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꽃산 꽃글] 나팔꽃
한라산 꽃산행.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정상 부근의 귀한 꽃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깔끔좁쌀풀을 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인솔자에 따르면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등산로에서 흔히 발견되었다고 했다. 풍광을 좇아다니는 나 같은 자들의 둔탁한 등산화와 날카로운 지팡이에 쫓겨 터전을 잃은 듯했다. 깔끔좁쌀풀. 대체 어떤 용모를 지녔기에 이런 똑떨어지는 이름을 얻었을까. 아쉬운 마음을 잔뜩 짊어지고 산을 내려와 바닷가로 갔다.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해변. 뭍과 바다가 치열하게 다투는 이곳은 햇빛과 물이야 노다지이지만 식물이 살기에 녹록지 않은 환경이다. 사나운 바람과 거친 물보라를 이기며 악착같이 뻗어가는 덩굴성 식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그것도 해변에서 나팔꽃 공부를 할 줄이야. 나팔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흔하디흔한 꽃이지만 파고들면 재미도 있고 그 종류도 많다. 애기나팔꽃, 별나팔꽃, 선나팔꽃, 둥근잎나팔꽃, 미국나팔꽃 그리고 그냥 나팔꽃.
어린 시절의 짓궂은 장난. 나팔꽃 한송이를 따서 흰 '런닝구' 입은 동생의 등에 엎어놓고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붉은 꽃잎은 너무도 야들야들해서 모양과 색깔이 옷에 그리고 등짝에 그대로 인쇄되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거늘 아예 꽃을 때린 셈이었다.
이슬을 방울방울 머금은 채, 마당 한 귀퉁이에서 '담부랑'을 기웃거리며 자라던 나팔꽃.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계의 모든 소리를 모조리 듣겠다는 듯 큰 귀처럼 보이는 나팔꽃. 그 꽃을 따서 나팔처럼 불면 세상의 모든 잘못을 꾸짖는 고함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나팔꽃.
며칠 전 고향의 외가를 찾았다. 아침 산책 길, '질번디기' 산소 쪽으로 걸어가는데 먼저 깬 나팔꽃은 전봇대 허리를 붙잡고 할머니 계시는 하늘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면서 하루의 도(道)를 날마다 깨치는 나팔꽃. 메꽃과의 한해살이풀.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ㅣ경향신문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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