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새가 먹고 벌레가 먹고 사람이 먹고 / 하종오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새가 날아와 씨째로 낱낱 쪼아먹지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벌레가 기어와 잎째로 슬슬 갉아먹지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나머지 네 먹을 만큼만 남는다
● 엄마는 육군 상병 / 심재기
고운 얼굴 이마에 세 가닥 주름
엄마는 육군 상병
아빠의 술 담배가 한 가닥
말썽꾸러기 내 동생이 한 가닥
공부 않고 컴퓨터만 한다고
내가 그은 한 가닥
셋이서 붙여드린 상병 계급장
지친 몸 눕히시고 코를 고실 때
열심히 가만가만 문질렀지만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
상병 계급장
● 지우개 / 염승옥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지우개가 있다
내가 아플 때
지우개는 나의 아픔을 지우고,
내가 슬플 때
지우개는 나의 눈물을 지우고,
내가 힘들 때
지우개는 나의 한숨을 지운다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자신이 닳아 없어진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지우개가 계속 작아진다
● 꽃잎은 오늘도 지면서 붉다 / 이기철
오늘 내 발에 밟힌 풀잎은 얼마나 아팠을까
내 목소리에 지워진 풀벌레 노래는 얼마나 슬펐을까
내 한 눈 팔 때 져버린 꽃잎은 얼마나
내 무심을 서러워했을까
들은 제 가슴이 좁고 산은 제 키가 무겁지만
햇빛 비치는 곳에는
세상의 아름다운 삶도 크고 있다
길을 걸으며 나는
오늘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걸어간 길의
낙엽 한 장도 쓸지 않았다
제 마음에도 불이 켜져 있다고
풀들은 온종일 꽃을 피워들고
제 마음에도 노래가 있다고
벌레들은 하루 종일 비단을 짠다
마른 풀잎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하다
나는 노래보다 아름다운
풀꽃 이름 부르며 세상길 간다
제 몸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은 땅으로 떨어지고
제 사랑 있어 세상이 밝다고
꽃잎은 오늘도 지면서 붉다
/ 2020.05.21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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