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고시조] (16) '가마귀 검다 하고' 이직(李稷) (2021.11.12)

■ 가마귀 검다 하고 / 이직(李稷) 가마귀 검다 하고 白鷺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짐승은 네야 긘가 하노라 ◇ 뜻풀이 *가마귀: 까마귀의 옛말. *白鷺(백로): 해오라기. 부리와 목과 다리가 모두 길고 깃과 털이 새하얗다. *검을소냐: 검을 리야 있겠느냐? *네야: 너야말로. *긘가: 그것인가. ◇ 풀이 까마귀가 보기에 꺼멓다고 해오라기야 비웃질랑 말아라.겉이 검다고 해서 속마저 검을 리야 있겠느냐? 도리어 겉은 희면서도 속이 검고 심보가 고약한 짐승은, 바로 너야말로 그런 것이다. [지은이] 이직(李稷: 1362~1431): 이조 개국공신(開國功臣) 으로서, 자(字)는 처정(處庭), 호(號)는 향재(享齋), 본관(本貫)은 성동(星洞)이다. 고려 우왕대(禑王代)에 등..

[명작수필]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田惠麟) (2021.11.12)

■ 먼 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田惠麟)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비하만의 시구(詩句)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명작수필] '은전 한 닢' 피천득 (皮千得) (2021.11.12)

■ 은전 한 닢 / 피천득 내가 상해(上海)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錢莊)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하ㅡ오(좋소).” 하고 내어준다. 그는 ‘하ㅡ오’ 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

[명작수필] '나의 고향' 전광용(全光鏞) (2021.11.11)

■ 나의 고향 / 전광용(全光鏞) 소설가 나의 고향(故鄕)은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이다. 북청이란 지명(地名)이 사람들의 귀에 익게 된 것은 아마도 ‘북청 물장수’ 때문인 것 같다. 수도시설(水道施設)이 아직 변변하지 않았던 8․15 전의 서울에는 물장수가 많았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북청 사람이었던 까닭으로 ‘물장수’하면 북청, ‘북청 사람’하면 물장수를 연상(聯想)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청 사람이 물장수를 시작한 것은 개화(開化) 이후, 신학문(新學問) 공부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특이(特異)한 것은 북청 물장수치고 치부(致富)를 하기 위해서 장사를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그들 뒤에는 반드시 서울 유학생(遊學生)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들이나 동생의 학자(學資)를 위해서는..

[명작수필] '슬픔에 관하여' 류달영(柳達永) (2021.11.11)

■ 슬픔에 관하여 / 류달영 사람의 인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經緯-날과 씨)로 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인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흐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農家族》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명작수필]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김태길(金泰吉) (2021.11.11)

■ 멋없는 세상, 맛있는 사람 / 김태길 버스 안은 붐비지 않았다. 손님들은 모두 앉을 자리를 얻었고, 안내양만이 홀로 서서 반은 졸고 있었다. 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 어린이 하나가 그 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버스는 급정거를 했고, 제복에 싸인 안내양의 몸뚱이가 던져진 물건처럼 앞으로 쏠렸다. 찰나에 운전기사의 굵직한 바른팔이 번개처럼 수평으로 쭉 뻗었고, 안내양의 가는 허리가 그 팔에 걸려 상체만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녀의 안면이 버스 앞면 유리에 살짝 부딪치며, 입술 모양 그대로 분홍색 연지가 유리 위에 예쁜 자국을 남겼다. 마치 입술로 도장을 찍은 듯이 선명한 자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운전기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 그의 듬..

[고시조] (15) '내해 좋다하고' 변계량(卞季良) (2021.11.09)

[고시조] 내해 좋다하고 - 변계량(卞季良) 내해 좋다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하고 의 아여든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 뜻풀이 *의(義) 아녀든: ‘아녀든’은 ‘아니어든’의 준말이다. 옳은 일이 아니거든의 뜻이다. *좇지: 따르지. *천성(天性): 하늘이 준 성품, 곧 타고난 성품. ◇ 풀이 내가 하기 좋다고 하여 남에게 싫은 일을 하지 말것이요, 또 남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니거든 따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타고난 성품을 따라 나 자신이 생긴 그대로 지내리라. ◇ 지은이 변계량(卞季良: 1369~1430): 이조 태종(太宗)때의 학자(學者)로서 자(字)는 거경(巨卿)이고 호(號)는 춘정(春亭)이며,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다. 고려 공민왕(恭愍..

[고시조] (14) '이런들 어떠하며' 이방원(李芳遠) (2021.11.09)

[고시조] 이런들 어떠하며 - 이방원(李芳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뜻풀이 *만수산(萬壽山): 개성(開城) 서교(西郊)에 있으며, 고려 왕실의 칠릉(七陵)이 있는 곳이다. *드렁칡: 둔덕을 따라서 뻗어 난 칡넝쿨. *긔: ‘그것이’의 준말. ◇ 풀이 왕씨(王氏)를 섬기다가 이씨(李氏)를 섬긴들 어떠하리요? 저 만수산에 마구 뻗어난 칡덩쿨처럼 뒤엉킨 채, 새삼스럽게 왕씨다 이씨다 가릴 것 없이 그렁저렁 어울려 사는 것이 어떠하리요? 우리들도 그와 같이 어울려서 오래도록 영화롭게 살아 봄이 좋으리라. ◇ 지은이 이방원(李芳遠:1367~1433): 이성계(李成桂)의 더섯째 아들.이조(李祖) 3대왕(代王) 태종(太宗)으로서..

[고시조] (13) '선인교 나린 물이' 정도전(鄭道傳) (2021.11.09)

[고시조] 선인교 나린 물이 - 정도전(鄭道傳)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등에 흐르르니 반천년 왕업이 물소리 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을 물어 무삼 하리요 ◇ 뜻풀이 *선인교(仙人橋): 개성(開城) 자하동(紫霞洞)에 있는 다리. *자하동(紫霞洞):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 기슭에 있는 경치가 좋은 골짜기를 말한다. *왕업(王業): 나라를 이룩하는 큰 일. *고국(故國): 여기서는 역사가 오래된 나라를 의미한다. *흥망(興亡): 흥하고 망하는 일. *무삼: ‘무엇. 무슨’의 옛말이다. ◇ 풀이 선인교(仙人橋)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자하동(紫霞洞)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오백 년이나 이어내린 왕업(王業)도 남은 것이라고는 이 물소리 뿐이로구나!.얘야,이제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고려 왕조의 흥망을 따져..

[고시조] (12)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성여완(成汝完) (2021.11.09)

[고시조] 눈 맞아 휘어진 대를 - 성여완(成汝完)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뜻풀이] *굽다턴고: 굽다고 하던고의 준말. *굽을 절(節): 절(節)은 절개의 준말. *세한고절(歲寒孤節): 추운 계절에 외롭게 지키는 절개. [풀이] 눈이 쌓이고 쌓여서 굽어진 대나무를 그 누가 굽었다고 말하더냐? 쉽사리 굽을 절개라면 이 차디찬 눈 속에서 푸르른 채로 남아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추운 겨울철에 외롭게도 절개를 지켜 나아감은 오직 너뿐인 것 같구나! [지은이] 성여완(成汝完): 호(號)는 이헌(怡軒)이고 창녕(昌寧)이 본관(本貫)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신돈(辛旽)이 주살을 당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