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산오이풀, 쑥부쟁이, 꽃무릇, 짚신나물, 부처꽃, 맥문동

푸레택 2022. 1. 28. 22:08

[풀꽃이름] 산오이풀 / 임소영

늦여름 산에 높이 올랐을 때 무리지어 핀 '산오이풀'은 보는 이들에게 산에 오른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멀리서 보면 강아지풀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잎이 길쭉하지도 않고, 빛깔도 자줏빛이다. '오이풀'은 잎에서 오이냄새가 나기에 붙은 이름인데, 이름의 연유를 아는 사람들은 이따금 냄새를 맡아보기도 한다. 게다가 꽃이 길게 생긴 것도 한 이유가 될 성 싶다. 거기에 높은 산에서 자라서 '산오이풀'이란 이름을 붙였다. 오이냄새가 나는 연유에다 다른 특성까지 담은 '가는오이풀/ 긴오이풀/ 큰오이풀/ 애기오이풀'들도 있다. 이는 두드러진 특성인 냄새를 먼저 고려하고 다음으로 모양이나 사는 데를 이름에 반영한 것이다. 오이풀처럼 냄새를 바탕으로 이름 지은 것에는 잎과 줄기를 문지르면 생강냄새가 나는 '생강나무', 꽃에서 노루오줌 냄새가 난다는 '노루오줌' 들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으로 알려진 '타이탄 아룸'(Titan Arum)은 짐승의 주검 썩는 냄새가 지독하다고 하여 '시체꽃'이란 별명이 붙었는데, 큰 꽃을 갉아먹으려 가까이오는 해충을 막고자 그런다고 하니, 식물이 살아가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쑥부쟁이 / 임소영

가을 꽃으로 흔히 '국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국화과의 꽃은 세계에서 2만종이 넘고, 우리나라 산과 들에도 흔히 들국화라 부르는 구절초·감국·산국·개미취·쑥부쟁이 등 수많은 종의 국화가 있다. 요즘 곳곳의 수목원에서 들국화 잔치를 연다고 한다. '쑥부쟁이'는 제주 고장말로도 '드릇국화'라고도 하듯이, 가을에 산과 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연보랏빛 풀꽃이다. 쑥부쟁이는 꽃모습보다 전설이 더 유명하다. 옛날 충청도에 가난한 대장장이 가족이 살았는데, 너무 가난하여 큰딸이 쑥을 캐어 많은 식구들이 먹고 살았다. 쑥부쟁이는 '쑥을 캐는 불쟁이의 딸'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대장장이는 곧 '불쟁이'이고, 'ㄹ'이 탈락하여 '부쟁이'가 된다. 그 부쟁이의 딸이 한양에 간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다 숨진 곳에 난 꽃이 쑥부쟁이라고 한다. 유난히 목이 길어 누구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같은 국화로 이르지만 황실의 화려한 금빛 국화로도, 비바람에 흔들리는 한 송이 작은 들꽃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이 세상사라는 것을 쑥부쟁이를 보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꽃의 마음으로는 어떤 삶이 더 좋을까.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꽃무릇 / 임소영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서정주·선운사 동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최영미·선운사에서)이라고 동백꽃을 노래했지만, 지금 선운사에는 '꽃무릇'이 불타고 있다.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장성 백양사 쪽도 한창이다. '꽃무릇'은 '꽃+무릇'으로 된 말인데, '무릇'의 뜻을 가늠하기 어렵다. 어떤 이는 무리지어 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무리지어 피는 꽃이 어디 한둘이랴. 오히려 '무릇하다: 좀 무른 듯하다'는 뜻과 관련지을 수 있을 듯한데, '밥을 무릇하게 짓는다'고도 한다. 무릇을 '물고리/ 물구'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런데 무릇은 무르지 않아 꽃대로 조리를 만들기도 했던 것을 보면, 반그늘 습지에서 자라는 점을 반영한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한자 이름은 '석산'(石蒜)이다. 흔히 '상사화'(相思花)와 혼동하는데, 같은 수선화과지만, 꽃무릇은 9~10월에 피고, 상사화는 6~7월에 피고 키도 크다. 후제 어느 시인이 읊을 멋들어진 꽃무릇 노래를 기대해 본다. 꽃말이 '슬픈 추억'이라니 불타는 쓰린 사랑의 노래가 나올 법도 하다.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짚신나물 / 임소영

얼마 전 세계적인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와 짚신 사진을 소개했다. 1586년 지금의 안동 지역에 살던 아이밴 과부가 자기 머리카락과 삼 줄기를 한데 삼은 신발을 편지와 함께 남편 무덤에 묻었는데, 1998년 택지를 개발하면서 발견된 것을 소개한 기사다. 쉽게 마음을 바꾸는 요즘 사람들에게 보여준 영원한 사랑의 진실이다. 풀꽃이름 중에 '짚신나물'이 있다. 꽃받침에 있는 갈고리 같은 가시털이 물체에 잘 들러붙어서 생긴 이름인데, 신기하게도 사람 다니는 길가나 풀숲 쪽으로 많이 난다고 한다. 곧 짚신이나 버선에 잘 달라붙고, 어린 순을 익혀 무쳐 먹기에 '나물'이 붙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넓적한 잎 모양도 짚신과 닮았다. 또한 사람과 짐승에 붙어서 번식하는 것도 특별하다. 꽃말이 '임 따라 천릿길'이라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같은 모양이지만 볏짚으로 삼은 신발은 '짚신'이고, 삼·모시 등으로 삼은 신발은 '미투리'라고 하니까, '원이 엄마의 미투리'가 정확한 표현이다. 큰 은혜(사랑)를 갚는 데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바친다'는 옛말의 정확한 물증을 본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부처꽃 / 임소영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로, 들어온 것은 벌써 1600∼1700년이 되었다. 풀꽃이름에도 '불두화/ 부처손/ 동자꽃' 등 불교 영향이 많이 스며 있다. 서양 풀꽃이름 중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것들에 견줘본다면, 문화바탕이 확연히 다름을 엿볼 수 있다. 염주나무는 영어로 '욥의 눈물'(Job's tear), 삼색맨드라미는 '요셉의 코트'(Joseph's coat)로, 성경을 알아야만 하는 이름들이 꽤 된다. '부처꽃'은 냇가나 연못 등 습지에 자라는데, 길고 화사한 자주보랏빛 꽃을 승려들이 백중날(음력 7월15일) 재를 올리면서 부처님께 바쳤다고 해서 붙었다는 견해가 있다. 전국 어디에나 있고, 연꽃과 함께 절 근처에 많이 피며, 그때가 가장 절정기니까 그럴듯한 설명이다. 또한 이 꽃을 부처님 앞에 흔히 바친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천굴채'(千屈菜)라 하며, 방광염을 낫게 하거나, 이뇨제·지사제로 쓴다. 요즘 새로 생기는 생태공원이나 냇가마다 보기에도 좋고 물도 맑게 한다고 많이 심는다. 날씨가 좀더 더워지는 칠팔월에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듯하다.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한국의 자원식물Ⅳ》에서 / 한겨레

 

[풀꽃이름] 맥문동 / 임소영

아름다운 보랏빛 또는 연자줏빛 꽃이 꽃바다를 이루고 곳곳에 피어 있다. 서울대공원·인천대공원·서울시립미술관 또는 여의도 국회, 영화 '화려한 휴가'의 담양 가로수길, 제주도 길가 나무 밑에서도 한창인데, 흔히 사람들이 그 이름을 궁금해 한다. '맥문동'은 뿌리의 굵은 부분이 보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맥문'(麥門)이라 하고, 겨울을 이겨낸다고 하여 '동'(冬)을 붙였다. 한방에서는 이 덩이뿌리를 기침·가래를 멎게 하거나 체력을 기르는 데 좋다 하여 약재로 달여 먹는다. 우리말로는 '겨우살이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겨울+살이'에서 온 것으로, 겨울을 이기고 다시 피는 여러해살이풀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겨울을 이겨낸 티를 내며 이른봄에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약재로 워낙 많이 쓰이는 점, 다른 나무에 붙어사는 겨우살이과의 '겨우살이'와 혼동될 우려가 있어 일반적으로는 맥문동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뱀까끄라기'(snake's beard) 정도로 일컫는 것 역시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뱀의 습성과 그늘에서 자라는 맥문동의 습성, 꽃이 핀 꽃대 모양이 뱀처럼 긴 것이 함께 이름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