털처럼 날아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또 어떤 것은 한자리에 머물러 분노에 찬 얼굴처럼 눈 홉뜨고 떨며 떨며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이 정우라 캤나."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아까 처음 볼 때부터 느꼈는데, 참 아부지 마이 닮았다."

나는 형님이 더 닮으셨습니다, 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가 말없이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너그러운 웃음이었다. 나는 가슴이 뿌듯해 오는, 그리고 무엇인가 급하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냈을 때와 같은 설레임을 느꼈다. 나는 남해안 어느 공업단지에 있다는 동생을 생각했다. 집을 나간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생이었다. 내일이라도 그에게 찾아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의 문제든, 복학의 문제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부채의 문제든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알 수 없는 조바심 같은 것이 가슴속에 물결치는 것을 느꼈다. 택시를 잡으려는지 그가 절룩거리며 서둘러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편안하게 내 등허리에 얼굴을 묻고서 당신의 체중을 온전히 내게 맡기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등허리까지 무겁게 전해 오는 아버지의 체중을,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아버지임을 말해 주는 유일한 증거이기라도 하듯이 한 발짝 한 발짝을 아주 힘주어 떼어놓고 있었다.

(『소지』, 문학과지성사, 1987)

 

● 눈 오는 날 / 이창동

 

위병 보초가 엠16 소총으로 여자를 가로막았다. 여자는 몸이 가냘퍼 보였고, 손에 든 여행용 가방이 힘에 겨운지 한쪽 어깨가 기우뚱했다. 보초에게 뭔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여자의 입김이 찬 공기 속에서 하얗게 떠올랐다.

 

"야, 뭐래? 이리 들여보내."

부대 입구에 댕그마니 서 있는 위병소의 창문이 달칵 열리더니, 방한모를 눌러쓴 하사가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왔죠?"

여자가 가까이 갔을 때 하사가 물었다.

"면회 왔어요. 일병 김영민 씨라구."

"몇 중대 소속이요?"

"글쎄요, 그런 건 몰라요. 그냥 여기 있다는 것만 알아요."

 

여자의 얼굴은 추운 날씨에 먼 길을 걸어오느라 빨갛게 달아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할 때마다 버릇처럼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자주 입을 가렸다.

"아가씨, 그것만 가지곤 찾을 수가 없슴다. 소속이 어딘지 확실히 알아야지."

녹슨 난로 밑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불을 피우던 토 한 사람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계급이 병장이었는데, 길죽한 코에 검댕이 묻은 얼굴이 우스꽝스러워서 여자는 쿡 웃음을 삼켰다.

 

(중략)

 

병장이 긴 코를 찡그리며 그녀의 등에다 대고 소리첬다. 몇 발짝 걷다가 돌아서서 여자는 위병소를 향해 까딱 고개를 숙였고, 위병 보초 앞을 지날 때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러나 그녀는 몇 걸음 못 가 눈에 띄게 기운이 빠진 걸음걸이로 가방을 끌다시피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었다.

 

"정말 알 수 없는 놈이군. 하필 여자가 면회 오기 전날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가마안 있자."

별안간 병장이 모자를 급히 눌러쓰며 일어섰다.

"나 두 시간만 다녀오겠수. 싸나이 체면에 저대로 보낼 수야 있나. 여인숙이라도 잡아 줘야지."

"야, 너 말년에 일 저지르는 거 아냐?"

"군대밥이 몇 년인데 그만 눈치도 없으까. 입조심할 테니 걱정 마소."

"입만 조심해? 딴 건 조심 안 하고?"

 

하사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초소의 문이 닫힌 뒤였다. 병장은 금세 여자를 따라잡았다. 병장이 뭔가 열심히 떠들어대며 여자의 가방을 받아 들려고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가방을 사이에 놓고 서로 고집을 부렸는데, 결국 병장의 고집이 이긴 모양이었다. 여자가 가방을 빼앗기자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순순히 병장을 따라 가고 있었다. 길 옆에 숨어 있던 겨울새떼들이 그들의 앞에서 뿔뿔이

날아올라 흩어졌다.

(『소지』, 문학과지성사, 1987)

 

☆ 이창동: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남. 대구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 산업화된 분단사회에 있어서의 새로운 가능성 / 송기한(문학평론가)

 

이창동은 1983년 중편 「전리」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처음 얼굴을 비쳤다. 그 후 이창동은 꾸준히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소설집 「소지』(문학과지성사, 1987)와 「전리』(고려원, 1987) 그리고 최근에 『녹천에는 똥이 많다. (문학과지성사, 1992)를 내었다. 등단 이후 현시점까지의 기간을 고려하면 이창동은 그리 많은 작품을 창작해 왔다고는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등단 초기부터 의욕적으로 작품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는 실정을 감안해 보면, 이창동은 예외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을 많이 써내었다고 해서 작가의 작품세계나 작품의 질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작품이 다루고 있는 소재나 내용이 진부한 것이라든가, 문제적이 아닐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창동은 비록 많은 양의 작품을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내밀한 작품의 질이 양의 부족함을 충분히 메우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창동은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점들을 여러 시각에서 예리하게 짚어 내고 있다. 그러한 문제점들은 그리 간단한 것들이 아니며 꾸준히 그리고 심도 있게 검토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것들이다. 그만큼 이창동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복잡다기한 것이고 여러 실타래들이 얽히고 설켜서 쉽게 풀려지지 않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한 몸부림들이라 할 수 있다. 이창동이 과작의 작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러한 문제점들을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껴안고 있는 까닭이라 생각된다.

 

이창동의 작품은 분단이나 운동권, 개인의 욕망, 그리고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병리적 현상 등 다방면에 두루 길쳐 있으나, 거칠게 나누면 크게 두 가지 계열로 갈라 볼 수 있다. 하나는 분단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들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지금 여기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모순으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것들이다. 그런데 분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든 현대 산업사회의 병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든 간에 이창동의 소설은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방식과 밀접히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분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창동의 소설들은 「친기」와 「소지」, 그리고 「용천뱅이」가 있다. 이 작품들은 한 가족의 운명을 통해 분단의 문제를 파헤쳐 들어가는데, 1980년대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현실변혁 및 분단의 논리와 어느 정도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물론 분단의 문제가 소설의 단골 주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금기시되던 분단의 문제가 4-19를 기점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이후 우리 소설의 단골 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작가를 분단 체험세대의 작가, 분단 미체험세대의 작가로 가르기도 했고, 작품을 반공문학, 통일문학, 분단문학으로 그 영역을 갈라서 분류하기도 했다.

 

이창동의 경우는 분단 미체험세대에 해당된다. 이는 그의 작품에서 분단을 직접 체험한 세대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이다. 즉 그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분단의 문제는 직접체험세대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후대인 아들 세대의 관점에서 제시된다.

 

일반적으로 분단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의 문학적 특질은 분단을 체험한 세대와 이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미리와 꼬리로 밀접히 연결되어 기술되고 있다는 점과 이 미체험세대의 시각에 따라 분단의 편린과 상처들이 상반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체험세대의 이념적 갈등이나 현실인식 등은 사상되고, 대신 그 대가 가져다 준 상황적 결과만이 미체험세대의 시야에서 중점적으근 묘사된다. 그러므로 이런 유형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과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며, 그 연결의 끈은 주로 혈연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미체험세대의 분단문학에서 작가의 분단관은 이 세대가 체험세대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나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

 

이창동의 소설에서 분단의 문제는 체험세대라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이를 바라보는 자식의 관점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는 어쩌면 이념적으로 희생된, 그리하여 동정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 자연스런 귀결처럼 보이나 이창동의 소설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한결같이 무능력자, 폐인, 쓸모없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친기」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는 한때 사상운동에 몸담았다가 실패한 평생 무능력자로 지내면서 어머니나 때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다가 고양의 땅이 수몰되면서 보상받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만 곧 실패하고 마는 삶의 굴곡을 겪는다. 그 후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가족에게는 많은 빚만 안겨 준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그의 대표적인 분단소설이라 할 수 있는 「소지」와 「용천뱅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지」에서의 성국은 아버지가 가졌던 과거의 사상적 전력 때문에 사관학교에서 떨어지고 승진시험에서 탈락되는 등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단지 아들인 성국에게 방해꾼, 훼방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용천뱅이」에서의 막수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도 「소지」에서의 성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도 아버지는 가족과는 별 상관없는 낯선 이방인이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인물이며, 또한 그가 지금껏 신봉해 왔던 이념적 고립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그런 자신에 대해 낙오자, 패배자로 인식하는가 하면, 아무 쓸모없는 용천뱅이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간첩 사건에 자신을 연루시킴으로써 최소한의 일상사로의 복귀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창동의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작가가 일단 이념을 떠나서 분단의 결과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창동은 그러한 인식을 위의 작품들에서 보듯, 가족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읽어 낸다. 이념의 잔영이 스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상당히 일그러진 채 비쳐진다. 그는 가족에게는 무용지물이며, 주인공 자신에게는 방해꾼일 뿐이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밖에 존재하는 이방인과도 같다. 이 이방인은 울타리의 주위를 맴돌면서, 끊임없이 그 틈을 파괴하려 든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다가오는 이러한 충격적 경험들이 수위를 높여 감에 따라 아들은 인식의 단절현상을 일으키게 되고 자아의 연속성은 붕괴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에게 시급하게 다가오는 문제는 이 충격경험이라는 파편들을 주워모아 인식의 완결성을 확립하는 일이 된다. 이창동의 분단소설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에 대한 살해욕망이 바로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그 끔찍한 고통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던 마지막 두 달 동안에도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아니 단 한순간도 온전한 정신으로 있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좁은 방 한구석에 만취해 쓰러져 잠든 아버지에게서 풍기는 술냄새를 맡으며, 그리고 시시각각 빈도를 더해 가는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밤새 이를 갈았고, 아버지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수천 번 되뇌었던 것이다. (「용천뱅이」, 214~215쪽)

 

이러한 살해욕망은 아버지라는 대상을 직접 겨낭한 것인데, 달리 보면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사이의 삼각관계에서 일어나는 부친살해 충동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실제로 이창동의 분단소설에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어머니에 대한 동정과 맞물려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는 「친기」와 「용천뱅이」에서의 어머니가 그렇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강간당하는 「소지」에서의 어머니가 그러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동정은 심리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욕망의 주체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창동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증오감들이 욕망의 주체 차원으로만 한정되어 읽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작가적 역량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아버지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분단의 상흔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가면과 분단의식은 이창동의 작품에서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즉 주체의 욕망발산을 가로막는 아버지의 경우처럼 분단은 개인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성장을 방해하는 일종의 억압기제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이창동의 분단소설은 이러한 장애와 상처를 그대로 남겨놓지 않는다는 데 그 소설적 성과가 있다. 그는 이러한 부친살해의 욕망, 곧 분단의식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독특한 해법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갈등에 대한 화해와 이념적 각성에 의한 사랑의식이다. 심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부친살해의 욕망은 죽음충동과 사랑의식으로 극복된다고 한다. 이 논리에 비춰 볼 때, 이창동이 분단의 상처들을 상호간의 조화와 화해라는 방법으로 치유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그의 분단소설에서 이런 인식들은 「소지」와 「친기」에서 중요한 소설적 장치가 된다. 우선, 「소지」의 경우를 보면 성국과 성호의 이념적 갈등관계가 어머니의 샤머니즘적 행위에 의해 그 갈등이 조정된다. 비록 「소지」가 겉으로 보기에 후손들간의 화해라는, 곧 아버지를 직접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갈등의 근원적 기원이 아버지라는 점에서 분단의식과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국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이유가 아버지의 사상 때문이고, 그가 성호를 증오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사상에 대한 미움이 운동권인 성호에 대한 미움으로 연장된 것이다.

 

"똑똑히 알아둬. 난 너 같은 놈을 제일 미워해, 알았냐? 너같이 말 잘하는 놈. 말로는 뭣이든 다 하겠다는 놈들. 제 부모형제 제 새끼에게 피해를 주고 못살게 하면서 입으로는 온갖 고상한 소리를 다 하는 놈들, 무엇을 위해 죽겠다는 놈들. 그런 놈들은 무엇을 위해서 남을 죽일 수 있는 놈이야. 니들은 한마디로 빨갱이야."

"말씀 함부로 하십니다. 형님!" (「소지」, 81쪽)

 

이처럼 성국의 성호에 대한 사상적 증오는 아버지의 사상으로 인해 그가 지금까지 피해를 받아 왔다는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성국에게는 아버지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의 삶의 존재방식에 부정적인 것으로 작용해 왔고, 따라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기억의 저편으로 묻고 싶은 잠재의식이 성호에 대한 미움으로 나타난 셈이다.

 

갈등조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친기」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소지」가 화해를 미신이라는 비과학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으로 이끌어 냈다면, 「친기」의 경우는 좀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화해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분단세대인 아버지에 의해 화해가 조정된다는 점은 당사자인 어머니에 의해 조정되는 「소지」와 마찬가지이지만, 「친기」가 당사자의 이념적 각성에 의해 조정된다는 점에서는 질적 차이를 보인다. 「친기」는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서 소설이 시작되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 덕수다. 그는 어머니의 기일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제사지낼 것을 요구하면서 어머니의 원을 풀어 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제상에 잔을 올림으로써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 일종의 해원(解愿)의 형식으로 갈등이 조정되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친기」에서 아버지의 해원이 혈연의 정이라든가 동정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첫 부인에 대한 제사를 치른 후 일으킨 극적인 의식의 반전은 그가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 왔던 이념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한다. 자본에 대한 환멸과 자기 정체감을 잃을 정도로 그를 지금껏 지켜줘 왔던 자신의 이념이 사이비였다는 것, 그리고 한 여자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인민을 사랑한다고 했는지에 대한 자기 반성이다. 이미 오류임이 입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의 실천이란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회생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인 가정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확인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큰 것을 지킨다는 핑계로 작은 것을 쉽게 저버리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은 이창동의 소설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소설에서 가족은 개인이 갖는 최소한의 생존공간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창동은 가족을 통해서 분단의 의미를 해석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분단이 가져온 현실을 읽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창동에게 있어 가족은 분단이 시작되고 끝이 나는 하나의 회귀단위라 할 수 있다. 그 시작은 아버지 콤플렉스이고 그 끝은 이 콤플렉스의 극복이다. 따라서 아버지 넘어서기야말로 이창동에게 있어서는 분단 넘어서기라 할 수 있다. 그 넘어서기가 그에게는 바로 화해와 해원, 사랑의식이었던 셈이다.

 

이창동 소설에서 나타나는 다른 한 가지 특징은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도시의 비판적 생태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 이후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은 도시로 대표된다. 도시는 집단이 우선시되는 공동체의 사회라기보다는 작은 자아가 우선시되는 개별화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별적 자아들이 내부의 작은 공간에서만 기능하는 까닭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회석되고 타자에 대한 무관심, 자신만의 이익추구라는 병리적인 측면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이익의 추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경쟁심리와 그 경쟁에서 오는 불안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보편적인 병리 현상이다.

 

이창동은 이런 산업사회의 비판적인 생태를 전일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역량을 보인다. 즉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들이 어느 특수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것으로 읽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슈퍼스타를 위하여」와 「빈집」이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우선 「슈퍼스타를 위하여」는 돈많은 미국인의 집(미국의 개를 지켜 주는 것을 포함하여)을 농촌 노인이 지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자본(그것은 어쩌면 소규모 자아를 지향토록 유도한 대표적인 인자이다)이 공동체의 삶을 파괴한(왜냐하면 노인이 공동체의 삶을 버렸기 때문에) 현대 산업사회의 풍경을 제시한 전형적인 작품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이창동이 그런 피상적인 관찰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창동이 껌팔이 소년을 동정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아주 영악한 소년으로 보고 있는 점인데, 그의 이러한 시각의 이면에는 현대사회가 동정이라든가 긍정적인 것 혹은 선한 것에 대한 어떤 대립항도 있을 수 없음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만큼 이창동이 보는 현대 산업사회의 개인들은 이 사회가 주는 병리적인 영향들에 모두 물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이러한 병리적인 진단은 「빈집」에 이르러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빈집」은 인간관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신뢰가 어떻게 파탄되는가 하는 소설적 장치에 의해 현대사회의한 특징인 불안심리를 효과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상수네는 단돈 300만 원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넓은 집으로 이사간다. 이 집은 회사 부장의 친척 소유로 그가 잠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집을 지켜 줄 겸 임시적으로 옮겨 간 집이다. 그러나 상수네 가족은 큰 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분수에 맞지 않는 그 큰 집이 도둑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상수에게 이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킨 계기는 그를 신뢰한다는 증표로 그 집을 맡긴 회사 부장이 보인 이중적 태도와 부하직원인 용팔의 교활함 때문이다. 통상, 노동 현실에서 보면, 노동자인 용팔이 피해자이며 동정받을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빈집」에서 용팔은 기존의 관념과는 달리 상수나 회사 부장보다도 더 심한 음모자, 가담자의 역할을 맡는다. 산업화의 논리에 따르자면, 상수는 부장보다는 못할지라도 용팔보다는 한수 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누구한테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단지 이용의 대상이지 그 주체는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창동이 현대 산업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기존의 이분법적 논리와는 전혀 상반되게 나타난다. 가진 자(회사부장)에 대한 적개심의 논리나 없는 자(노동자)에 대한 동정의 논리가 아니라, 이들 계층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이 현대의 병리적 생태들에 광범위하게 물들어 있다고 본다. 즉 현대 산업사회란 개인만의 이익이 있을 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라든가 신뢰는 존재하지않는다는 이야기고, 모든 것은 허위와 가면 그 자체이며 개인의 삶에 있어 진정한 방향은 없다는 것이다. 현대란 오직 가면과 허위, 가식이 도처에 물들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낙오자,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빈집」의 상수와 「슈퍼스타를 위하여」의 노인과 같은 인물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일상성에 침잠하여 있을 때에는 그 가면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이 낙오자, 패배자임을 깨닫지 못한다. 가면의 내부에서는 현실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체가 벗겨지게 되면, 가면 속의 얼굴은 강한 햇빛, 자극을 받게 된다. 그것은 곧 깨어남이며, 아는 것은 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녹천에는 뚱이 많다」의 경우는 이러한 가면의 껍질이 벗겨질 때 느껴지는 한 소시민의 고통이 잘 묘사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준식은 학교 급사를 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나온 후, 서무 직원으로 취직한 인물이다. 그리고 다시 야간대학을 나와 학교 교사에까지 이르는 이른바 현대 서민층이 우상으로 받들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서무 직원 시절 만난 여자와 결혼하고 아파트에 입주하는 등 그 자신의 세계에서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가면은 그의 이복동생인 민우의 출현으로 산산이 깨지고 만다.

 

준식이 천신만고 끝에 구축한 가정(家庭)이란 그의 작은 성(城)이 사실은 얼마나 알량한 자기 만족과 허위 위에 지어진 초라한 모조품인가 하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그것을 원했나 원하지 않았나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이 나타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 287쪽)

 

민우의 출현은 아내에게는 남편의 결점을 보는 계기로, 준식에게는 열등감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허위에 가득 찬 삶, 곧 가면 속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 드러남은 준식에겐 고통이고 아픔이며, 삶의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준식은 그러한 본질의 실체를 운동권인 동생을 고발함으로써 보상받으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정체성을 완전히 유지시켜 주지는 않는다. 동생이 잡혀간 후 녹천에 가득한 똥 위에서 준식이 울부짖는 것은 그러한 공허함을 메우려는 자기 몸부림일 뿐 그 어떤 보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발과 병리적 현상들의 나열만이 능사가 될 수는 없다 이창동은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에 대한 진단도 정확하게 하지만, 그 해답 또한 정확히 읽어 낸다. 그의 소설적 매력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읽어 내고 병리 속에서 건강을 읽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그러한 진단 속에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처방을 준비하는데, 관심의 문제를 환기한다든지 도시적 병리 속에서 원시적인 힘에 대한 발견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작가의 노력들이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는 소위 현대인의 무관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잡지사 기자와 시골 노인이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담고 있는데, 노인의 소변보기에서 사건은 절정을 이룬다. 노인은 처음에는 승객들에게 웃음거리로 비쳐지지만 막상 노인의 사정이 급하게 되었을 때에는 귀찮은 존재로 비쳐지게 된다. 즉 노인이 회극의 대상이었을 때는 그들의 잠재의식, 곧 산업화에 물든 이기주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이 비극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그 잠재의식은 곧바로 드러나 소위 자기 편의주의라는 그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모두가 한 뱃속에서 나온 내 형제 같고, 그냥 아무나 막 껴안아주고 싶어라우. 무신 살판이 났다고 물 만난 고기 모양 생기가 나서 세탁소 일도 집어던져 뿔고, 엄니 오늘 하루 당장 세 끼 밥 묵는 게 문제가 아니라우, 사람이 사는 데 더 중요한 일이 있어라우, 하던 내 아들을 너그놈들이 워띠키 한겨? 너그놈들이 그래 사람이여? 헹, 지랄들 한다. 입만 번지르해 갖고 넘이야 죽든 말든 내 속만 채리자는 너그놈들이?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 162쪽)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아들의 죽음을 빗대어서, 노인은 아들이 죽던 상황이나 자기의 어려운 처지가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기인한 것임을 말한다. 그것은 노인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 '내 속만 채리자는' 생각인데, 다름아닌 무관심이다. 무관심이 자기의 아들을 죽이고 자기를 곤혹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노인의 이 같은 발언 속에는 무관심에 젖어 있는 현대인의 잠재의식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일상화된 작은 자아 곧 무관심에 대한 관심의 환기이며, 또한 공동체에 대한 힘찬 몸짓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의미는 노인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함께 나누고자 한 경철과 몇 안 되는 승객들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행동은 비록 소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긴 하나, 현사회가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과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은 일깨움이다.

 

이창동이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에서 관심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면, 「꿈꾸는 짐승」은 도시의 병리적 생태에서 건강의 미학을 제시한 경우이다. 이 작품에서 이창동은 현대 산업사회를 생명력을 상실한 병든 사회로 파악한다. 즉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얻은 부수적 결과가 도시이고, 그 도시는 생명력을 잃은 불구화된 공간이라 보는 것이다. 「꿈꾸는 짐승」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도시에 편입된 생명들이 어떻게 굴절되어 파편화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신도시 시청 청소과에 근무하는 대기는 노새를 끌고 다니면서 청소를 해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노새는 대기를 따라다니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비지만, 이따금씩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눈망울을 보인다. 그럴 때마다 노새의 성기는 발기되어 도시인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결국 노새는 성기의 발기가 원인이 되어 교통사고로 죽고, 대기는 그 도시를 벗어나 고향으로 떠나려고 마음을 굳힌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떠나기 전날 여자와 동침을 한다. 그런데 여자와 동침을 한 후 그는 쓸모없이 되어 버린 줄 알았던 자기의 생명력이 왕성하게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활력을 찾는다.

 

「꿈꾸는 짐승」의 핵심은 도시적인 것과 비도시적인 것의 조화될 수 없는 대립이라 할 수 있다. 노새와 도시의 관계가 그것으로서, 노새는 도시적 삶에의 편입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도시는 산업화의 논리에 따라 편입을 강요한다. 노새의 발기현상이 거부의 몸짓이라면, 노새의 죽음은 편입에의 강요이다. 결과는 문명을 철저히 거부한 노새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화해 불가능한 두 대상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러한 비극과 함께 첨단과 진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 현대사회가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문명 전체를 의심케 하는 불안감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불구화된 도시적 삶의 불안에서 오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대기의 거세콤플렉스가 그 예라 힐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꿈꾸는 짐승」에서 보듯, 이창동에게는 병리적인 도시적 삶의 반대편에 원시적 상상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문명화된 자아 속에 잠재해 있는 불안의 그림자를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워 버린다. 즉 원시적 감성의 힘과 풍요로움을 현대인의 감성에 끌어들임으로써 병리적인 도시적 삶의 한계, 곧 현대 산업사회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창동의 작품들은 모두 중량감이 있는 것들이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어느 하나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무게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잘 읽어 내고 있는, 드문 작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창동은 현재의 우리에게 원죄와 같이 남아 있는 분단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부친콤플렉스로, 산업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이기주의, 거세콤플렉스로 진단하면서 우리 사회를 정확히 읽어 낸다. 그는 1980년대의 치열했던 현실논리 상황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해결의 열쇠를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작가적 우수성을 펼쳐 보였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시선 또한 가지고 있었다.

 

/ 한국소설문학대계(1995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