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꽃산 꽃글] 수정난풀
동물학자도 아닌 주제에 잠깐 동물의 세계로 외출하여 본다. 인간이야 워낙 잡식성이라 논외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동물들은 그 먹이가 조금씩 다르다. 아프리카의 어느 큰 나무에는 수십종의 개미가 이웃해서 산다고 한다. 날씬한 허리의 개미 몸집이 워낙 작은 탓도 있지만 찾는 먹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입이 없다고 식물이 먹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동물과 달리 식물의 주식은 같다. 하늘에서 오는 햇빛과 땅 밑을 흐르는 물. 이를 두고 다투는 식물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숲은 항상 요란하다. 바위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소나무. 일부러 전망 좋은 곳에 터를 잡은 게 아니다. 참나무들과 씨름하다가 져서 거기까지 밀려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움큼의 햇빛이나마 실컷 섭취하기 위해 저 옥탑방으로 이사한 셈이다.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숲이라고 마냥 냉혹한 것만은 아닌가 보다. 침묵의 뿌리가 공중으로 깊게 뻗어가는 산중의 가을이다. 전남 장성 백양산 중턱의 응달 한구석에서 층층이 쌓인 낙엽을 뚫고 자라는 수정난풀을 보았다.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을 할 수 없는 부생(腐生)식물이다. 썩어가는 부엽토에서 양분을 취해서 살아야 하는 고달픈 생활 탓일까. 핏기 없는 짐승들처럼 희고 투명했다. 홀로 독립생활을 할 수 없기에 옹기종기 모여 서로 기대고 있는 다정한 식구들. 그 모습이 시골에서 워낭소리 울리며 살아가던 외양간의 가족들을 매우 닮았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김종삼) 거무튀튀한 낙엽더미에서 이 고운 흰색을 어떻게 길어올렸을까. 거룩한 응달의 사랑 혹은 배려. 묵묵히 바라보다가 잠시 울먹해져서 나도 모르게 송아지의 귀와 목덜미인 양 꽃잎과 꽃받침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준 꽃, 수정난풀. 노루발과의 여러해살이 부생식물.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ㅣ경향신문 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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