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작은 운동장의 큰 가르침' 정진권(鄭震權) (2021.11.14)

푸레택 2021. 11. 14. 14:53

■ 작은 운동장의 큰 가르침 / 정진권(鄭震權)

내 연구실은 2층에 있다. 이 연구실의 창가에 서면 저 아래로 운동장이 내려다보인다. 이 운동장은 겨우 축구장 하나가 들어갈 만한, 어찌 보면 시골 초등 학교 운동장 같은 아주 작은 규모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 학교의 그 귀여운 운동장이 생각날 때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이었을 때, 나는 그 운동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줄 서는 법을 배웠다. 가로세로가 다 같이 똑바른 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니던 어린 나에게 그것은 질서에 대한 최초의 눈뜸이었다. 나에게 다소나마 질서 의식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운동장에서의 그러한 체험 때문일 것이다. 나는 또 그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과 경주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주자들에게 공평한 출발선, 모든 주자에게 동시에 들리는 선생님의 화약 총 소리, 나에게만 유리한 것이 제일인 줄 알고 떼를 쓰던 어린 나에게 그것은 공평에 대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나에게 다소나마 불공평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면, 이 역시 그 운동장에서의 그러한 체험 때문일 것이다.

나는 차차 상급생으로 자라면서 기마전을 배우고, 축구를 배우고, 줄다리기를 배웠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는 그 경기들, 힘든 일은 가능하면 남에게 미루려던 어린 나에게 그것은 협동의 참뜻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일에 미력이나마 다하려는 생각이 다소나마 나에게 있다면, 이 또한 그 운동장의 덕분일 것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 학교의 그 작은 운동장, 그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나에게 가르쳐 준 위대한 교실이었다.


그 운동장은 다만 도덕의 교실만은 아니었다. 그 운동장의 북쪽 둘레에는 어리고 귀여운 손들이 가꾸는 예쁜 꽃밭이 있었다. 거기서는 봉숭아가 피고, 채송화가 피고, 맨드라미가 피었다. 해바라기도 드문드문 노란 얼굴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예쁜 꽃밭 위로는 흰나비와 노랑나비가 날았다. 호랑나비도 날았다. 어린 나는 그 꽃밭에 물을 주면서 생명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운동장의 서쪽 둘레에는 수십 년씩 된 플라타너스가 띄엄띄엄 서 있었다. 나는 방과 후에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그 플라타너스에 기대서서 여자 반의 그 예쁜 아이가 운동장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때가 있었다.

싸움을 하고 토라진 우리 반 아이가 웃으며 다가오는 환상을 그리며 서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 나는 플라타너스 그늘에다 돌조각으로 낙서를 하며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체험하게 되었다. 시험을 잘못 보거나 숙제를 잘 해 가지 못한 벌로 청소를 하고 늦게 돌아가는 날이면, 나는 아무도 만나기 싫어 텅 빈 그 운동장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보면 서산에 저녁 놀이 붉고, 때로는 어느 새 별이 뜨기도 했다. 나는 어둠이 깔린 운동장 한 구석의 작은 그네에 혼자 앉아, 아버지와 어머니로도 메울 수 없는 고독을 맛보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 학교의 그 작은 운동장, 그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고운 정서를 나에게 길러 준 자상한 교실이었다.


그 운동장을 생각할 때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가을 운동회이다. 푸른 가을 하늘에는 만국기가 휘날리고, 운동장 가엔 마을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하얀 바지를 입은 여선생님의 오르간 행진곡은 확성기를 타고 운동장 가득히 흘러넘쳤다. 우리는 그 운동장에서 매스 게임을 하고, 경주를 하고, 기마전을 벌였다. 그것은 그 동안 배워 온 질서의 아름다움, 공평한 경쟁의 떳떳함, 협동의 미더움을 드러내는 즐거운 잔치였다. 나는 그 가을 운동회의 경주에서 2등을 하고 뛸 듯이 기뻐한 일이 있다. 기마전에 나아가 단 한 기도 쳐부수지 못하고 침몰했을 때에는 또 얼마나 허무했던가? 어느 새 나의 작은 가슴도 희비애환을 알 만큼 자랐던 것이다.

운동회날의 점심 시간은 참으로 풍요했다. 나무 그늘에 두 집, 세 집이 함께 음식을 벌여 놓고 청군 백군 할 것 없이 서로 나누던 정다운 모습, 사람은 서로 경쟁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던 그 아름다운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다니던 초등 학교의 그 작은 운동장, 그것은 이렇게 우리의 도덕적, 정서적 성장을 확인해 주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한 존귀한 교실이었다.

오늘도 나는 연구실의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다소나마 도덕적 관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과히 비뚤어지지 않은 정서를 가지게 된 것, 이따금이나마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살게 된 것도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물론, 나는 어떤 도덕적 결단에 있어서 용기가 없다든지, 감동적인 사물에 대하여도 아무런 정서적 반응을 나타내지 못한다든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협소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힌다든지 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그 운동장의 가르침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온전히 간직하지 못한 나의 결함에 말미암은 것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내려다본 운동장에는 차차 석양빛이 물들고 있었다. 옛날 그 운동장의 플라타너스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릴 그런 시각이었다. 어떤 아이가 또 그 플라타너스에 기대섰을까?

/ 2021.11.14 옮겨 적음

https://youtu.be/vipncZUJuF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