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꽃산 꽃글] 산앵도나무
앵두라는 말 한번 귀에 안 걸어보고 자라날 수 있겠나. 자두, 복숭아, 포도, 사과 같은 입술이라고 해본다. 왜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러니 입술에 대해서는 꼭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앵두 같은 네 입술! 그 붉은 입술에 얼떨떨한 내 입술을 닿으려 닿으려 하면서 누구나 설레는 사춘기를 지난다. 앵두라는 말에는 이루지 못한 짝사랑의 헛헛함, 떠나보낸 첫사랑의 아련함이 땡땡하게 뭉쳐 있는 것 같고나.
앵두, 혹은 앵도라고도 하는 것. 산앵도나무는 산 중턱에 주로 있다. 그리하여 설악산 어느 한구석, 귀때기청봉의 너덜겅을 엉금엉금 오를 때 산앵도나무는 지친 나를 끌어당겨 주었다. 산앵도나무는 산앵도나무! 그 이름만 중얼거려도 입안에 날카로운 침이 돌아 헐떡이는 숨의 절반을 고르게 하여 주었다. 혹 열매가 달려 있다면 그 즙은 거의 거덜이 난 나의 원기를 보충하고도 남으리라.
오늘 산앵도나무는 열매 대신 아래로 향하는 작은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그 옛날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는 사이렌이 아니라 종소리였다. 오줌보가 터질 무렵 소사 아저씨가 하마나 울려주실까 고대하던 땡, 땡, 땡 종소리. 교무실 창문 아래 화단에 달려 있던 꼭 산앵도나무의 꽃 같은 종. 쇠로 만든 불알을 차고 있던 학교종.
설악산 중턱에 앉아 산앵도나무 환한 그늘에 얼굴을 적시며 꽃을 보았다. 문득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시골 국민학교 생각이 났다. 폐허로 변한 꽃밭과 뿔뿔이 흩어진 동무들. 그중 한 여학생에게는 마음이 은근히 갔던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을 가리키기라도 하는 듯 꽃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진 그 모든 곳으로 손 뻗으면 땡땡하게 뭉친 추억의 종소리가 울려나올 것만 같은 산앵도나무. 댕그랑, 땡그랑, 앵그랑…… 진달래과의 낙엽 관목.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ㅣ경향신문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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