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산등성이 고영민 (2020.05.22)

● 산등성이 -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대소사(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흙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

[명시감상]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새가 먹고 벌레가 먹고 사람이 먹고 하종오, 엄마는 육군 상병 심재기, 지우개 염승옥, 꽃잎은 오늘도 지면서 붉다 이기철 (2020.05.21)

●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새가 먹고 벌레가 먹고 사람이 먹고 / 하종오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새가 날아와 씨째로 낱낱 쪼아먹지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벌레가 기어와 잎째로 슬슬 갉아먹지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나머지 네 먹을 만큼만 남는다 ● 엄마는 육군 상병 / 심재기 고운 얼굴 이마에 세 가닥 주름 엄마는 육군 상병 아빠의 술 담배가 한 가닥 말썽꾸러기..

[명시감상] 아버지의 나이, 어머니, 결혼에 대하여, 수선화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2020.05.21)

●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어머니 / 정호승 호롱불 켜놓고 밤새워 콩나물 다듬으시던 어머니 날 새기가 무섭게 콩나물다라이 이고 나가 온양시장 모퉁이에서 밤이 늦도록 콩나물 파시다가 할머니 된 어머니 그 어머니 관도 없이 흙속에 묻..

[소설읽기]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윤대녕 (2020.05.21)

●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 윤대녕 어제 나는 아내의 부탁으로 원두커피를 사러 적선동에 있는 현대 빌딩 지하의 '나이스데이'란 찻집에 갔었다. 아내는 언제 커피에 맛을 들였는지 그것만큼은 까다롭게 선택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도 '나이스데이'에서 갈아주는 모카 타입이나 블루마운틴이어야만 했다. 아무데고 백화점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아내는 그 촌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의 찻집에서 갈아 주는, 사실은 별맛도 없는 원두커피만을 고집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곳 커피를 선호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그녀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남편에게 성지순례를 시킴으로 해서 얻어지는 어떤 효과를 노렸는가 모르겠다. 아무튼 아내는 '나이스데이'의 커피와 그곳까지 부러가기가 귀찮아 명..

[소설읽기] 달밤 이태준 (2020.05.19)

※ 다음은 이태준의 단편소설 「달밤」의 전문(全文)입니다 ● 달밤 / 이태준 성북동(城北洞)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처에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고,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놓고 나와 다니는 때문인지, 못..

[소설읽기] 송아지 황순원 (2020.05.18)

※ 다음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송아지」의 전문(全文)입니다. 이 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야기는 6.25동란을 겪은 어느 시골 초등학교 어린이가 피난 때 자기 동무의 당한 일을 쓴 작문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 송아지 / 황순원 - 돌이네가 송아지를 사온 것은 삼학년 봄방학 때였습니다. 아주 볼품없는 송아지였다. 왕방울처럼 큰 눈에는 눈곱이 끼고, 엉덩이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볼기짝에는 똥딱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어디 이따위 송아지가 있어. 돌이는 아버지가 몇 해를 두고 푼돈을 아껴 모아 사온 송아지가 기껏 이런 것이었나 싶어 적잖이 실망과 짜증이 났다. 그래도 한 달 남짓 콩깍지와 사초를 잘게 썰은 여물에 콩도 한 줌씩 넣어 먹였더니 좀 송아지 꼴이 돼 갔다. 그 동안..

[명시감상] 아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배운다 Children Learn What They Live... 도로시 (2020.05.17)

●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배운다 / 도로시 꾸지람 속에서 자란 아이, 비난하는 것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 싸움질을 배운다. 공포심 속에서 자란 아이, 두려움을 배우고 연민 속에서 자란 아이, 자신은 측은하게 여긴다. 놀림 속에서 자란 아이, 수줍음만 타게 되고 질투심 속에서..

[소설읽기] 소나기 황순원,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예민 (2020.05.17)

● 소나기 / 황순원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

[명시감상] 불두화 질 무렵 복효근, 6월에 쓰는 편지 허후남, 봄날은 간다 4절 문인수 (2020.05.16)

■ 불두화 질 무렵 / 복효근 비 갠 뒤 확독에 물이 고이고 아기의 눈빛 속에 송이눈이 오듯이 불두화 흩어져 그 속에 고였다 쌀도 보리도 죽도 밥도 아닌 그것을 눈으로만 눈으로만 한 열흘 먹다가 내 사십 년 표정들을 그것들과 바꾸고 싶다 시방 마을엔 왼갖 웃음과 꽃들이 피었을 거다 꽃 진 불두화 곁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저승도 이쯤이면 꽃빛으로 환할 것 같으다 ■ 6월에 쓰는 편지 / 허후남 내 아이의 손바닥만큼 자란 6월의 진초록 감나무 잎사귀에 잎맥처럼 세세한 사연들 낱낱이 적어 그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하고도 쓸쓸한 이 그리움은 일찍이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잘도 피어나던 분꽃 그 까만 씨앗처럼 박힌 그대의 주소 때문입니다 짧은 여름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초저녁별의..

[명시감상] 폐차와 나팔꽃 복효근, 나무 이제하, 섬잣나무 박철 (2020.05.16)

● 폐차와 나팔꽃 / 복효근 폐차는 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 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 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을 믿지 않아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벌써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