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꽃산 꽃글] 금강초롱꽃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을 본다고 해서 봄인가. 그렇다면 가을은? 꽃들이 입을 다물고 모두들 어디로 간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겠다. 사시(四時)는 명확하고 만물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니 따질 것 없이 이젠 여름 다음의 계절이다.
저 드넓은 천지에만 그 명확한 법칙이 적용되는 건 아니다. 바로 좁은 발밑에서부터 그것은 어김없이 시작된다.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는 것. 드디어 설악산 서북능선의 한계령 삼거리에 도달했다. 왼쪽으로는 귀때기청봉이고 오른쪽으로는 대청봉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오늘도 꽃산행이니 자연이 제공하는 그 허다한 무늬들 중에서도 눈을 파고드는 건 단연 꽃일 수밖에 없었다. 왕성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려 보지만 꽃들은 대부분 지고 흔적만이 남았다. 그 꽃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단풍이다. 이제 꽃이 조용히 비켜나는 건 까닭이 있다. 꽃을 꽃으로 만들어준 잎에서 벌어지는 잔치. 그를 배려하여 단풍과는 경쟁하지 않겠다는 갸륵한 뜻인 게다.
올해에 벌어진 숱한 사연을 간직한 숲. 겨울로 접어들면 꽁꽁 잃어버릴지도 모를 기억을 일깨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래도 가장 늦게까지 핀 꽃은 금강초롱꽃이었다. 가는 줄기에 보라색과 흰색이 어울린 탐스러운 꽃을 달고 있다. 등 같기도 하고 종 같기도 한 금강초롱꽃의 꽃. 희미한 빛도 나오고 은은한 소리도 울리는 듯하다. 금강초롱꽃의 주위는 다른 곳보다도 더 환하고 더욱 깊은 공감각의 자리!
하늘과 땅은 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天地有大美而不言)고 했다. 하지만 서로 아무런 소통조차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라. 오락가락하는 날씨 사이로 하늘에서 잠깐 빛을 보내자 어둑어둑하던 설악산의 한 기슭에 있는 금강초롱꽃의 꽃 두 송이에 환히 불이 들어오는 것을. 그 어디로 저물어가는 설악산의 만물에게 안간힘을 다해 등불을 밝혀주는 금강초롱꽃. 오직 우리나라에만 사는 한국특산식물.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ㅣ경향신문 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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