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불두화 질 무렵 복효근, 6월에 쓰는 편지 허후남, 봄날은 간다 4절 문인수 (2020.05.16)

푸레택 2020. 5. 16. 18:38

■ 불두화 질 무렵 / 복효근

 

비 갠 뒤

확독에 물이 고이고

아기의 눈빛 속에 송이눈이 오듯이

불두화 흩어져 그 속에 고였다

 

쌀도 보리도

죽도 밥도 아닌 그것을

눈으로만 눈으로만 한 열흘 먹다가

내 사십 년 표정들을 그것들과 바꾸고 싶다

시방 마을엔 왼갖 웃음과 꽃들이 피었을 거다

꽃 진 불두화 곁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저승도 이쯤이면 꽃빛으로 환할 것 같으다

 

■ 6월에 쓰는 편지 / 허후남

 

내 아이의 손바닥만큼 자란

6월의 진초록 감나무 잎사귀에

잎맥처럼 세세한 사연들 낱낱이 적어

그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하고도 쓸쓸한 이 그리움은

일찍이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잘도 피어나던 분꽃

그 까만 씨앗처럼 박힌

그대의 주소 때문입니다

 

짧은 여름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초저녁별의

이야기와

갈참나무 숲에서 떠도는 바람의 잔기침과

지루한 한낮의 들꽃 이야기들일랑

부디 새벽의 이슬처럼 읽어 주십시오

 

절반의 계절을 담아

밑도 끝도 없는 사연 보내느니

아직도 그대

변함없이 그곳에 계시는지요

 

■ 봄날은 간다 4절 / 문인수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시집『'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 2015)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되는 ‘봄날은 간다’는 1953년 손로원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곡을 붙여 백설희가 처음 부른 이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부를 만큼 큰 사랑을 받은 노래다.

 

특히 2004년 「시인세계」의 설문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로 뽑히기도 했다. 문학적 품격과 자존감을 잃지 않고도 맘껏 좋아하고 지지할 수 있는 좋은 대중가요 가사라는 뜻이리라. 2위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3위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4위에서 6위는 모두 양희은의 노래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한계령’ ‘아침이슬’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시인들이 가는 봄날을 아쉬워하며 같은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이승훈은 ‘달이 뜬 새벽 네 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봄날은 간다’고 했으며, 안도현은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외수는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라 노래했고, 이향아는 ‘영원의 바다 같은 하늘을 질러 나 이제 길을 떠나도 돌아올 수 있는지, 봄날은 간다. 탈 없이 간다.’라고 하였다.

 

천양희 시인은 이 노래를 들을 땐 언니 생각이 난다고 회상하였다.

​"사랑하던 사람과 맺어지지 못하고 부모의 뜻대로 중매결혼을 했던 언니는 특히 연분홍색을 좋아해서 친정에 올 때는 꼭 분홍색 옷을 입고 왔었다. 그 언니는 친정에 오면 잊지 않고 뒷동산에 있는 성황당과 암자를 찾았다. 암자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갈 때 언니의 분홍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앞서가던 언니가 나지막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봄바람에 휘날리던 연분홍치마와 언니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 가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를 부를 때면 그때가 생각나서 나도 조금 울 때가 있다"

 

이동순 시인도 누나를 추억했다. "1950년대 후반의 어느 꽃피는 봄날 백설희의 노래를 유난히 좋아했던 누님은 이 노래를 부르다가 기어이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나도 공연히 서러운 마음이 가득해져서 옆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렸다. 나는 그때 왜 누님이 울음을 터뜨렸는지 아직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서 슬퍼지더라'란 노랫말 속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연이 혹시 있었던 것일까?" 두 시인의 '봄날은 간다'에 대한 회억이 언니와 누이와 결부되었듯이 문인수 시인의 시작 배경에도 누이들이 연관되어 있다.

 

십년 전 늦은 봄 강원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남편들을 먼저 여의고 칠순을 다 넘긴 누이들이 숙소의 비 오는 창가에 기대 부른 노래가 '봄날은 간다'였다. 그 심정과 곡절을 모를 리 없는 시인이 누님들을 위해 기존의 3절 가사에 덧붙여 지은 일종의 헌시가 ‘봄날은 간다 4절’이다. 이제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다 가고 중모리 장단에 여인들의 봄날도 그렇게 가버렸지만 한반도의 봄날은 이제야 넘실대며 다고오고 있다.

 

ㅡ 글: 권순진 시인

 

● 봄날은 간다 /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 2020.05.16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