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 풀린 봄 강물 / 곽재구
ㅡ 섬진 마을에서
당신이
물안개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밥 짓는 연기가 좋다고
대답했지요
당신이
산당화꽃이 곱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수선화꽃이 그립다고
딴말했지요
당신이
얼음 풀린 봄 강물
보고 싶다 말했을 때는
산그늘 쪽 돌아앉아
오리숲 밖 개똥지빠귀 울음소리나
들으라지 했지요
얼음 풀린 봄 강물
마실 나가고 싶었지마는
얼음 풀린 봄 강물
청매화향 물살 따라 푸르겠지만
■ 봄비 /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 심을 수 있는 마당 / 안태운
무엇을 심어도 되겠지
심을 수 있는 마당
새로운 날씨가 된다면
새로운 곤충이 온다면
심을 수 있는 마당
돋아나는 나물을 심고
그 나물 속으로
내 발자국과 현기증이 들어간다
심을 수 있는 마당
내 방을 심고
우주본도 심었다
파헤쳤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계속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안태운은 1986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201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시인의 말에서 “시작, 하면 다들 흩어질 것이다/ 그래 흩어져서 각자 시를 써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무슨 일이었을까/ 그건 어떤 일이었는지/ 문득 의아해지고/ 그러니까 어떤 마음이 흘러가고 있었을까/ 어떤 풍경이// 거기서 다시 시작해보려고”라고 쓰고 있다. 흩어져서 각자 시를 쓸 것이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어떤 마음이 흘러가는 것인지 의아해지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게 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 쓰기의 지난함이 엿보이는 문장이다.
「심을 수 있는 마당」은 심리적 공간이다. 날씨도 심고 곤충도 심을 수 있는 마당이니 그 심리적 공간에 나물이 돋아나면 발자국과 현기증이 나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 공간에 화자의 방도 심고 우주본도 심었다 파헤칠 수 있다. 파헤친 공간을 화자는 내려다 본다. 계속 내려다보고 있다. 무엇이 보일까. 심리적 공간이니 그 아래에는 화자의 심리적 풍경이 보일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간 『산책하는 사람에게』 중에서.
김윤배/시인
/ 2021.04.19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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