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 100돌 기려 연세대와 '김수영 문학관' 논의 중입니다"
ㅡ 故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 인터뷰
“김수영(1921~68) 시인 탄생 100돌인 오는 11월27일 무렵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시인의 특강 노트 등 유품으로 전시회를 하려고 해요. 김 시인이 1945년에 편입해 다닌 연세대 쪽에서 김수영문학관을 송도 캠퍼스나 신촌의 본교 중 한 곳에 만들겠다고 해서 지금 논의하고 있어요. 설립이 확정되면 연세대와 2024년 개관 예정인 국립한국문학관에 남편의 친필 유고 등 유품을 나눠 기증할 겁니다.”
지난 9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자택에서 만난 고 김수영 시인 부인 김현경씨의 말이다. 만 94살인 아내는 올해 남편 탄생 100년을 맞아 연세대 김수영 문학관 건립 추진 말고도 몇 가지 특별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 16명이 김수영 시인에 대해 쓴 산문집을 내려고 해요. 또 내가 그동안 발표한 산문만 따로 모아 책을 내고, 맹문재 시인과의 대담집도 출간합니다.”
그는 시인 탄생 100년 전시회를 연세대와 별도로 서울 한복판의 큰 미술관에서도 하려고 장소를 알아보고 있다는 말도 했다.
한국전쟁 한 해 전인 1949년에 시인과 부부의 연을 맺은 김현경은 19년 뒤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53년이 흘렀다. 고은 시인은 8년 전에 나온 김현경 산문집 발문에서 김수영의 아내를 두고 이렇게 썼다. ‘남편의 시 세계를 위해서 자신의 문학 잠재력을 다 폐기한 나머지 오로지 남편의 세계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 되었다.’
자유와 혁명의 시인으로 불리는 남편의 시적 성취에 ‘김현경의 몫’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유난스런 양반과 살 수 있었던 것은 공감대 때문이죠. 그 양반의 교양은 넓고도 깊었어요. 또 샤프(명석)했어요. 나랑 짝짝 맞았죠. (남편이) 나를 가리켜 아방가르드(전위), 친공주의라고 쓰기도 했죠.” 이런 일도 있었단다. “이승만 때부터 (남편이) 술만 먹으면 집에 와서 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중요한지 또 사회주의 활동을 보장해야 하는지 내 앞에서 일장연설을 했어요. 그러면 나는 앞에서 손뼉을 쳤죠. 그런 점은 내가 (남편보다) 앞섰을지 몰라요. 그 양반이 1957년 언젠가 전화로 한국시인협회상 1회 수상자가 됐다고 전하길래 내가 ‘반공단체가 주는 상이면 받지 말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아내는 어떻게 남편과 교양과 사상에서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을까? “나도 7~8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어요. 남들과 생각이 달랐어요. 어렸을 때 집에서 일하는 어린 식모들이 밤에 내 발을 씻으려고 하면 도망 다녔어요. 남의 집에서 손이 부르트며 일하는 게 너무 불쌍했거든요. 일제 말에 진명여고를 다닐 때는 신사참배도 거부했죠. 그 때문에 학교 성적은 90점이었는데 품행 점수는 60점이었죠. 이화여대 시절에는 영화감독을 하려고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론 책을 외우고 다녔어요. 등록금을 벌려고 여름방학 때 윤봉춘 감독 영화 《유관순》 조감독도 했죠.”
영화감독의 꿈은 이른바 배인철 사건과 6·25로 좌절됐단다. 그가 김수영에 앞서 연애를 했던 시인 배인철은 김현경과 데이트하다 권총 테러를 당해 사망했고 이 사건으로 김현경은 재학 중 연애 금지 학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화여대에서 제적당했다. “배인철은 시인 임화와 지하련 부부 집에서 만나 한눈에 반했어요. 한 달 반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죠. 배인철이 총에 맞았을 때 총알이 내 옆구리를 스쳤어요.”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4·19는 김수영 문학적 생애의 한 분수령이었다”며 “4·19를 계기로 김수영 문학은 단연코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그 양반한테 이승만은 원수였어요. 오죽했으면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썼을까요. 4.19 났을 때 (남편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매일 같이 신이 났어요. 이승만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 신바람이 났죠.” 4·19 이듬해 군사쿠데타가 터졌을 때는 남편과 함께 친정집에서 일주일가량 피신했단다. “(쿠데타 세력이) 혁명공약 첫 번째로 반공을 내세웠잖아요. 우리를 잡아갈까 봐 친정집으로 도망갔죠.”
“인민군 징집 남편 국군에 총살 위기”
“늘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1954년작 ‘도취의 피안’ 최고의 시”
한국전쟁은 부부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인민군에 강제동원된 시인은 탈출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2년 가까이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아내는 전쟁통의 극한 상황에 몰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생활하기도 했다. “(남편이) 그릇이 컸어요. 재결합한 뒤에 한 번도 내가 다른 남자와 살았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아내는 시인의 전쟁 트라우마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 시인이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두 번 겪었어요. 한번은 국군이 시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큰 웅덩이 옆으로 끌고 가 일렬로 세워놓고 사격을 했는데 옆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 같이 쓰러졌어요. 그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았죠. 이때 국군이 사격했다는 이야기를 생전에 집 밖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한 적이 없어요. 전쟁이 끝나고 문인들까지 (남편이) 인민군에 강제 동원된 것을 두고 부역자니 빨갱이니 그런 말을 했거든요.”
그가 최고로 꼽는 남편의 시는 1954년 작인 ‘도취의 피안’이다. 그는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로 시작하는 시를 직접 읽어 보이고는 “가락이 좋아요. 그 양반이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를 생각하며 쓴 시”라고 말했다.
“그 양반의 에스프리(프랑스어로 정신)는 새롭고도 높았죠. 밤낮 시를 인류를 위해 쓴다고 했어요. 그때는 무슨 허튼소리인가 했는데 그 의미를 점점 알게 되더군요. 그 말에 나이가 들수록 공감하게 되었죠.”
‘인류를 위한 시’라니, 뭔 말일까?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시이죠. 김 시인이 4·19 직후에 쓴 ‘가다오 나가다오’란 시가 있어요. 그 양반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이죠. 어떤 평화주의자도 그렇게 쓰기 힘들 겁니다.” 김수영은 ‘가다오 나가다오’에서 ‘서푼어치 값도 안 되는 미·소인은/ 초콜릿, 커피, 페티코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을 가지고 (중략)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라고 썼다. “남편의 강연록 ‘시여, 침을 뱉어라’는 요즘 읽어도 새로와요. 머리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고 온몸으로 시를 쓰라고 하잖아요. 기존의 시를 다 부정하는 거죠. (남편은) 그때 서정시인들이 쓰는 표현은 하나도 쓰지 않고 자기만의 표현을 했어요. ‘가다오 나가다오’에서도 우리가 보통 쓰는 일상적인 말로 ‘소련놈도 미국놈도 나가라’는 무서운 소리를 했어요. ‘사랑의 변주곡’도 언어 구사가 단단해요.”
시인과 살며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나는 행복이란 말을 써보지도 않았어요. 행복이란 것은 저 산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추운 겨울에 안방 아랫목에서 아이들 데리고 놀 때가 좋았어요. (남편은) 나와 생활감정의 호흡이 맞았어요. 밖에서 누구 만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늘 납득이 가도록 이야기해주었어요. 나를 데리고 외출도 자주 했죠.”
그의 산문집을 보면 시인은 두 아들 준(작고)과 우(63·창고업)의 교육에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 시인은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까? “큰 아이는 공부를 싫어해 목수가 됐으면 했어요. 둘째는 머리가 우수하니 불문학을 공부하기를 바랐죠. 둘째는 성격이 아버지와 똑같아요. 매사에 철저해요. 아버지 바람과 달리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어요. 손녀가 둘 있는데 큰 아이는 미국에서 약사를 하고 둘째는 미술 공부를 해요.”
그는 90대 중반의 나이에도 홀로 집안 살림을 꾸릴 만큼 건강하다. 외출 때는 직접 만든 천 마스크를 쓴다. 그는 1960~70년대에 제법 규모가 있는 의상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요즘 옷도 직접 만드냐고 하자 그는 “요새는 언밸런스(불균형)하게 옷을 입잖아요. 유행을 못 따르겠어요. 그래서 옷은 안 만들고 집에서 쓰는 쿠션 같은 것을 만들어요”라고 답했다.
건강을 화제에 올리자 그는 “집안이 건강 체질”이라고 했다. “가족 중에 혈압 있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집이 딸이 여섯인데 언니가 재작년에 95세로 돌아가셨고 다른 동생들은 지금 다 잘 살고 있어요. 어머니도 86세에 돌아가셨죠. 아버지는 6·25 때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가 야구방망이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김수영 시인이 젊은 시인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공부하라’였단다. 시인이 1965년에 12살 연하인 고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고은을 제일 사랑한다. 부디 공부 좀 해라. 공부를 지독하게 하고 나서 지금의 그 발랄한 생기와 반짝거리는 이미지와 축복 받은 독기가 죽지 않을 때, 고은은 한국의 장 주네가 될 수 있다. 철학을 통해서 현대 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하라. 부탁한다.”
‘시인의 독서법’에 대해 묻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현대문학》이나 《사상계》 같은 잡지가 오면 내가 먼저 훑어보고 ‘이거 재밌겠다, 읽어보세요’라고 전해주곤 했어요. 전병순 소설 《국가》나 남정현 소설 《분지》가 그런 작품들이죠. (남편이) 비매품인 홍명희 장편 《임꺽정》을 읽고 토속적인 언어 구사가 재밌다고 나한테도 읽어보라고 해서 몇 권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는 산문집에서 “그이(김수영)는 일생동안 저를 두고 다른 여자 때문에 방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슴 뿌듯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시인은 김현경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을까? “그 양반이 시어머니한테 그래요. 내가 재주가 좋다고요. 사실 학교 다닐 때 내가 팔방미인이었어요. 그림도 잘 그렸고 학교에서 수학도 제일 잘 했어요. 이화여대 다닐 때 내가 클라스메이트 4명을 시인한테 소개해 준 적도 있어요. 그런데 다 성에 차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더군요.”
3시간 가까이 답을 이어가던 그에게 “피곤하실 텐데 조금 쉬시는 게 어떠냐”고 하자 “왜 피곤해요?”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인터뷰 뒤 그는 만둣국을 끓여 이날 집을 찾은 시인과 기자에게 내놓았다. 직접 내린 원두 커피도 식탁 위에 올라왔다. 이틀 뒤 일요일 오전에 전화를 했을 때도 그는 손님 접대로 조금 바쁘다며 나중에 전화를 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출처] 한겨레신문 (2021.04.11)
■ 도취(陶醉)의 피안(彼岸) /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위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위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위에서 솔개미 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 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위에 하잘 것 없이 앉아 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 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 2021.04.14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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