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비비추, 동자꽃, 쥐오줌풀, 둥글레, 벌개미취

푸레택 2022. 1. 28. 21:45

[풀꽃이름] 비비추 / 임소영

보랏빛 길쭉한 꽃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동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풀꽃들에 견주어 잎이 길고 두터우며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비비추'는 '비비 틀면서 나는 풀'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비비'는 물체를 맞대어 문지른다는 뜻의 움직씨 '비비다'에서 온, 꼬이거나 뒤틀린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는 살짝 뒤틀리듯이 올라오는 비비추의 잎 모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추'는 곰취 등 나물이름에 나타나는 '취'의 변형으로, 비비추의 옛 이름은 '비비취'다. 이때 '취/추'는 '채'(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배추가 '백채'(白菜·바이차이), 상추가 '생채'(生菜·셩차이)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얘기다. 비비추는 중국이 원산지인 옥잠화와 혼동되기도 한다. '옥잠화'(玉簪花)는 말 그대로 옥비녀꽃이라는 말인데, 꽃 피기 전 모습으로 말미암아 붙은 이름이다. 비비추도 옥잠화와 닮아서 한자말은 '장병옥잠'(長柄玉簪)이다. 곧, 긴자루 옥비녀란 뜻인데, 옥잠화하고는 다른 종이다. 비비추는 보라색 꽃이 피고, 옥잠화는 흰꽃이 피며, 비비추 잎이 조금 더 길쭉하다.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 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쥐오줌풀 / 임소영

쥐해를 맞아 그 특성이 부지런하고 알차다고 덕담하면서 시작된 무자년도 한참 지났다. 예전에 쥐오줌이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며, 쥐 달음박질 소리를 듣고 잠들던 연배들은 그 악행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미키마우스로 승화된 쥐들은 심지어 귀엽다는 대접도 받는다. 이름은 밉지만 꽃은 예쁜 '쥐오줌풀'은 뿌리에서 쥐오줌과 비슷한 독특한 냄새가 나서 붙은 이름이다. 쥐오줌 냄새를 많이 맡아봐서 나온 이름일 터이다. 쥐오줌풀은 날씨가 눅눅해질 5월쯤부터 산속 응달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한방에서는 '길초근'이라 하여 그 냄새나는 수염뿌리를 신경안정제 등으로 쓰기도 한다. 서양에서도 예전부터 진통제로 썼으며, 요즘은 히스테리를 고치는 명약으로 꼽힌다고 한다. 노루가 물을 먹는 숲속 물가에 자라면서 뿌리에서 나는 냄새로 말미암아 '노루오줌', 꽃에서 여우오줌 냄새를 풍겨 쥐를 떨게 한다는 '여우오줌'도 있는데, 동물 오줌냄새를 맡으면서 함께 살았던 옛날이 전설 속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열매가 까맣고 동글동글해서 '쥐똥나무'가 있는 것까지 생각하면, 좋든 싫든 쥐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살았던 동물임을 알 수 있다.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한국의 자원식물IV》에서 / 한겨레

[풀꽃이름] 둥글레 / 임소영

날씨가 쌀쌀한데, 생각해 보니 난로 위에서 끓는 주전자의 따뜻한 김을 본 지도 꽤 오래된 듯하다. 주전자에 넣어 끓이던 차들도 이제 간단한 티백으로 바뀌고 정수기 물을 부어 마신다. 요즘 사람들에게 '우려내는' 일은 답답하고 지루할지도 모른다. '둥굴레'는 요즘 차로도 많이 마시는데, 뿌리줄기를 우려내면 땅콩같이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신속이 지은 《신간구황촬요》(1660)는 기근 구제법에 관한 책인데, 콩을 물에 불렸다가 짓씹어 먹으라는 내용 등을 보면 무척 마음이 아프다. '둥굴레'는 '둥구레'로 적었고 무릇과 송피와 함께 고아 먹으라고 썼다. 그래서인지 '죽네풀'이라는 별명도 있다. '둥굴레'는 말맛과 같이 모양을 본받은 말일 터인데, 잎도 모나지 않고, 동그란 열매가 줄줄이 달려서 '둥굴레'라고 이름 붙인 듯하다. 그러나 꽃 모양으로 말미암아 '괴불꽃'이라고도 했다. '괴불'은 어린아이 주머니 끈 끝에 차는 세모 모양의 조그만 노리개다. 옛사람들이 '살고자' 마셨던 둥굴레의 차맛이 오늘날 '별다방'(스타벅스)이나 '콩다방'(커피빈스)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벌개미취 / 임소영

꽃값이 비싸다 싸다 얘기하지만, 어버이날이나 졸업식날 등 특별한 날을 빼고는 한결같다. 여름에는 싸지만 금방 피었다 시들고, 겨울에는 비싸지만 오래 볼 수 있으니 결국 시간당 누리는 꽃값은 같다. 엊그제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과정 수료식을 마치고 국화꽃다발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중에 보니 '벌개미취'도 들어 있다. 우연으로 그랬겠지만 서양식 꽃말이 '그대를 잊지 않으리!'라니 고맙다.
'벌개미취'에서 '벌'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에 나오는 그 벌이다. '벌노랑이/ 벌씀바귀'처럼 들판에 나는 풀꽃 이름에 붙인다. '개미'는 꽃잎 하나 하나가 개미를 닮은 듯하고, '취'는 어린잎을 나물로 먹기애 붙었다. '벌개미취'는 사는 데, 생긴 모양, 쓰임이 두루 어울린 이름이다. 미국 도시이름 '시애틀'은 본디 원주민 추장 이름이었다고 한다. '합법적'으로 헐값에 땅을 팔라는 그쪽 대통령의 제안에 시애틀 추장은 "우리가 어떻게 공기와 시냇물을 소유할 수 있으며,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사고 판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했다. 더욱이 '들꽃은 우리 누이고, 말과 독수리는 우리 형제'라고 했다니, 시애틀 추장이 보기에 벌판에 있는 꽃을 꺾어 파는 일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

[풀꽃이름] 동자꽃 / 임소영

남부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다. 눈과 관련한 풀꽃이름으로 '동자꽃'이 있다. '동자'(童子)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를 말한다. 옛이야기에, 암자에서 동자승과 함께 살던 스님이 겨울에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는데, 눈이 많이 내려 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님을 기다리던 동자승이 배고픔과 추위에 떨다가 죽은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꽃 모양이 동글동글하고 발그레하여 귀엽게 웃는 동자승의 얼굴을 닮아서 동자꽃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여름철 높은 산 길가에서 산 밑을 바라보며 꽃을 피우고, 꽃말도 '기다림'이다. 동자꽃 꽃잎은 신기할 정도로 심장꼴이라 꽃누르미(압화)를 만들 때 많이 쓰인다. 백두산에서 자라는 제비동자꽃 꽃잎은 제비 꼬리처럼 날렵하게 갈라졌다. 오대산 한국자생식물원에는 '할미꽃/ 양귀비/ 며느리밥풀꽃/ 동자꽃' 등 사람 명칭과 관련된 식물을 모은 곳이 따로 있는데, 풀꽃과 함께 사람 사는 사연을 담고 있어 애틋하다. 동자꽃 이름을 되뇌자니, 어리광을 부려도 모자랄 나이에 동자승이 되어 도를 닦는 일이 무척 짠하게 느껴진다. 꽤 나이를 먹고서도 인생을 모르겠거늘….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