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양지꽃, 개망초, 분홍바늘꽃, 솔체꽃, 갈대, 상사화

푸레택 2022. 1. 28. 21:41

[풀꽃이름] 양지꽃 / 임소영

살다보면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는데, '양지꽃'은 이즈음 빛이 많고 건조한 양지에서 자라 붙은 이름이다. 햇빛을 잘 받았다는 증거라도 보이듯이 진노랑빛이다. 양지꽃은 20종쯤 되는데, 양지꽃보다 조금 늦게 피면서 잎과 꽃이 닮은 '나도양지꽃', 높은 산허리에 자라는 '너도양지꽃', 온몸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솜양지꽃', 돌이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돌양지꽃', 물가에서 자라 '물양지꽃', 기는 가지로 번식하는 '누운양지꽃', 울릉도 '섬양지꽃', 제주도 '제주양지꽃' 등이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쇠스랑개비'라 하는데, 농기구 '쇠스랑'(소시랑)이 갈아엎는 마른 땅에서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양지꽃은 양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한방에서는 허한 음기를 보하는 약재로 쓰고, 화장품 회사에서는 얼굴을 환하게 만드는 데 쓴다니, 이름값을 단단히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양지쪽에만 있는 분들을 보면, 일도 잘 했겠지만 얼핏 처세를 정말 잘했거나 혹은 소신이란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품과 실력이 있으면 '나도양지쪽, 너도양지쪽'이 아니더라도 중하게 쓰는 사회를 꿈꾼다. 글=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자료사진 / 한겨레

[풀꽃이름] 개망초 / 임소영

생김새에 견줘 억울할 이름들이 있는데, 개망초가 그렇다. 어감으로는 아주 몹쓸 풀로 느껴지는데, 밭에 퍼지기 시작하면 농사를 다 망쳐서 '개망초'(皆亡草)라고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물·물감·약 따위로 쓰임새도 많은 풀이다. '개망초'는 산비탈·모래자갈·풀밭 등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고 아무 데나 피어서 우리말 앞가지 '개-'를 붙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망국초·왜풀'이라는 별명은 개망초가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데, 일제시대 철도공사 침목에 묻어 들어와 갑자기 퍼지면서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나라가 망했다고 연관지어 붙인 듯하다. 그러나 그런 배경을 뒤로 하면 '길섶/ 가난한 잡초들 속에/ 개 같은 인생으로 서서/ 찬 이슬, 강아지 똥에도/ 행복한 목숨'(이상훈·개망초)이라는 시에 공감할 만큼 그냥 착한 들꽃이다. '개-'가 붙은 많은 이름들이 억울해할 것이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사람들 중심으로 나쁘다고 규정하니 말이다. 따지고 본다면, 동식물 처지에서 사람은 얼마나 '개-'한 존재들인가. 활짝 핀 꽃모양이 달걀프라이 같아서 '달걀꽃·계란풀'이라고도 불렀다. 북녘말로는 '돌잔꽃'이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자료사진 / 한겨레

[풀꽃이름] 분홍바늘꽃 / 임소영

삶의 양식이 바뀌어서 그런지 사과를 깎지 못하거나 바느질을 못 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공부에 친 아들딸이라 시키지도 않았고, 세탁소에 가면 되니까 빨래나 바느질을 해 볼 기회조차 없었던 아이들. 한번 확인해 보시라. 으레 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못할 때 느끼는 마음이란…. '바늘꽃'은 씨방이 아주 길게 발달해서 바늘을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분홍바늘꽃'은 꽃이 분홍빛이고, 꽃봉오리 모양도 길쭉하고, 꽃이 피었을 때 수술 꽃밥 끝도 바늘귀처럼 생겼다. 물가나 산과 들의 습지에 자라는 그냥 '바늘꽃'에 견줘 높고 깊은 산 양달에 자란다고 '두메바늘꽃', 바늘꽃보다 커서 '큰바늘꽃'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파이어 위드'(fire weed)라는데, 전체가 펑펑 터지는 불꽃 모양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풀꽃에 '골무꽃'이 있는데, 한땀 한땀 꿰매던 바느질은 옛적 할머니 어머니 이야기로 남고, 이제는 골무가 있는 집도 별로 없을 것 같다. '패랭이꽃·물레나물·족도리풀' 이름에서 옛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하고, '노루귀·범꼬리·매발톱' 이름에서 야생동물을 그려보고, '광대수염·기생초' 이름에서 그들의 숨소리를 들어본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솔체꽃 / 임소영

물건 모양을 본 따 붙인 풀꽃 이름으로 '처녀치마/ 골무꽃/ 족도리풀/ 촛대승마 …' 등 보기가 많다. '솔체꽃'도 가을산을 오르며 사람들이 흥미롭게 살펴보는 풀꽃이다. 꽃이 피기 전 봉오리 모습이 가루를 곱게 치거나 국수를 삶아 건질 때 쓰는 체의 촘촘한 그물을 닮았다. 이때는 전체 꽃 모습도 오므리기보다는 평평한 편이다. '솔'은 아마도 꽃이 피면서 드러나는 뾰족뾰족한 꽃술 모양이 솔잎처럼 생긴 데서 온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솔잎이 달린 체' 모양 풀꽃이다. '솔체꽃'이 기본종으로, 잎에 털이 없는 '민둥체꽃', 잎이 깃털처럼 잘게 갈라진 '체꽃', 꽃받침 가시침이 조금 긴 '구름체꽃' 등이 있다. 한자말로는 '산라복'(山蘿蔔)인데, 한방에서 열을 다스리는 데 썼다고 한다. 9~10월 맑은 하늘 아래 피어 있는 보랏빛꽃이 신비한데,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니 자못 사연이 궁금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쓰러진 산골 소년을 요정이 약초로 구해 주었는데, 소년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와 결혼하자 슬픔에 겨운 요정이 숨져 피어난 꽃이라고 한다. 지독히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일까.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갈대 / 임소영

초겨울 산과 들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나 갈대를 본다.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면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로 시작되는 '갈대의 순정'이나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하는 '짝사랑' 노래를 흥얼거릴 법하다. 얼핏 보기엔 비슷하지만 정확히 구별하자면, 갈대는 젖은 땅에 살며 갈색이 돌고 푸슬푸슬한데, 억새는 마른 땅에 살며 은백색을 띠고 비교적 정갈한 모습이다. 갈대는 볏과의 풀이라서 속이 비었고, 발·삿갓·자리 따위를 엮는 데 쓴다. 윤호 등이 엮은 《구급간이방언해》(1489)에 '?대'로 나와 있는데, 이는 ''ㄱ.ㄽ대'+ㅅ+대'의 구조이니 흔히 ''ㄱ.ㄹ+ㅅ+대' >갈'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노랫말은 '바람에 날리는 새털과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인데도,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갈대'는 흔들리고 약한 풀이름의 대표격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아무리 바람에 시달려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갈대의 굳건한 습성 아닐까. 펄 벅이 한국을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라고 썼듯이….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자료사진 / 한겨레

[풀꽃이름] 상사화 / 임소영

서로 만나지 못해 애타게 그리워하는 상사는 안타깝다. "인간 만사 이별 중에 독수공방이 상사난이란다"고 매화타령에도 나오지 않는가. '상사화'(相思花)는 잎이 모두 말라죽은 것처럼 없어졌을 때 비로소 꽃대가 올라와서 꽃이 핀다. 곧,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서로 보지 못하고 생각만 한다고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다. 제주에서는 '말마농'이라 하는데, 통마늘처럼 생긴 비늘줄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터이다. 영어로는 '매직 릴리'(magic lily)라는데, 잎도 없이 꽃대만 훌쩍 서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붙은 이름이라 생각한다. 해마다 고창, 영광 등 남쪽 지방 여러 곳에서 '상사화 축제'를 연다. 그런데 실제로 핀 꽃은 꽃무릇(석산)이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마찬가지라 이름을 혼용하게 된 것인데, 제 이름을 찾아 '꽃무릇 잔치'라고 이르면 어떨까 싶다. 상사화는 꽃무릇보다 먼저 피고 키도 크다. 상사화가 애잔하게 생긴 데 반해 꽃무릇은 정열적인 빨간색이다. 그러고 보니 상사는 애틋함으로 말미암아 불타오르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