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사랑과 집착 사이 조동례, 기억 김봉규, 벚나무 강미정 (2020.08.02)

● 사랑과 집착 사이 / 조동례 이가 나기 시작하면 젖을 떼야한다고 남들은 당부하는데 마땅히 줄 게 없던 나는 차마 아이가 돌이 지나도록 젖을 물렸다 왼젖을 빨릴 땐 오른젖을 손에 쥐어주고 오른젖을 빨릴 땐 왼젖을 손에 쥐어주었다 세상을 거머쥔 듯 어미를 독차지한 아이의 눈빛 그윽히 바라보던 나도 세상을 품안에 안아보던 순간이어서 젖통이 쪼글쪼글 비워지기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다 비웠구나 안심하던 찰나 자즈러질 듯 비명이 터지고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아이는 제법 자란 앞니로 젖꼭지를 덥썩 깨물어 놓고 도리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어이없는 능청에 나도 온통 웃고 말았는데 그렇다 필요할 때 무조건 주는 게 사랑이라면 필요 이상으로 주는 건 집착이다 나는 세상에게 너무 오래 젖을 물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드..

[명시감상] 비 오는 날 천양희, 함박꽃과 소 서은, 방을 얻다 나희덕 (2020.08.02)

● 비오는 날 / 천양희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 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 lll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 함박꽃과 소 / 서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함박꽃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옆에 할아버지가 어린..

[낮꿈꾸기] 고독 연습, 함께 살아감의 예식 강남순 (2020.07.30)

● [강남순의 낮꿈꾸기] 고독 연습, 함께 살아감의 예식 / 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 교수 1942년에 나온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은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의 감정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외로움이란 나이, 문화,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씨름하는 감정이다. 또한 외로움은 개인적인 주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 한가운데에서 모든 뉴스가 우리의 외면 세계에 쏠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외면세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다. 고립, 외로움 그리고 고독의 경험은 내면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 고립 상태에 있다고 외로움 느끼는 것 아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1933년 ..

[소설읽기] 장맛비 추적추적 내리는 7월, 그리움을 읽다.. '동백꽃' 김유정(2020.07.29)

■ 장맛비 추적추적 내리는 7월, 그리움을 읽다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코비드19'로 집콕하고 있는데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풀냄새와 비냄새, 빗소리가 그리워 내 발걸음은 저절로 문밖을 향한다. 동네 이곳저곳에서 근 한 달 동안 해맑은 아이처럼 밝게 피어있던 루드베키아 꽃이 이번 비에는고개를 숙이고 시들고 있다. 도라지꽃과 원추리꽃 그리고 금불초꽃, 범부채꽃, 참나리꽃은 빗속에 더욱 생기 넘치게 피어나고 있다. 산책 후엔 빗소리 들으며 책을 읽는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소설 읽기가 제격이다. 현실도피일까, 비 탓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소설을 다시 읽으며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꿈꾸던 학창 시절 문학 소년으로 되돌아간다. 며칠 전에는 모처럼 미유키의 정통 장편 추리소설 '화차(火車)..

[명시감상] 아파치족 인디언들의 결혼 축시, 흘레 고성만 (2020.07.28)

● 두 사람 / 아파치족 인디언들의 결혼 축시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다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 흘레 / 고성만 우리 마을에서는 씹할 놈 씹도 못할 놈과 같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 대신 흘레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교미처럼 점잖은 말과는 달리 하다보다는 붙다를 결합시키는 게 보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돌아보면 붕어는 강물을 흘려 수정하고..

[소설읽기] 「B사감과 러브레터」 현진건 (2020.07.27)

● B사감과 러브레터 / 현진건 (1900~1943) 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꾼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훌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법대로 쪽찌거나 틀어 올리지를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어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똥만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명시감상] 저 연약한 들꽃이 어둠을 견디듯 그대, 마음 가난한 사람들아 땅을 딛고 우뚝 서렴.. 나리꽃 백창우 (2020.07.25)

● 나리꽃 / 백창우 아무도 돌보는 이 없지만 들에 나리꽃은 홀로 피었네 하얗게 빛나는 고운 목숨이여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아 한숨을 거두렴 들의 이름 낮은 꽃들에게도 제 삶이 있는 걸 저 연약한 들꽃이 어둠을 견디듯 그대, 마음 가난한 사람들아 땅을 딛고 우뚝 서렴 아무도 찾는 이 없지만 들에 나리꽃은 홀로 서 있네 늘 새롭게 눈 뜨는 맑은 그리움이여 배고파 잠 깬 아이들아 눈물을 닦으렴 들의 조그만 꽃들도 울지 않는 걸 저 외로운 들꽃이 해를 기다리듯 그대, 가슴 순한 아이들아 꿈 하나 지키렴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거야 길이 없다고, 길..

[명시감상]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2020.07.25)

●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김재진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허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

[명시감상] 산수유 꽃을 보려거든 안태현 (2020.07.16)

● 산수유 꽃을 보려거든 / 안태현 아직 꽃이 덜 피어 하나 볼 것 없다고 투덜대고 지나가던 사람의 머리에서 산수유 꽃이 떨어졌다 빠른 걸음으로 고샅길을 오르던 그 사람은 밤잠을 설치며 노란 꽃망울을 밀어 올린 산수유나무의 부르튼 입술을 보지 못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각질도 보지 못했다 찰칵찰칵 풍경을 오래내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돌멩이를 차고 내려오던 그 사람은 아삭거리는 햇살이 올라앉은 돌담 폐가의 음습한 울타리에서 피워 올리는 꽃등의 밝은 심지를 보지 못했다 한 덩이 구름 같은 꽃 그늘 산수유주 한 잔에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정처 없이 떠다니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겨드랑이에 돋친 노란 날개를 보지 못했다 입심 좋은 타령 한 곡조 굽이굽이 고개 넘어 바람처럼 날려가고 흥에 겨워 무릎장단 칠 때마다 봄..

[명시감상]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귀천 천상병, 하관 박목월, 제망매가 월명사 (2020.07.14)

●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하관(下棺) /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다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질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