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3) 꺼삐단 리》에 실려있는 전광용의 단편소설『꺼삐딴 리』를 읽었다.
■ 꺼삐딴 리 / 전광용 (일부 발췌)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李仁國) 박사는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그는 백금 무테안경을 벗어 들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등골에 축축이 밴 땀이 잦아 들어감에 따라 피로가 스며 왔다. 두 시간 이십 분의 집도(수술칼을 잡음). 위장 속의 균종(菌腫)(혹과 비슷한 종기) 적출. 환자는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수술을 끝낸 찰나 스쳐 가는 육감 그것은 성공 여부의 적중률을 암시하는 계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뒷맛이 꺼림칙하다.
그는 항생질 의약품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일제 시대부터 개복(배를 가름) 수술에 최단 시간의 기록을 세웠던 것을 회상해 본다. 맹장염이나 포경 수술, 그 정도의 것은 약과다. 젊은 의사들에게 맡겨 버리면 그만이다. 대수술의 경우에는 그렇게 방임할 수만은 없다. 환자 측에서도 대개 원장의 직접 집도를 조건부로 입원시킨다. 그는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고 스스로 집도하는 쾌감을 느꼈었다. 그의 병원 부근은 거의 한 집 건너 병원이랄 수 있을 정도로 밀집한 지대다. 이름 없는 신설 병원 같은 것은 숫제 비 장날 시골 전방처럼 한산한 속에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인국 박사는 일류 대학 병원에까지 손을 쓰지 못하여 밀려오는 응급환자들 틈에 끼여 환자의 감별에는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것은 마치 여관 보이(Boy)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손님의 옷차림을 훑어보고 그 등급에 맞는 방을 순간적으로 결정하거나 즉석에서 서슴지 않고 거절하는 경우와 흡사한 것이라고나 할까.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 가지의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병원 안이 먼지 하나도 없이 정결하다는 것과,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이나 비싸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환자의 초진(初診)(처음하는 진찰)에서는 병에 앞서 우선 그 부담 능력을 감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신통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경우에는 무슨 핑계를 대든가,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간호원더러 따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환자가 아닌 한 대부분의 경우, 예진(豫診)(간단한 진찰)은 젊은 의사들이 했다. 원장은 다만 기록된 진찰 카드에 따라 환자의 증세와 아울러 경제 제도를 판정하는 최종 진단을 내리면 된다. 상대가 지기(知己)나 거물급이 아닌 한 외상이라는 명목은 붙을 수가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이 양면 진단은 한 푼의 미수(未收)(돈을 못받음)나 결손(돈이 모자람)도 없게 한, 그의 인생을 통한 의술 생활의 신조요 비결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고객은, 왜정 시대는 주로 일본인이었고,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속에 드는 축이어야만 했다.
그의 일과는 아침에 진찰실에 나오자 손가락 끝으로 창틀이나 탁자 위를 훑어 무테 안경 속 움푹한 눈으로 응시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때 손가락 끝에 먼지만 묻으면 불호령이 터지고, 간호원은 하루 종일 원장의 신경질에 부대껴야만 한다. 아무튼 그의 단골 고객들은 그의 정결한 결벽성에 감탄과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1.4 후퇴시 청진기가 든 손가방 하나를 들고 월남한 이인국 박사다. 그는 수복(땅을 되찾음)되자 재빨리 셋방 하나를 얻어 병원을 차렸다. 그러나 이제는 평당 50만 환을 호가하는 도심지에 타일을 바른 2층 양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전문인 외과 외에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개인 병원을 집결시켰다. 운영은 각자의 호주머니 셈속이었지만, 종합 병원의 원장 자리는 의젓이 자기가 차지하고 있다.
(중략)
다음날 휴전선 지대로 같이 수렵하러 가기로 약속하고 이인국 박사는 브라운 씨 대문을 나섰다. 이번 새로 장만한 영국제 쌍발 엽총의 총신을 머리에 그리면서 그의 몸은 날기라도 할 듯이 두둥실 가벼웠다. 이인국 박사는 아까 수술한 환자의 경과가 궁금했으나 그것은 곧 씻겨져 갔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포부와 희망이 부풀어올랐다. 신체 검사는 이미 끝난 것이고 외무부 출국 수속도 국무성 통지만 오면 즉일될 수 있게 담당 책임자에게 교섭이 되어 있지 않은가? 빠르면 일주일 내에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브라운 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학을 갓 나와 임상 경험도 신통치 않은 것들이 미국에만 갔다오면 별이라도 딴 듯이 날치는 꼴이 사나왔다. '어디 나두 댕겨오구 나면 보자!' 문득 딸 나미와 아들 원식의 얼굴이 한꺼번에 망막으로 휘몰아 왔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듯 긴장을 띠다가 어색한 미소를 흘려 보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그는 허공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우선 비행기 회사에 들러 형편이나 알아볼까…….' 이인국 박사는 캘리포니아 특산 시가를 비스듬히 문 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그는 스프링이 튈 듯이 부스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도 호텔로……."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
☆ 전체 줄거리
주인공 이인국은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종합 병원에 버금가는 명성과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의 병원은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청결과 다른 병원에 비해 두 배나 되는 비싼 병원비를 특징으로 하여 성장한다. 그는 양면 진단(병의 증세보다 경제적 능력을 저울질하는 진단)을 통해 철저히 부(富)를 추구한다. 그리고 환자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인 까닭에 그의 병원을 이용하는 대상은 일제 때는 주로 일본인이었고 지금은 권력층이나 재벌에 속한 축들이 대부분이다.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은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두 시간 이십 분의 집도. 위장 속의 균종 적출 환자는 아직 혼수상태에 깨지 못하고 있다. 이인국은 수술을 끝내고 나오며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문득 미국에 유학을 떠나 있는 딸 나미의 편지를 생각한다. 그 편지에는 기필코 미국인과 결혼하겠다는 딸의 고집이 담겨 있다. 상대는 동양학을 전공하는 외국인 교수. 백인 사위에 흰둥이 손자라,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을 그는 후처인 혜숙에게 말한다. 그러나 혜숙은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입맛을 다시며 미국 대사관의 브라운 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는 약속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애지중지하는 '18금 회중시계'를 꺼내 보고,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기억을 떠올린다.
일제 강점기에 그는 철저한 친일파로 행세하여 아이들을 일본인 소학교에 보내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하였고,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할 정도가 되어 '국어 상용의 집'이라는 액자까지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인들에게 밉보일 것이 두려워 독립투사의 치료까지 거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방이 되자 3·8 이북인 그의 고향에 느닷없이 소련군이 진주해 들어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친일 혐의로 치안대에 연행되어 온갖 욕설과 구타에 시달린다. 감방에 감금된 그는 감방 안에 전염병 이질이 만연하자 응급 처치실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소련 장교 스텐코프의 왼쪽 뺨에 붙은 혹이 들어온다. 그는 스텐코프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다. 그는 그 덕에 감옥에서 풀려나고, 스텐코프의 추천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보낸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해에 한국 전쟁이 터져 아들과는 연락이 끊기고 만다. 그는 1·4 후퇴 때 월남한 후에 또다시 변신하여 이번엔 영어를 부지런히 배우고 능란한 처세술을 발휘하여 병원의 고객을 권력층과 재벌과 같은 부유층으로 제한하면서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한다. 미국인의 도움으로 딸까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자동차가 브라운의 관사에 닿는다. 브라운과 만나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는 동안 그는 브라운의 얼굴이 자꾸 스텐코프와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브라운으로부터 자신의 미국행에 대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뿌듯한 무엇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는 브라운의 관사를 나오면서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그리고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서, 또한 월남을 결행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미국에 가서도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 이해와 감상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변신하는 이인국 박사의 모습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에 이르는 격동기의 현대 한국사를 조망하고, 사회 지도층의 위선을 통해 왜곡과 굴절의 역사를 걸어온 근대사의 비극을 폭로한 전형적인 풍자 소설이다. '꺼삐딴'은 영어의 '캡틴(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 어로, 소련군이 북한에 주둔하면서 '까삐딴'이 '우두머리 또는 최고'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발음이 와전되어 '꺼삐딴'으로 통용된 것이다. 작가는 '꺼삐딴 리'라는 제목을 통해 주인공이 출세와 영달에 눈먼 기회주의자의 최고봉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임을 암시하고 있다.
☆ 전광용 작가 (1919~1989)
191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흑산도'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2년 '꺼삐딴 리'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3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발표하고 1989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흑산도', '꺼삐딴 리', '의고당실기', '태백산맥' 등이 있다.
[출처] 한국소설문학대계(33) 《꺼삐단 리》 (전광용, 1995년, 동아출판사) 발췌
/ 2021.04.20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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