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가난한 새벽' 박구경, '슬퍼할 수 없는 것' 이성복,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권경업 (2021.04.18)

푸레택 2021. 4. 17. 22:57

■ 가난한 새벽 / 박구경

잠자듯 말뚝이 박혀 있다
하늘이 논물에 가만히 앉아 있다
무엇이 물거울을 건드리는가
50년 전쯤엔 여기가 아버지 얼굴이었다
천천히 두 손을 집어넣으니
삽자루를 타고 논물이 흐른다
국그릇에 걸쳐진 커다란 밥숟가락 같았다
저리로 가는 두꺼비

■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 권경업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 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2021.04.1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