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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꽃산 꽃글] 배롱나무

푸레택 2022. 5. 17. 22:01

[이갑수의 꽃산 꽃글]배롱나무 (daum.net)

 

[이갑수의 꽃산 꽃글]배롱나무

꽃, 수피, 줄기는 물론 전체적인 수형에 기품이 있는 나무. 유서 깊은 서원이나 사찰의 고졸한 풍경을 완성하는 나무. 배롱나무다. 그 많은 나무들 중에서 나에게 특히 감명 깊은 것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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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꽃산 꽃글] 배롱나무

꽃, 수피, 줄기는 물론 전체적인 수형에 기품이 있는 나무. 유서 깊은 서원이나 사찰의 고졸한 풍경을 완성하는 나무. 배롱나무다. 그 많은 나무들 중에서 나에게 특히 감명 깊은 것은 따로 있다. 몇 해 전. 지리산에 가자고 마음을 모처럼 모았는데 태풍 무이파가 남부 지역을 강타했다. 지리산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종주가 아니면 원주(圓走)라도 하자고 집을 떠나 주천~운봉~인월의 둘레길을 걸었다. 판소리 동편제의 가왕(歌王) 송흥록의 비전마을 생가. 흥(興)인가 한(恨)인가. 구성지게 흘러나오는 명창의 가락을 떠받들어 가지마다 실어 나르듯 흐느끼며 흔들리는 나무가 있었다. 배롱나무였다.

지난주 동북아식물연구소(소장 현진오)가 주관하는 희귀특산 식물 조사의 말석에 끼어 내장산에 들렀다. 연자봉에 올라 문필봉~신선봉~까치봉의 산세와 오전에 통과했던 금선계곡을 굽어보았다. 계곡 끝에 내장사가 달려 있었다. 내 풍수학인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큰 아궁이 같은 산이 있고 그 입구에 절이 있는 셈이었다. 멀리 일주문 근처에 붉은 반점이 보였다. 배롱나무였다.

꽃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즘의 숲은 적막하다. 꽃들의 전성시대를 마감하고 열매를 맺느라 바쁘다. 그 와중에 홀로 핀 배롱나무는 모종의 역할을 담당하는 듯하다. 백일간이나 핀다고 백일홍이라고도 하는 배롱나무. 한 송이가 오래 피는 것은 아니고 여러 꽃들이 교대로 피고 지면서 그렇게 긴 기간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릴레이 개화(開花)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여름 숲에서 벌어진 일을 나무들은 다 기억한다. 폭염이 퍼붓고 태풍이 할퀴고 간 이후를 견디는 시간. 모든 꽃들이 사라진 그 틈을 메우려 배롱나무는 피어 있는가. 가을이 오면 나무들의 울혈을 다스리듯 단풍도 온다. 감추었던 진실이 드러나듯 확 물드는 단풍. 그 불꽃 같은 단풍이 올 때까지 녹색의 아궁이 앞에서 불씨처럼 피어 있는 배롱나무의 꽃. 부처꽃과의 낙엽 교목.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ㅣ경향신문 2014.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