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작수필] '작은 운동장의 큰 가르침' 정진권(鄭震權) (2021.11.14)

■ 작은 운동장의 큰 가르침 / 정진권(鄭震權) 내 연구실은 2층에 있다. 이 연구실의 창가에 서면 저 아래로 운동장이 내려다보인다. 이 운동장은 겨우 축구장 하나가 들어갈 만한, 어찌 보면 시골 초등 학교 운동장 같은 아주 작은 규모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 학교의 그 귀여운 운동장이 생각날 때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이었을 때, 나는 그 운동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줄 서는 법을 배웠다. 가로세로가 다 같이 똑바른 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니던 어린 나에게 그것은 질서에 대한 최초의 눈뜸이었다. 나에게 다소나마 질서 의식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운동장에서의 그러한 체험 때문일 것이다. 나는 또 그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과 경주하는..

[명작수필]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오너라' 김용택(金龍澤) (2021.11.14)

■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오너라 / 김용택(金龍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파란 날, 그 티없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작고 동그란 운동장에서 창우와 다희가 이마를 마주 대고 앉아 놀고 있다. 운동장 가에 있는 벚나무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바람은 산들거린다. 벚나무 사이에 있는 키가 큰 미루나무 잎이 다 져서 까치집이 덩그렇게 높이 드러났다. 까치가 창우와 다희 가까이서 통통 뛰어놀더니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다람쥐들이 재빠르게 아이들 옆을 지나간다. 창우와 다희는 다람쥐를 못 본 모양이다. 운동장이 끝나는 곳에 펼쳐진 강물의 색깔은 볼 때마다 다르다. 지금은 녹색 비단을 잘 다려 펼쳐 놓은 것 같다. 바람이 이는지 물빛이 찬란하게 반짝인다. 저렇게 작은 물빛들이 모여서 저렇게 크고 아름다..

[명작수필] '나의 슬픈 반생기' 한하운(韓河雲) (2021.11.14)

■ 나의 슬픈 반생기 / 한하운(韓河雲) 태평양 전쟁의 전세는 일본 본토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내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결절이 콩알같이 스물스물 몸의 이곳저곳에 울뚝울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보니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다. 기절할 노릇이다. 결절은 팔, 다리, 얼굴 할 것 없이 나날이 기하급수로 단말마의 발악처럼 퍼지는 것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쑥덕쑥덕한다. 하루는 상사가 부른다. “문둥병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빨리 치료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만이다. ‘세상아, 잘 있거라!’ 하면서 나는 창황히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 땅 함흥에 돌아왔으나 이 꼴로 집에 ..

[명작수필] '나무의 위의' 이양하(李敭河) (2021.11.14)

■ 나무의 위의 - 이양하(李敭河) 첫여름은 무엇보다 볕이 아름답다. 이웃집 뜰에 핀 장미가 곱고, 길 가다 문득 마주치는 담 너머 늘어진 들장미들이 소담하고 아름답다. 볕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장미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첫여름은 무엇보다 나무의 계절이라 하겠다. 신록(新綠)이 이미 갔으나 싱싱한 가지 가지에 충실한 잎새를 갖추고 한여름의 영화를 누릴 모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주는 기쁨과 위안이란 결코 낮춰 생각할 것이 아니다. 살구, 복숭아, 매화, 진달래, 개나리, 장미, 모란, 모두 아롱다롱 울긋불긋 곱고 다채로워 사람의 눈을 끌고 마음을 빼내는 데가 있으나, 초록 일색의 나무가 갖는 은근하고 흐뭇하고 건전한 풍취에 비하면 어딘지 얇고 엷고 야한 데가 있..

[명작수필] '윤오영(尹五榮) 선생님을 기리며' 김학철 (2021.11.14)

■ 윤오영 선생님을 기리며 - 안골은빛수필문학회 김학철 선생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선생님이 가신 지도 어느덧 41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저 같은 필부(匹夫)를 아실 리 없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일합방 3년 전에 태어나시어 36년간의 일제강점기란 암울한 시절과 3년여에 걸친 동족상잔의 참혹한 6.25 전쟁 등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오셨나요? 보성(普成)고등학교에서 20여년간 후학들을 가르치셨고, 3년 늦게 출생한 금아 피천득 선생님과도 교분을 쌓으며 절친하게 지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전에는 ‘마고자’ 즐겨 입으셨다지요? 동대문 맞은 편 길가에서 방망이를 깎던 외고집 노인을 만나 방망이를 깎아 온 일도 있으시고, 달밤에 윗동네로 이사 온 친구를 만나러 ..

[명작수필] '온돌의 정(情)' 윤오영(尹五榮) (2021.11.14)

■ 온돌의 정(情) / 윤오영(尹五榮) 눈이 펄펄 날리는 벌판을 끝없이 걷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불을 끄고 희미한 창문을 바라본다. 그러면 소창素窓 밖에서 지금 끝없는 백설이 펄펄 날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밤에 말없이 다소곳이 앉은 여인과 있어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화로에 찻물을 올려놓고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바글바글 피어나는 맑은 향기에서 고운 여인의 옥양목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끝없이 아득한 옛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골통대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그러면 선향線香 같이 피어올라 안개 같이 퍼지는 속에서 아득한 옛날의 전설이 맴도는 것이다. 달밤에 호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나는 한길로 난 들창을 열고 넓은 터를 내..

[고시조] (25) '초당에 일이 없어' 유성원(柳誠源) (2021.11.14)

■ 초당에 일이 없어 / 유성원(柳誠源) 草堂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太平盛代를 꿈에나 보려터니 門前에 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와라 [뜻풀이] *초당(초당): 안채와 떨어져 있으며, 짚이나 띠풀로 지붕을 이은 별채를 이른다. *태평성대(太平盛代):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시대’를 이른다. 곧 나라에 혼란 따위가 없어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시대. *문전(門前): 문 앞. *수성어적(數聲漁笛):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이 부는 몇 마디의 피리 소리. 어부들의 노래소리. *깨와라: 깨우도다의 옛말. 깨우는구나! [풀이] 초당(草堂)에 앉아있어도 별로 하고싶은 일이 없었으므로, 거문고를 베고 드러누워서, 태평한 성대(盛代)를 꿈에나 볼까 하였더니, 채 꿈도 이루기 전에, 문밖에서 떠들썩하는 어부들..

[고시조] (24) '수양산 바라보며' 성삼문(成三問) (2021.11.14)

■ 수양산 바라보며 / 성삼문(成三問) 首陽山 바라보며 夷齊를 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것인들 긔 뉘 땅에 났더니 [뜻풀이] *수양산(首陽山): 중국 산서성(山西省)남서쪽에 있는 산.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칠 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절의(絶義)를 지키려고 이곳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제(夷齊):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아울러 이르는 말. *죽을진들: 죽을지라도, 죽을망정. *채미(採薇): 고사리를 캐다. *하는 것가: 하는 것인가? *푸새엣것: ‘푸새의 것’의 준말. ‘푸새’는 ‘산이나 들에 절로 나는 모든 풀’을 가리킨다. 원래 ‘푸’는 푸지다, 많다의 뜻이며, ‘새’는 남새의 준말로, 반찬으로 먹기 위하..

[고시조] (23) '이몸이 죽어 가서' 성삼문(成三問) (2021.11.14)

■ 이몸이 죽어 가서 / 성삼문(成三問) 이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었다가 白雪이 滿乾坤할 제 獨也 靑靑하리라 [뜻풀이]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이 산에는 신선이 살며 불사의 영약이 있고, 이곳에 사는 짐승은 모두 빛깔이 희며, 금은으로 지은 궁전이 있다고 한다. *제일봉(第一峰): 가장 높은 산봉우리. *낙락장송(落落長松): ‘긴 가지가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를 이른다. *백설(白雪): 하얀 눈. *만건곤(滿乾坤)할 제: 만(滿)은 가득차다, 건(乾)은 하늘, 곤(坤)은 땅을 이른다. 곧 ‘천지(天地)에 가득 할 때에’라는 뜻이다. *독야청청(獨也靑靑): 계절이나 기후에 상관..

[고시조] (22) '객산 문경하고' 하위지(河緯地) (2021.11.14)

■ 객산 문경하고 - 하위지(河緯地) 客散 門扃하고 風微 月落할 제 酒甕을 다시 열고 싯귀를 흩부르니 아마도 山人 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뜻풀이] *객산(客散): ‘손님이 흩어지다’의 뜻으로, 곧 찾아 왔던 손님들이 모두 돌아감을 이른다. *문경(門扃): 경(扃)은 대문에 지르는 빗장을 말한다. 곧‘대문에 빗장을 지르고 문을닫는 것’을 말한다. *풍미(風微): 바람이 약해짐. *월락(月落)할 제: 달이 서산에 질 적에. *주옹(酒甕): 술항아리. 술을 담은 항아리. *싯귀(詩句): 시의 구절. *흩부르니: 흩어지게 부르니. 마구 부르니. *산인(山人): 산에 사는 사람. 세상을 등지고 숨어서 사는 사람을 이른다. *득의(得意): 뜻대로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곧 ‘뽐내는 마음’을 이른다. [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