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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산책] 가슴 아픈 이름 ‘백마고지’ (2021.10.29)

푸레택 2021. 10. 29. 21:31

[우리말 산책] 가슴 아픈 이름 ‘백마고지’

6·25전쟁 때 지금의 강원도 철원에서 무서운 전투가 벌어졌다. 해발 395m밖에 안 되는 고지 하나를 두고 국군과 중공군은 12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사용된 포탄 수만 27만발이 넘고, 고지 곳곳에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 마침 헬리콥터를 타고 가던 한 병사가 이를 보고 “파랐던 산이 하얗게 변했다. 마치 백마가 누운 것 같다”고 소리쳤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백마고지’다. 가슴 아픈 이름이다.

아픈 이름으로는 ‘단장의 능선’도 뒤지지 않는다. 유명 게임에도 등장하는 ‘단장의 능선’은 당시 강원 양구군과 인제군의 중간 지점에 있던 일련의 고지 이름이다.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두고 일진일퇴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유엔군이 적의 최후 거점을 점령하게 되지만, 그러한 승전의 기쁨은 유엔군 3700여명과 북한군·중공군 2만5000여명의 목숨과 바꾼 것이다. 숱한 목숨이 스러져 갔으니 ‘몹시 슬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를 의미하는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붙을 만하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붙인 것이 아니다. 미군이 해당 지역에 붙인 이름인 ‘Heartbreak Ridge(산등성)’를 의역한 말이다. ‘Heartbreak’는 ‘비통’을 뜻하지만, ‘Heart’와 ‘break’로 나누면 ‘심장이 찢어진다’쯤 된다.

‘단장의 능선’이 있는 양구군에는 ‘피의 능선’이라는 비극적인 이름의 산등성도 있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는 983고지·940고지·773고지가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전투로 국군과 연합군은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북한군은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를 봤다. 당연히 이 일대는 붉은 피로 흥건했을 터. 그래서 종군기자들이 붙인 이름이 ‘피의 능선’이다.

한편 ‘능선’은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을 뜻하고, 6·25전쟁 때 전투가 벌어진 ‘산의 등줄기’를 가리키는 말은 ‘산등성’과 ‘산등성이’다. (글=엄민용 기자)

[출처] 경향신문 2021.06.21

/2021.10.29 옮겨 적음